강화 초지대교를 지나 왼쪽으로 꺾어 해안도로를 달리다보면 왼쪽에 동검도가 있다.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동검리 84-4번지에 위치한 '동검도 DRFA 365 예술극장'을 지난 23일 찾았다. 2013년 11월 오픈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찾아갈 엄두를 못 냈다. 인천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멀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미룰 수 없었다. 인천시민들에게 이 장소를 소개하지 않는다는 것은 직무유기라는 부담감이 연말에 이곳을 찾게 만들었다. 유상욱(51, 사진) 대표는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시사인천>이 어떤 신문이냐는 질문에서부터 월급은 제대로 나오는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만족하는지 등 오히려 기자가 인터뷰이가 돼버렸다. 영화감독 출신다운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었다.
영화는 인생의 화두를 던지는 것
영화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1999)>을 만든 감독이 바로 유 대표이다. 그 후 <종려나무숲(2005)>, <굿바이데이(2007)> 등 유 대표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업과 예술영화의 중간 정도에 위치하는 영화 두 편을 연거푸 만들었다.
"영화는 선각자다운 눈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영화는 엔터테인먼트 성격이 있어야 돈을 벌죠. 하지만 돈을 버는 것보다 우선해야 하는 게 관객에게 '인생은 이런 것이다'라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관객에게는 '앞으로 너희들에게 펼쳐질 인생은 이런 거다. 참고하라'고 말할 수 있고, 성인들한테는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며 반성할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죠. 인생을 생각할 수 있는 화두를 던지는 게 영화입니다. 그런 기준으로 보면 요즘 영화는 한심한 게 많아요. 오로지 '몇 주를 넘기느냐, 몇 만을 동원하느냐'에만 혈안이 됐어요. 거대 자본주의에 잠식 당했죠. 그게 안타깝습니다."그래서일까? 이제 유 대표는 영화를 제작하는 일보다 좋은 영화를 상영하는 것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동검도 DRFA 365 예술극장'을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찾아오기 힘든 곳에 영화관 만들어야극장 이름 가운데 DRFA는 '디지털 리마스터링 필름 아카이브(Digital Remastering Film Archive)'의 약자로, 분실되고 사라져가는 고전 영화를 찾아 관객에게 소개하려는 목적을 담고 있다.
유 대표는 1950년대 전후의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모아 1999년에 동호회를 만들었다. 영화 필름을 찾아 번역하고, 화질을 디지털로 보정해 두 달에 한 번씩 서울에 있는 극장을 섭외해 상영회를 열었다. 회원이 점점 늘면서 극장을 만들자는 요구가 많아졌다. 회원들은 접근성이 용이한 서울 충무로 인근을 추천했다. 그러나 유 대표는 오히려 사람들이 찾아오기 힘든 곳이어야 하고 자연친화적인 주변조건을 갖춰야한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시네마테크(영화 보관소라는 프랑스어로 소규모 예술극장을 뜻함) 전용관이 서울정독도서관 지하에 있었어요. 안국역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갔는데, 그때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였어요. 하지만 낙원상가로 옮기고 나서 시네마테크의 고유한 향기가 사라졌어요. 제 판단이 맞았어요. 관객들은 좁은 다리를 지나 마을을 통과해 여기에 도착하면 앞이 트인 넓은 갯벌과 희귀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기쁨을 느낍니다. 그것이 주효했습니다."2012년 11월에 땅을 사고 이듬해 1월부터 공사를 시작해 그해 11월 오픈했다. 대구가 고향인 유 대표는 강화나 인천과는 전혀 연고가 없다. 어떻게 이곳과 인연이 닿았을까?
"거제도와 강릉 등 몇 년간 전국을 돌아다녀봤죠. 강화는 석모도와 교동도를 가봤는데 군사 지역으로 바닷가 쪽으로 접근하기도 어려워 매력이 없더라고요. 공인중개사가 마지막으로 가보자고 해 여기에 왔는데, 극장은 안 될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여기 온 순간, '바로 여기다'라는 생각에 바로 다음날 계약했어요."눈앞에 가득 펼쳐진 갯벌이 좋았다는 유 대표. 물이 빠지면 황량한 사막처럼 끝없이 펼쳐진 갯벌이 좋고 물이 들어오면 들어오는 대로 좋았다는 그에게 공인중개사는 지금도 가끔 찾아온단다. 당시 계약하겠다는 본인을 정신이상자처럼 쳐다보다가 지금은 선견지명이 있다고 말을 바꿨단다.
음악과 차와 여유, 영화가 모두 있는 곳
미국 샌프란시스코에는 유서 깊은 '캐스트로'극장이 있다. 이 극장은 저녁에만 운영하는데 미국 전역에서 관객들이 모여든다. 영화를 상영하기 전, 한 노인이 파이프오르간으로 주제곡을 연주하는데, 이 행복에 빠지는 관객이 많다. 유 대표는 언젠가는 한국에서 이런 극장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동검도 DRFA 365 예술극장'은 2층짜리 건물이다. 스크린 앞에 좌석 35개가 있고, 1·2층 곳곳에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좌석도 있다. 극장 스크린 아래에 신디사이저 두 대가 있다.
"영화 상영을 시작하기 전, 주제곡을 연주하고 영화를 설명해요. 연주도 좋아하고, 해설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좋아하시죠."연중 365일 문을 여는 이 극장은 오전 11시 30분부터 오후 8시까지 운영한다. 영화 상영은 오후 12시 30분, 3시, 6시, 하루 세 번 한다. 단, 일·월·화요일은 오후 6시 상영을 하지 않는다. 상영 영화는 대부분 유 대표가 선정한다. 전문적이고 마니아적인 영화보다는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는 영화를 주로 상영한다. 이곳에서 흥행 1·2위를 다투는 영화는 '그레이트 왈츠(1938. 미국)'와 '보리수(1956. 독일)'이다.
"주말에는 거의 매진이에요. 좌석이 적다 보니 계단에 보조의자를 두고 앉을 때도 많죠. 관객 수가 한 달 평균 1500명에서 1800명 정도 됩니다."여기를 찾는 이들의 반응이 좋은 것은, 좋은 영화뿐만 아니라 관람료 2000원에 차와 국수 등의 먹거리를 해결하는 데도 1만 원 정도면 되는 덕분이다. 오히려 관객들이 관람료를 올리라고 하지만, '멀리까지 찾아오는데 1만 원에 충분히 즐기고 가시라'는 주인장의 배려가 담겨있다.
유 대표는 예술극장 옆에 2관을 지을 준비를 하고 있다. 지하에는 1관과 같은 형태의 극장을 만들어 제3세계 작가주의 영화를 상영할 예정이다. 1층에는 커피숍, 2층에는 작가들이 머무를 수 있는 숙소를 만들 계획이다. 또한 극장 근처에 '배우 박물관'을 세우기 위해 부지를 확보해 뒀다. 배우 조은숙과 공동 투자해 영화작업을 위한 공간을 만들 생각도 갖고 있다. 이곳을 장기적으로 영화의 거리로 만들 거란다.
"강화는 오후 7시가 넘으면 인적이 드문 섬이 됩니다. 특히 겨울에는 인적이 더욱 드물죠. 펜션도 문을 닫는 곳이 많아요. 강화 인근에는 일산·김포한강·청라·송도 등 신도시 4개가 형성돼 인프라가 풍부해요. 뉴욕의 그리니치빌리지처럼 연중 365일 언제 오더라도 환한 불이 밝혀져 있는 문화의 거리로 만들고 싶어요.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거리가 되겠죠."아침 출근길이 흥분되는 강화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1급으로 보호받고 있는 두루미 100여 마리가 겨울마다 강화도 해안 갯벌에 찾아온다. 동검도를 찾는 사람들 중 두루미를 보러 오는 사람도 꽤 있다고 한다. 극장 앞에 두루미 세 마리가 자주 왔는데 요즘 며칠째 오질 않아, 유 대표는 걱정한다.
사람들이 강화도를 '뚜껑 없는 박물관'이라 하는 이유를 절실히 느낀다는 유 대표는, 지금 살고 있는 한강신도시에서 아침마다 동검도에 온다는 게 흥분된다고 한다.
"초지대교를 넘을 때마다 매일 다른 풍경으로 반짝이는 바다의 햇빛은 장난이 아니에요. 저는 축복받은 사람이죠. 강화도는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많은, 양파 껍질 같은 곳이에요. 이곳에 온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입니다."문의ㆍ070-7784-7557(블로그
http://blog.naver.com/drf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