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섭(44) '마포 민중의 집' 대표는 지난해 12월 19일 출근하지도 않은 채 집에서 통합진보당(아래 진보당) 해산 결정을 TV생중계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 역사적인 결정 앞에서 '분노'와 '회한'이 교차했다. 지난 11년 동안 진보정당(민주노동당→진보신당→노동당)의 지역위원장으로 활동해왔던 터라 그 분노와 회한은 깊을 수밖에 없었다.
정 대표는 "민주주의 사형 판결문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라며 "이런 상황에까지 오게 된 데 회한도 들었고, 굉장히 모욕적이었다"라고 말했다. "처참한 모욕감"이라는 표현도 썼다. 어렵게 쌓아온 진보정치의 역사들이 어이없이 허물어지자 지독하게 아팠던 모양이다.
"국가권력만의 문제 아니지만 내부성찰론도 공허하다"
정경섭 '마포 민중의 집' 대표 |
1998년 국민승리 21 자원활동 2000년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기자 2002년 민주노동당 마포을지구당 사무국장 2003년 민주노동당 마포을지구당 위원장 2004년 민주노동당 마포을 국회의원 후보 2005년 민주노동당 마포구위원회 위원장 2008년 진보신당 마포구당원협의회 위원장 / 진보신당 마포을 국회의원 후보 / 민중의집 공동대표(현재) 2010년 진보신당 마포구 지방선거대책본부 본부장 2010년 스페인과 이탈리아, 스웨덴 민중의 집 방문 2013년 마포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상임이사(현재) , 우리동물병원생명협동조합 이사장(현재) 2014년 스웨덴과 터키 민중의 집 방문(스웨덴 민중의 집 연합회 초청) 2014년 12월 노동당 탈당
저서 : <민중의집> 레디앙,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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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당 해산 결정을 '한국 민주주의의 죽음'으로 보는 시각도 있고, 오히려 '진보정치의 내부성찰'을 강하게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다. 5일 오후 3시 마포 민중의 집 사무실에서 만난 정경섭 대표는 아주 조심스러웠다. 그는 "앞날의 아득함 때문에 진보당 해산의 의미를 냉철하게 짚어내지는 못했다"라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국가권력만의 문제는 아닐 수 있지만 내부성찰만 하자는 것은 공허한 느낌을 준다."정 대표는 "경기동부('자주파')뿐만 아니라 좌파들('평등파')도 무리수를 뒀다"라며 "이렇게 서로 무리수를 두면서 괴물까지는 아니더라도 기형적인 정파를 탄생시켰다"라고 지적했다. '경기동부'라는 정파가 주도해 온 진보당에만 모든 책임을 돌릴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는 "그런 것(기형적인 정파를 탄생시킨 것)을 성찰하는 게 필요하지만 그 이상을 얘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라고 토로했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얘기하던 정 대표도 "진보당이 피해자인 것은 맞지만 그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이 진보에 도움이 될까?"라며 "'우리는 국가권력에 탄압받아서 해산됐다'는 것에만 갇혀 있으면 안된다"라고 주문했다. '피해자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당이 피해자고, 국가권력에 탄압받았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만 갇혀 있으면 진보진영에 도움이 안된다. 그런 프레임을 깨고, 새롭게 공존하는 소통방식 등을 진보당 스스로 내오지 않으면 안된다."정 대표는 "북한문제와 관련한 진보당의 활동방식과 언어가 사람들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것이 드러났다"라고 지적한 뒤, "평화통일이 중요한 지상과제인데 그것을 얘기하는 것이 더 어려워져 걱정이다"라며 "진보당이 평화통일운동을 자기점검하면서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탄탄치 못한 사회운동-진보정당이 해산 결정으로 이어져"
또한 정 대표는 "진보정치와 그 진보정치를 제어할 수 있는 사회운동세력이 탄탄했더라면 헌법재판소가 진보당을 해산하지는 못했을 것이다"라며 "탄탄하지 못한 사회운동이 진보정치를 제어하지 못하면서 자기분열을 반복했고 결국 모욕적인 해산 결정까지 온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정 대표는 "진보정치는 사회운동의 뒷받침 속에서 열매를 맺는다"라며 "어떤 운동이든 독자운동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각 부문운동이 전략적으로 소통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소통하는 구조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여성, 노동, 환경 등의 부문운동이 각자 운동하기 바빴다. 함께 시너지를 마련하고 비전을 모색하지 않았다. 이렇게 각자 운동해오던 방식이 이제 한계에 부딪혔다. 진보정당에도 부문운동이 들어와 있었지만 이들을 통합하는 전략이 없었다. 그래서 진보정당도 지리멸렬했다."이어 정 대표는 '노동중심성'과 '의존적 관계망'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진보정치-사회운동 동반성장'을 새로운 노선으로 내놓았다. 그는 "자기 혼자만의 노동으로 먹고사는 사람은 없다"라며 "내 노동이 누군가에게 보탬이 되고, 나조차도 누군가의 노동으로 내 생활을 영위한다"라고 말했다.
"사회는 서로의 노동에 의해 유지된다. 우리 노동들은 서로에게 향해 있다. 이런 가치관이 우리에게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절실하고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운동했다. 환경운동하는 사람과 농민운동하는 사람, 노동운동하는 사람이 서로 의존하고 연결돼 있다는 사고방식이 없이 각자 운동만 했다. 내 운동만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정 대표는 "새로운 진보정당이나 진보정치는 각 부문운동을 사회운동으로 성장시키는 전략 속에서 나와야 한다"라며 "새로운 진보정당이 정치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대중운동(사회운동)도 함께 성장시키는 것을 전략으로 내놓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진보정치와 사회운동이 따로 가서는 안되고 함께 성장해야 한다"라는 주문이다.
"무상교육, 독일식 정당명부제 등 과제 의제들만 붙들고 있어"정 대표가 보기에 현 진보정치의 상황은 '최악'이다. 그는 "진보정당에 기대하는 사람은 극소수다"라며 "진보정당은 정치적으로 대중적 영향력을 가진 정치조직이 못되는 것 같다"라고 진단했다.
"'나는 진보주의자다, 좌파다'는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진보정당 당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진보정당이 나와 이웃의 삶을 의탁할 만한 곳은 아니다."정 대표는 "지존파,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등 천박한 자본주의의 끝을 상징하는 사건이 터졌을 때 진보진영은 '김영삼 퇴진운동'에만 매달렸다"라며 "이후 20년이 흘러 세월호 침몰사건이 터졌지만 여전히 대안운동의 패러다임은 나오지 않고 역동적인 에너지를 만들지 못했다"라고 지적했다.
정 대표는 "사회운동과 진보정치가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소통하고, 이들과 행동해야 하는지가 나오지 않았다"라며 "사회운동과 진보정치가 자본주의의 극악한 문제점 등 한국사회가 풀어야 할 의제를 따라가지 못하고 과거 운동방식만 따르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진보정당의 쇠락은 이들이 내세운 의제들이 쇠락한 과정이었다.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독일식 정당명부제 등이 이제 진보정당만의 의제가 아니다. 새누리당도 이주노동자를 비례대표 앞 순번에 배치한다. 진보정당이 청소노동자를 비례대표 1번에 배치하는 것만으로 '사회적으로 다른 세력이구나' 하고 각인되는 시대가 아니다."정 대표는 "진보정당은 과거 의제들만 붙들고 있고, 한국사회를 가슴떨리게 하는 의제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라며 "이것은 상상력의 결여다"라고 일갈했다. 그는 "우리에게 다른 기운이 필요하다"라며 "특단의 조치가 일어나지 않으면 진보정치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지만 대중들의 지지와 열광, 참여를 이끌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진보정치 정당성, 모델하우스로 보여줘라"
또한 정 대표는 "진보정당이 여러 개라서 죄악은 아니다"라며 "그것(진보정당 다당제)이 죄악이 아니려면 여러 개의 진보정당이 하나의 진보블록으로 인식되어서 국가권력에 10%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정 대표는 "진보정당이 선거 시기에 어떻게 진보블록을 형성할 수 있는지를 내놔야 한다"라며 "하지만 여전히 서로를 필요한 존재로 인식하지 않고, (자기 표를 깎아먹는) 라이벌로 생각하고, 서로 '너는 개량', '너는 꼴통'으로 선긋는 데만 열중하고 있다"라고 꼬집었다.
이어 정 대표는 "진보정당의 주장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조그마하더라도 모델하우스를 보여줘야 한다"라며 "저항만 있으면 공허하고, 대안이 없으면 확장할 수 없기 때문에 저항과 대안은 함께 가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정 대표가 올해부터 마포지역에서 협동조합과 상인회를 모아 소비와 일자리 창출로 연결되는 '공동체 경제체제'를 만들려는 이유다. 그에게 공동체 경제체제는 '진보정치의 자그마한 모델하우스'인 셈이다.
정 대표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본주의 체제에 불만을 쏟아내는데 진보정당들은 이것을 먹고사는 문제로 연결시켜주지 못하고 있다"라며 "자본주의 체제와 다른 방식으로 먹고살 수 있음을 실험하게 될 공동체 경제체제가 진보정치활동에 새로운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저항담론, 대항담론만 만들어낼 것이 아니라 모델하우스 하나 정도는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 모델하우스를 보고 신뢰를 가지게 되면 진보정치의 주장은 확장될 수 있다." 특히 정 대표는 "진보정당들이 다시 뒤섞이는 작업들이 올해 안에 이루어질 것이다"라며 '진보정치발 정계개편'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민주노동당이 분화한 지 시간이 많이 흘렀고, 각자 실험했지만 잘 안된다는 사실을 학습했다"라며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서로 필요한 때다, 한 지붕 안에서 공존하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라고 주문했다.
[인터뷰 발언록] "무상의료도 2015년 버전으로 얘기해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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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반려동물의 똥과 오줌을 치워주고, 밥도 준다. 그런데 우리들의 똥과 오줌은 누군가 치워주지만 그 노동은 상품에 가려져 있다. 돈 내면 그만이다. 그 사람의 노동이 안 보인다. 노동이 상품과 돈에 의해 가려진 시대다. 서로의 노동에 의지해서 사는데 상품과 돈에 의해 우리 관계망이 가려진 것이다. 이렇게 의존적 노동들이 우리 안으로 다시 들어와야 한다. (노동의 의존관계망처럼) 저 운동이 잘 되면 그것이 우리와 연결될 수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고 내 운동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저 운동이 잘되면 나한테 도움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자주파와 평등파는 운동권의 거대정파다. 자주파의 통일운동방식은 구시대적이라 대중들이 외면했다. 그렇다면 평등파들의 의제와 활동방식은 과연 자주파와 다른 것이냐? 다르지 않는 면도 많이 봤다. 그런데 진보정치에서 그 두 흐름(정파)을 제어하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세력이 없다. 두 흐름(정파)에만 맡겨놓았다가 가능성이 없어 지리멸렬해졌다."
"분명 변화의 기운이 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국민모임'(최근 진보적 대중정당 창당을 촉구한 조직)이 높은 지지를 받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무슨 실체가 있다고…. 하지만 그런 열망들이 분명히 있다. 다만 이것을 대중적으로 담아내고 세력화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줄탁동시(啐啄同时 :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 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처럼 진보정치세력이 아래 흐름에 호응해 같이 쪼아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다."
"2000년 민주노동당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기 위해 독일식 정당명부제를 정치개혁 화두로 들고 나왔다. 그런데 언제까지 독일식 정당명부제인가? 그것밖에 없나? 새로운 과제를 만들거나 연구하지 않았다는 볼 수 있다. 독일식 정당명부제 외에 혁신적인 정치개혁 과제를 내온 게 없다. 소수세력이 원내에 진출하는 방법이 100가지나 있다고 한다. 이는 소수세력을 옹호하고 진보정치의 지평을 넓히는 방식이 100가지나 있을 수 있음을 뜻한다. 사실 정파의 폐해가 비례대표에서 나타났다. 비례대표제를 폄하하려는 뜻이 아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 안에서 다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진보정당이 사안에는 많이 대응했지만 한국사회를 어떻게 좌클릭할 것인지 등 중기계획에 해당하는 의제들이 아니라 표(득표) 중심으로 진행됐다. 몇 프로(%) 받는 것을 당 성장전략으로 가져간 것이다. 진보정당 의제들이 한국사회를 재조직할 수 있을지를 전략적으로 사고하지 못했다. 무상의료를 그토록 외쳤는데, 의료생협을 통해 그것을 구현하는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의료민영화에 대항해 지역에서 병원을 만들 수도 있다. (무상의료만 얘기할 게 아니라) 의료민영화에 대항해 건강권을 지켜낼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내와야 한다. 무상의료도 2015년 버전으로 얘기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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