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청소년 특별면 '너, 아니?'에 실렸습니다. '너, 아니?'는 청소년의 글을 가감없이 싣습니다. [편집자말] |
'언론'이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과연 무엇을 언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언론이라는 단어를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매체를 통하여 어떤 사실을 밝혀 알리거나 어떤 문제에 대하여 여론을 형성하는 활동'사전적 정의를 딱 두 마디로 정리한다면 '알리고, 여론을 형성하는' 것이 언론이다. 언론이라는 단어의 정의에서 가장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사실'이라는 단어인 것 같다. '알리는' 활동을 하는 것은 언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것은 언론이 아니다.
내가 만약 언론의 정의를 다시 쓴다면 "사실을 밝혀" 뒤에 '진실을'이라는 한 마디를 넣을 것 같다. 아무리 사실을 알린다 하더라도 그 사실 사이에 '거짓'을 추가해 '진실'을 완전히 뒤틀어 버린다면 결국 그걸 보는 국민들은 그것만 보고 '선동'당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한국 현대 언론이 걸어온 길... 이 책에 있다
<폭력의 자유>, 이 책은 한국현대언론사에서 다수의 언론들이 '과연 진정한 언론의 역할을 하였는가?' 그리고 '언론이라 불릴 수 있는 언론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책이었다.
한국 현대사, 약 100년 전 일제 시대 언론부터 지금까지 이 땅에는 수많은 언론들이 스스로를 '언론'이라고 하며 존재하고 있었다. 그 수많은 언론들 가운데는 일제에 '알아서' 긴 언론, 군사독재정권의 권력에 굴복한 언론, 군사독재권력 혹은 일제의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다가 어려워지거나 사라진 언론, 그냥 어중간하게 목숨줄만 유지했던 언론들 등이 있었다.
1910년.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한일합병조약'이 조인됐다. 이렇게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1912년 총독부는 '부령' 제 40호로 '경찰범 처벌규칙'을 공포하고 언론자유를 철저히 탄압했다. 하지만 1919년 3·1 운동이 있은 후 일제는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바꾸면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그리고 <시사신문>이 창간됐다.
이때 창간된 신문들은 일제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를 써서 정간을 당하기도 하고, 친일행위를 하면서 일제에 아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1940년 대 일제가 전시 체제로 전환하면서 거의 모든 언론이 폐간됐다.
미군정 시기 초반 언론의 자유가 많이 주어지기는 했으나 좌익 신문들이 확 늘어나고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좌익 신문이 폐간당하고 우익 신문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승만 정권 때 언론들은 '언론정책 7개항'에 의해 활동이 많이 제약되고, 정권에 '반기'를 드는 언론, 그리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언론들을 가혹하게 탄압을 당했다. 하지만 이런 언론탄압에도 부당한 권력에 맞섰던 <경향신문> 등의 언론들이 존재하였다.
박정희 정권 시기 대부분의 언론들은 제대로 된 언론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권력의 나팔수'가 됐다. 당시 <동아일보> 등에 있는 여러 정의를 지키려는 기자들이 권력에 맞섰다. 이들 가운데 <폭력의 자유>의 저자 김종철 기자도 있었다. 권력에 대항하던 기자들은 결국 거의 모두 해직되었고, 이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이 나중에 <한겨레>를 만들 때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전두환 정권 때는 언론통폐합으로 언론을 탄압했으며, 민주화 이후 나왔던 노태우, 김영삼 정부는 여러 주류언론(흔히 '조중동'이라고 부르는 언론들)과 친하게 지내며 '언론플레이'를 하였다. 물론 <한겨레> 같이 비판적인 언론도 있었지만 이런 언론들은 아쉽게도 '주류'로 편입하기 힘들었다.
이후 등장한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동안 언론들은 '시원하게 대통령 까기'에 돌입했다. 언론의 자유가 주어졌고, 그동안의 권력에 굴복했던 언론들은 이제 권력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아래 <시사IN> 기사를 보면 확실히 확인할 수 있다.
"2006년은 지표상으로 보자면 한국 언론의 르네상스 시기였다. 한국은 언론자유 분야에서 31위로 역사상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일본(51위)을 크게 앞섰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프랑스(35위)보다 더 언론 자유가 만개한 나라로 평가된 것이다. 2005년과 2006년 한국이 국제사회로부터 받은 언론 자유 평가는 건국 이래 최고 수준이었다." - <시사IN> 2009년 10월 29일 기사 중하지만 '국경 없는 기자회'가 발표한 '언론자유순위'에서 한국은 이명박 정부 때 39위(2007년)에서 69위(2009년)까지 떨어졌다. 주류언론들은 권력의 편에 섰고, 권력에 비판적인 언론들은 전보다 어려워지게 되었다. 종편(종합편성채널)은 주류언론들에게만 주어졌고 그들에게는 특혜가 베풀어졌다. 주류언론이라고 하지만 그들을 '언론'이라고 부르는 것에 회의감이 생기기도 한다.
'언론, 민중의 벗인가 공공의 적인가'저자는 <한겨레>의 논설위원이 되어 언론계로 돌아갔을 때 아래와 같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권력이나 대자본과 하나가 되거나 스스로 권력이 되어 민중을 억압하는 언론은 그 자체가 반사회적이다.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언론이야말로 민중의 진정한 벗이다."김종철은 "권력이나 대자본과 하나가 되어 민중을 억압하는 언론은 그 자체로 반사회적"이라고 정의했다. 나는 그런 언론은 더 이상 언론이라고 말할 수 없는, 그냥 '권력의 나팔수'라고 본다.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진정한 언론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옛날 권력이 한 곳으로 집중되어 있던 시절, 그 권력에 굴복하고 '권력의 나팔수'가 되었던 '언론'아닌 '언론'들은 '벙어리'로 표현되어 외신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지금 그런 '벙어리'들은 과연 사라졌다고 볼 수 있을까?
나는 '아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아직 비판할 것을 하지 못하고, '사실'과 '진실'보다는 '이념'과 '권력의 편들기'를 먼저 생각하는 언론들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이를 부정하는 사람도 있기는 할 것이다.
'언론, 민중의 벗인가 공공의 적인가?'이 책의 저자가 우리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누가 대답하느냐에 따라 다를 테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많은 언론들이 '민중의 벗'으로 보기 힘들다는 것에 대해서는 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주진우 <시사IN> 기자와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가 지난 16일, <나는 꼼수다>에서 제기한 의혹 관련,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와 명예훼손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글을 끝마치기 전에, 이 두 사람이 법정에서 나온 후 했던 말로 매듭지으려 한다.
나는 이 두 사람이 한 말이 진정으로 언론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말인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의 언론이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앞으로도 이상한 사건은 이상하다고 말하겠습니다." - 김어준"정부가, 권력이, 검찰이 기자를 끌고 갈 수도 있고, 기자를 구속 시킬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입을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 주진우 덧붙이는 글 | <폭력의 자유>(김종철 지음 / 시사IN북 펴냄 / 2013.07 / 2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