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부터 꿈꿔왔던 디자이너의 현실은 엉뚱한 부분에서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보는 것은 학력도, 디자인 능력도 아닌 몸매였습니다. 대학시절 전액 장학금을 받고, 공모전에서 상도 타며 좋은 평가를 받아왔던 저는 '실력이 좋아 아쉽지만 피팅이 안 되니 다른 곳을 구해야 되겠구나'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헬스장을 다니며 몸매를 만들었습니다." - 26세 남성, 2012년부터 패션디자인 업체에서 인턴으로 근무 중 신세계 등 대기업 패션업체들이 패션 디자이너들을 뽑을 때 신체 사이즈를 요구하며 '몸뚱이' 차별을 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의류를 만드는 과정에서 필요한 피팅모델(패션 디자이너 또는 의류 제조업자가 실제 사람의 착용감, 걸쳐짐, 외관 등을 점검하기 위해 살아있는 마네킹으로 이용되는 사람 : 위키백과)을 따로 고용하지 않고 디자이너를 모델로 활용하는 '꼼수'를 부려 온 것이다. 실제 피팅모델은 시급 1만~2만 원을 주고 채용해야 하므로, 디자이너를 피팅모델로 쓰게 되면 업체는 그만큼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게 된다.
패션노조와 알바노조, 청년유니온은 22일 오후 1시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패션업체들의 인격 모독 행위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인종차별과 다를 게 없는 신체차별"이라며 "청년들의 열정을 착취하는 패션업계의 신체 차별을 규탄한다"고 밝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패션노조 대표 '배트맨D'는 "이제 더 이상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않고 착잡하기만 하다"며 "알 만큼 아시고 살 만큼 사신 분들이 호주머니에 꼴랑 몇 푼 더 집어넣겠다고 대한민국 청년들의 불행과 고통을 모른 체 한다"고 말했다. 패션노조는 최근 근로계약서 미작성, 부당임금, 인격모독, 야근수당 등 각종 법정 수당 미지급, 부당해고를 골자로 한 '5대 악'을 발표한 바 있다. 다음은 이날 패션노조 등이 공개한 피해 사례들이다.
[사례1] "면접을 20여 군데는 본 것 같아요. 면접 보려고 아침부터 일어나 준비해서 부모님한테 "면접 다녀오겠다"고 하고 나왔는데 30초 만에 면접이 끝나더군요. 어떤 곳은 들어가자마자 옷도 안 입고 한 번 쭉 스캔하더니 "됐어요" 하고 보내는 곳도 있었어요. 2번의 인턴을 거치고 나니 '의류회사는 학력, 학과 상관없이 그냥 피팅만 되고 잡일만 할 수 있으면 뽑는구나'라는 걸 알게 됐어요." [사례2] "피팅이 안돼 취업이 어려웠는데, 겨우 피팅 면접을 붙어 한 의류회사에 들어갔습니다. 2주간 일을 시키다가 어깨가 옷에 안 맞는다는 이유로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피팅 때문에 체형교정 수술을 고민한 적도 있었어요." [사례3] "면접 전화를 받고 기쁜 마음에 해당 기업의 홈페이지, 관련 기사를 찾아보며 공부한 후 면접을 보러 갔습니다. 대학시절 포트폴리오들을 정리, 제본해 들고 갔으나 면접 동안 한 번도 펼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제가 면접 때 한 일은 옷을 입어보고, 쓰리사이즈를 재고, 전신 앞뒤 사진을 찍은 게 전부였습니다. 한 직원은 저보고 "달리기 같은 운동을 했냐"고 물어본 적도 있었어요. 아니라고 하고 웃고 넘겼지만 굉장히 당황스럽고 민망했습니다." 공개된 사례들은 공통적으로 패션업체들이 디자이너에게 '디자인 능력'이 아닌 '피팅 가능 유무'를 요구하고 있다. 3개 단체는 이날 취업 희망자의 특정신체 사이즈를 요구한 57개 패션업체의 실명을 공개하기도 했다. '디자이너'를 구하는 공고에 피팅 가능 유무를 언급한 업체만 20개다. 나머지는 '인턴'이나 '피팅 및 사무보조' 직무를 달고 더 당당히 신체 사이즈를 요구하지만, 현장 경험이 필요한 구직자들에게는 이마저도 절실한 상황이다.
지난해 8월 게재된 (주)신세계인터내셔날의 '지컷' 디자이너 구인 공고는 '아르바이트가 아닌 채용'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이력서에 사진과 사이즈를 꼭 기재해 달라'고 요구했다.
(주)대현의 CC Collect는 지난해 9월 5일을 마감일자로 낸 막내 디자이너를 구한다는 공고의 담당업무 상세조건에 '어깨넓이 14 1/2″, 가슴둘레 33″, 키 164~168cm' 등 특정신체 사이즈를 제시했다. 이밖에 (주)더베이직하우스, (주)동광인터내셔널, (주)이랜드 enc 등이 명단에 포함돼 있었다.
또한 채용면접 과정에서 일부 패션업체들은 "00씨는 골반 뼈 좀 깎고 와야 되겠어요", "살이 그렇게 쪄서 되겠냐" 등의 폭언을 일삼았다고 한다. 한 취업 희망자는 "키가 너무 크거나 작아도 안 되고, 너무 마르거나 뚱뚱해도 안 된다"면서 "각 브랜드마다 원하는 사이즈가 다 다르다보니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이외에도 근로계약서 미작성, 갑작스러운 부당해고 등이 문제점으로 제기됐다.
배트맨D는 이날 기자회견장에 '브이 포 벤데타' 가면을 쓰고 나왔다. 그는 가면을 쓴 이유에 대해 "착취당하고 고통당하는 수많은 청년들에게 '당신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가면의 상징인 공평함과 정의가 패션노조의 기치와 맞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나치는 청년들... 중·장년층이 더 관심 보여 이날 기자회견에 관심을 많이 보이는 사람들은 청년층보다 중·장년층이 많았다. 그들은 취재진들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패션노조 등이 만든 현수막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37세의 한 남성은 "힘없는 사람은 무시당하고, 힘 있는 사람만 마음대로 휘두르는 환경이 바뀌어야 한다"면서 "실력으로 사람을 뽑는 사회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기자회견을 지켜보던 사진작가 배병수(64)씨는 "패션뿐만 아니라 음악계, 영화계 등 예술계통 대부분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또 "'몇 억 원대의 돈을 버는 한두 사람에 가려진 사람들이 대우받아야 한다"면서 "이런 문제를 외면하지 말고 이슈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40세의 한 남성은 "열정페이 같은 문제가 비단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다"며 "중·장년층도 그런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사회 전반의 문제적인 구조는 바꿔야 한다"고 말하며 자리를 떠났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 21기 인턴기자 이유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