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당시 합법이었던 긴급조치 9호를 어겼다는 이유로 이뤄진 수사와 재판은 문제가 없다'라던 대법원 판결이 과거사 피해자들을 울리기 시작했다.
서울고등법원 민사12부(부장판사 김기정)는 지난 16일 설훈 새정치민주연합 의원과 그 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금 청구 소송에서 1심 판결을 취소하고,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수사·재판과정에서 국가의 불법행위가 있었다며 '피고 대한민국'은 이들에게 총 1억420여만 원을 지급하라고 했던 1심 판결과는 정반대였다.
항소심 도중 달라진 대법원의 판단이 원인이었다.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지난 10월 27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옥살이를 했던 서태열·장의식씨의 국가배상금 청구소송에서 국가기관의 불법행위를 인정했다. 그러나 대법원이 원고들의 손을 들어준 이유는 '긴급조치 9호는 위헌'이라고 한 하급심 재판부와 달랐다.
대법원은 당시 긴급조치 9호는 합법이었기 때문에 영장 없이 피의자를 체포·구금한 수사기관이나 유죄판결을 선고한 재판부는 불법을 저지른 게 아니라고 했다. '악법도 법'이었으니 문제없다는 뜻이다. 대법원은 다만 서태열씨 등이 고문 등으로 허위자백을 했다는 이유로 재심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으니 국가는 배상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설훈 의원의 항소심 판결은 대법원의 논리를 그대로 따라갔다. 재판부는 "긴급조치 9호가 위헌·무효라는 이유만으로 재심 무죄 판결이 확정됐다면, 과거 유죄 판결에 의한 복역 등이 국가의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 경우 수사기관의 위법으로 유죄판결이 나온 건지 아닌지 따져봐야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된다는 얘기였다.
국가의 불법행위에 '면죄부' 주는 법원그런데 설훈 의원은 '이 조치를 위반한 자는 영장 없이 체포·구금될 수 있다'는 긴급조치 9호에 근거해 1977년 5월 12일 체포됐다. 재판부는 "당시 시행 중이던 긴급조치 9호에 의해 수사기관이 영장 없이 체포·구금해 수사를 진행하고, 법관이 긴급조치 9호를 적용해 유죄판결을 선고한 것은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라면서 국가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새로운 논란거리도 있다. 재판부가 "원고 설훈이 수사관들로부터 가혹행위를 당했더라도 다른 증거들의 증거능력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라면서 긴급조치 9호 위반 유죄판결에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대목이다.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긴급조치 피해자 변호인단의 조영선 변호사는 22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이 부분은 대법원보다 더 형식논리에 치우쳤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긴급조치 위반사건은 대개 본인 자백과 '유신반대' 유인물 등이 증거인데, 만일 고문·폭행이 있었다면 자백은 증거능력이 없는 것 아니냐"며 "그럼 무죄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데, 재판부는 책상 위의 논리만 따졌다"라고 지적했다.
결국 이번 판결 역시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법부의 과거사 청산 후퇴'조짐과 무관하지 않다. 조영선 변호사는 "민주화운동보상법 6개월 소멸시효 문제, 인혁당사건 지연이자 문제 등 법원 내부에서 과거사 관련해 역행하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라면서 "유신독재시절 법원 대다수는 침묵으로 불법을 용인했다, 그것을 사과하고 바로잡는 일이 사법 정의인데 사법부는 반성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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