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로베스트(Halo Vest)라는 게 있다. 경추손상을 입은 환자들의 경추를 보호하기 위해 가슴부터 머리까지 고정시키는 보조기이다. 지난 2005년 5월 19일 교통사고를 당해 2·6·7번 경추손상을 입은 나는 80여일 만에 의식을 찾았다. 2005년 8월 경, 경추수술을 받은 후 흉측한 모양의 이 보조기를 착용한 경험이 있다.
외상성 뇌손상(traumatic brain injury)을 입은 당시의 나는 내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는 물론이고 어머니조차 몰라보는 상황이었다. 경추 수술을 하고 망측한 모양의 할로베스트를 착용한 내 모습을 보았을 때 <로보트 태권브이>에 나오는 깡통로봇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원해 있던 지역의 국립병원 엘리베이터에서 어머니의 등에 업힌 어린아이들이 할로베스트를 착용한 내 모습을 보고는 놀라서 울곤 하던 기억이 있다.
치료사들 사이에서 기피대상이 되었던 나
외상성 뇌손상을 입은 나는 그곳이 어디이며 당시의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런 상태에 있던 어느 날, 병실에서 아내의 도움을 받으며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주치의가 와서 아내에게 "퇴원은 언제 가능하냐?"고 물었다. 전에도 아내에게 퇴원을 하라는 요구를 했었지만 옮길 병원을 확정짓지 못한 아내가 대답을 못하자 주치의가 아내에게 "빨리 퇴원날짜를 확정해 달라"고 힐난조로 말을 했다.
그때까지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던 나는 "거추장스러운 할로베스트를 한 채 퇴원을 하란 말이냐?"고 역정을 냈고 결국 그 일로 주치의와 말다툼을 벌이고 말았다. 내 몸을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었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던 내게, 할로베스트를 풀지도 않은 상태에서 퇴원을 강요하는 병원의 처사에 적개심이 일었다.
그렇게 나의 병원 순례는 시작됐다. 6개 병원을 8번에 걸쳐 3년 동안 옮겨 다녀야 했다. 재활병원들은 환자의 상태에 따라 입·퇴원을 결정하지 않았다. 입원할 때 입원가능일수를 미리 정하고 입원을 허락받는 게 불문율처럼 되어있었다. 그러니 재활환자들은 한 병원에 입원하자마자 다른 병원에 미리 입원신청을 해놓아야 그 병원을 퇴원했을 때 다른 병원으로 연이어 입원을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국립 재활원조차 입원 가능한 기간이 두 달로 정해져 있는 실정이었다. 재활환자는 장애를 입은 상태에서 완쾌에 대한 기약 없이 긴 시간 병원치료를 받아야 한다. 이는 큰 부담이었고, 재활환자들은 아플 권리조차 없다는 자조적인 이야기를 공공연히 하고는 했다.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을 때 옆 침대에 계시던 분은 목사님으로 교목(校牧)생활을 하셨던 분이다. 정년퇴직을 하신 후 뇌출혈이 와 말씀을 못하셔서 필담(筆談)으로 의사소통을 하던 분이셨다. 그 분과 이런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중에 내가 지방지에서 10여년 근무한 적이 있다는 걸 아시고는 내게 "나중에 낫거들랑 조져버려"라고 필담으로 이야기 하신 적이 있다. 얼마나 서럽고 화가 나셨으면 그렇게 표현하셨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그 후에 나도 순례자처럼 이 병원 저 병원 옮겨 다녔다. 그 과정에서 나와 말다툼을 해 병원을 그만둔 치료사도 있었다. 치료사들 사이에서 내가 '싸움닭'으로 불린 적도 있었으며, 의료진에게 마음의 상처를 받은 적도 있었다. 병원치료과정을 돌아보면, 장애를 완전 극복하기 위한 나의 절실함이 초조감으로 표출됐던 것 같다. 외상성 뇌손상으로 인한 조울증(manic-depressive illness)에서도 일정부분 기인되었다는 생각이다.
치료사의 칭찬이 나를 춤추게(?) 했다
세 번째로 입원했던 병원에서 비로소 나를 객관적으로 돌아보게 됐다. 하프 마라톤 완주를 내 재활의 최종목표로 설정하고 생활의 근거지인 전주의 집 근처 재활병원에 입원하며 본격적으로 재활에 나섰다.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재활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의료진에게 질문도 하고 인터넷을 통해 정보도 파악했다.
병원의 일과가 끝나면 스스로 고안한 방법으로 별도의 재활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새벽 2시까지 노트북을 이용해 자판연습을 하고는 했다. 그 시절, 위에서 이야기 한 대로 치료사와 다툼이 있어서 결국 그 치료사가 병원을 그만두는 경우가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병원치료사들 사이에서는 내가 기피대상 환자가 되서, 사직한 내 담당 치료사의 후임을 정하기 위해 치료사들이 전부 모여 회의를 했다고 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 내 담당 치료사간 된 사람이 박미옥(32)씨가 오늘 내가 소개하려는 분이다. 그런 일을 겪고 나를 담당하게 된 박미옥 치료사는, 그가 나에게 온 정성을 다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재활이 무엇인지를 알기위해 수시로 계속되는 내 질문에도 성의를 다해 대답해주었으며,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내가 질문한 내용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고 그 다음날 말해주기도 했다.
열과 성을 다한 박미옥 선생의 치료과정을 따라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던 어느 날, 전날 일종의 과제처럼 내준 동작을 요구했다. 내가 그 동작을 해내자. "'칭찬이 고래를 춤추게 한다'던데, 환자분을 보니 그 말이 맞군요"라고 말했다. 장애를 입고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처럼 늘 심각했던 내게 그런 식으로 가볍게 이야기 하는 것이 참으로 신선해 보였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혼자 고립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던 내게, 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계기가 된 결정적 한마디였다. 장애를 얻어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생각했다. 건강할 때의 평범했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평생 불가능하리란 생각으로 웃음조차 내겐 사치처럼 느껴했던 때였다.
그랬던 내게 박미옥 선생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꽉 짜여 관료적으로 돌아가던 이전 병원들에서는, 사람으로서의 내가 아닌 그저 장애를 가진 '환자'로서만 의료진들이 나를 대했다. 하지만 박미옥 선생은 함께 아파하고 고민하며 웃을 수 있는 똑같은 사람으로 나를 대했다.
병원치료를 마친 후에도 계속 만남을 이어가다
발랄함과 상큼함을 덤으로, 콧잔등에 땀을 송송 내가며 최선을 다해 치료해줬다. 체계도 없이 중구난방으로 해대는 질문에 자료를 찾아가며 답해주는 성의를 난 박미옥 선생에게서 보았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가슴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그때의 그 고마움이 병원치료를 마친 후에도 계속 연락을 이어가게 했다.
장애를 얻고 재활성취가 있을 때마다, 초등학교 시절 숙제검사를 받는 심정으로 주기적으로 연락을 하며 만나는 사람들이 내게는 몇 분이 있다. 박미옥 선생도 그 중 하나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하며 도서관에 나가던 첫날 휴대폰 문자로 최초로 이 사실을 알린 사람도 그였다. 전주시 보건소에 무기 계약직 공무원으로 근무를 한다는 연락을 받고 야생화 화분을 사들고 가 축하를 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만남을 이어오다가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내가 지난 2014년, 전주시 공무원이 되었다. 임용 전 교육을 받으며 시간 여유가 있어 박미옥 선생이 근무하는 전주시 보건소 평화지소에 드나들었다. 그가 그곳에서 장애인들을 위해 무료로 재활치료를 하는 것에 대해 알게 됐다. 그 일을 위해 박미옥 선생이 재활치료사로 전주시에 채용된 것이었다.
집시처럼 이 병원 저 병원 순례하며 재활을 해본 경험을 가진 내게, 별도의 시간과 비용을 들이지 않고 보건소에서도 재활을 할 수 있다는 건 굉장한 일로 다가왔다. 더욱이 그 일을 내 재활에 큰 영향을 준 박미옥 선생이 하고 있어서 참으로 반가웠다. 장애를 가져 이동이 어려운 중증장애인들은 집으로 방문해서 치료하는 과정도 있다고 한다.
환자와 치료사로 처음 만나, 10여 년 관계를 이어왔다. 이제는 공직자로 다시 만나 아름다운 관계를 가꾸고 있다. 나는 그 끔찍했던 사고가, 이 시간에도 실재하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라 믿는다. 10여 년 동안 날 지치지 않고 춤추게 한 박미옥선생과 합력(合力)하여 이룰 또 다른 선을 생각하며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