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코오롱 해고노동자들의 과천 농성장에 꼭 한번 들르겠노라고, 스스로 다짐한 약속이 줄 끊긴 연처럼 마음을 헤집고 다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코오롱 해고노동자들의 투쟁을 취재하고 글을 쓰던 연정 르포작가로부터, 2014년 12월 29일로 농성장을 정리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팽팽하게 감아올리던 연줄이 끊긴 듯, 마음이 툭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듯했습니다. 건강만 허락한다면 소주 한 병쯤은 그냥 큰 컵에 담아 단번에 다 마셔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쓰리고 쓸쓸했습니다.
또 누군가는 다시 굴뚝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것도 한 해가 바뀌는 즈음, 기온은 뚝 떨어져 가뜩이나 춥던 어느 날에 말입니다. 마음도 항생제 반응처럼 내성이 생기는 걸까요? 목숨을 건 노동자들의 투쟁 소식을 듣고도 그저 빈틈없이 높고 단단하게 닫힌 문 앞에 선 듯 갑갑하기만 할 뿐,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 안에 슬픔이 있는지, 고통이 있는지, 분노가 있는지조차도 스스로 알기 어렵습니다.
거리에서 10년을 보낸 사내, 그가 가장 후회한 순간10년의 투쟁을 정리한 사람들의 마음이란 어떤 걸까? 지나간 기사를 뒤적여도 보고, 만화가 박해성의 작품 <10년>도 다시 찾아 읽습니다. 만화 속에서 노동자들은 2005년 구미 코오롱 공장에 서 있었습니다. 10년간의 긴 싸움이 시작될 줄은 아마 그때는 몰랐을 겁니다.
저는 깨알처럼 촘촘한, 그 긴 시간 사이사이에 새겨진 이야기들에 대해 다는 모릅니다. 그 이야기들을 상상이라도 할라치면 다시 또 높고 단단한, 닫힌 문 앞에 선 것처럼 갑갑해집니다. 이 긴 싸움에 대한 기사들과 인터뷰 글, 그리고 르포 작가와 만화가가 기록한 작품들을 다시 찾아 읽고서야 그 시간에 배인 마음들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06년 3월의 일이다. 3명이 15만4천 볼트 송전탑에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또 다른 동지들이 회사 본관 로비도 점거하고 있었다. 고공농성자들의 상황이 악화되면서 조급해졌다. 그들을 내려오게 할 방법을 찾았다. 회장을 직접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정말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새벽 5시, 동지 10명과 이 회장 성북동 자택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곳은 회장 가족이 사는 가정집이었다.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10년을 싸우면서 유일하게 후회하는 장면이다. (이동찬 명예회장) 49재 때 이 회장을 만나서 직접 사과했다." - <오마이뉴스> 2015. 1. 6. <"십년 묵은 체증? 허전하고 아쉽기만 코오롱만 끝났지 박근혜와는 안 끝났다">최일배 코오롱 정리해고분쇄투쟁위원장의 인터뷰 기사 중, 10년 싸움에서 단 하나 후회되는 일에 관한 이야기는 흘러 보내지 못한 물처럼 내 맘에 자꾸 머물러 있습니다. 박해성의 만화 <10년>은 최일배 위원장이 끝내 사장을 만나지 못하고 칼로 동맥을 긋던 순간과 철탑 위의 세 명의 노동자가 죽을 각오로 단식을 결행하던 순간을 나란히 그리고 있습니다.
참 묘한 순간입니다. '죽음'밖에는 스스로 선택할 것이 아무것도 없던 노동자들이 그 죽음의 결행을 마라톤 경주처럼 이어받지만 결국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내가 죽어서라도 철탑 위의 동료들을 살리겠다는 결의가 철탑 위로 전해진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순간들입니다. 그날,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있었을까요. 나는 그 선택을 존중합니다.
오늘 하루는 다들 어떻게 지내시고 계신가요? 지난해 42일간의 단식투쟁 후 아직 건강이 회복되지 않은 최일배 위원장은 여전히 병원에 계시겠군요. 의지로 행한 단식이지만 그래도 몸은 힘들었을 겁니다. 마음의 뜻을 따르느라 지친 몸에게 하나하나 위로를 전해 주시길. 단식으로 쇠약해져 가는 위를 보호하느라 사력을 다했을 몸의 안팎 구석구석에게도 찾아다니며 인사를 전하면 좋겠습니다.
쫓기며 살던 나의 어머니... 삶은 그런 건 줄 알았다
제 어머니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노점을 생업으로 펼쳐온 어머니의 생 한가운데에는 노점 철거에 항의하던 투쟁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거대한 스크럼을 짜서 공권력의 철거에 단단하게 맞서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싸움은 몇몇이서, 혹은 혼자서 경찰이나 단속반에 두들겨 맞거나 내쫓기는 식의 저항이었습니다. 어린 날에 나는 단속반에게 속옷까지 다 뜯겨 나가도록 할퀴어져 속살이 벌겋게 부어오른 채 경찰서 바닥에서 울부짖고 있는 어머니를 본 일이 있습니다.
어머니나 저나, 그때는 그냥 그렇게 사는 게 삶인 줄 알았습니다. 부끄러움이고 자존심이고 그런 건 우리에게는 없는 건 줄 알고 살았습니다. 근데 그게 탈이었습니다. 어른이 되면서 나는 다시 행복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니었습니다. 욕 듣고 내쫓기고 끌려가고 두들겨 맞던 그 세월의 한들은 떠나간 게 아니었습니다. 어머니 마음속의 한들은 나이 들고 혼자 남은 삶을 조금씩 갉아먹기 시작했습니다.
기억이 흐려지고 과거의 일들을 하나하나 어디론가 내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기둥의 한가운데를 잘라버리듯, 가장 치열하고 아픈 생의 한가운데를 기억에서 지워버린 어머니가 나는 참 낯설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한이 맺혔을까. 좀 더 일찍 그 마음을 알아채고 위로해주지 못한 게 지금은 또 다시 나의 한이 돼 버렸습니다.
'10년을 넘기지 않겠다'는 코오롱 해고노동자들의 말은 약속처럼 지켜졌습니다. 시원함보다는 허전함과 아쉬움이 더 크다는 마음, 여전히 싸우고 있는 현장의 노동자들에게 미안함이 크다는 마음, 정리해고 철회하지 못한 채 농성을 정리하는 데 대한 안타까운 마음. 하루에도 수 차례 내면에서 올라오는 여러 색깔의 마음들을 부디 다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그 마음의 파동은 예상한 것보다 더 클 수도, 아플 수도 있을 겁니다.
애써서 10년 투쟁을 돌아보지 않아도 때가 되면 밀물처럼 다가오는 가치들이 있겠지요. 지금 이 글을 쓰는 내 맘에도 코오롱 해고노동자들의 투쟁이 던져준 불편함들이 노을처럼 스멀스멀 번집니다. 내가 입는 옷 하나에도 사람들의 아픔이, 생존의 위협이 묻어서 오다니….
아픔이 걷히면 새로운 가치들이 돋아납니다종교처럼 '힐링'을 섬기며 비슷한 모양의 등산복들이 온 산을 덮는 동안 누군가는 그 옷을 만드는 공장에서 쫓겨나와 거리에서 10년을 보낸다는 사실을 직시한 순간, 내 삶은 이전보다 많이 불편해졌지만 조금은 더 엄격해졌습니다. 수도 없이 나누고 받았을 연대의 정(情)도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겠지요. 아픔이 걷히면 새로운 가치들이 분명 돋아납니다. 그때를 나는 기다립니다.
숲을 이룬 수많은 나무들도 저마다의 사연으로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사라진 나무들의 존재도 산이라는 가치로 늘 옆에 살아 있습니다. 등산객들에게 삶은 달걀을 나눠주던 코오롱 해고노동자들의 이야기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는 산이 되겠지요. 비 오고 바람 부는 날에도, 몸이 아픈 사람들, 마음이 아픈 사람들, 또 어떤 이유로든 삶이 흔들리는 사람들은 산을 오를 겁니다.
그때 코오롱 해고노동자들의 고통은 우리에게 무엇으로 다가올까요. 나는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내게 '위로'가 될 거라고 믿습니다. 바람을 만들고 홍수를 막으며, 그늘을 만들고 산소를 내뿜는, 무엇보다도 스스로 그 길을 걷는 이들이 깨닫고 다시 내려가는 그런 위안 말입니다. 그동안 우리 앞에 있어줘서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