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인클럽>은 오마이뉴스가 권력과 자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한 언론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매달 자발적으로 후원하는 유료 독자들의 모임(http://omn.kr/5gcd)입니다. 클럽은 회원들의 후원으로 '10만인리포트'를 발행하고 있는데요, 이 글 연재하는 김도균 기자는 국방부를 출입하는 오마이뉴스 사회부 기자입니다. [편집자말] |
1절전우들이여 옛 나팔을 가져오게, 다른 노래를 부르세온세상이 함께할 정신으로 노래를 부르세5만 강병이 불렀던 그 노래를 부르세우리가 조지아를 진격하던 그 때처럼.후렴구만세! 만세! 우리가 희년을 불렀다!만세! 만세! 깃발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도다!그래서 애틀랜타에서 바다까지, 우린 노래 불렀지우리가 조지아를 행진하던 그 때처럼.2절환희로운 소리를 들은 검둥이(darkeys, 흑인을 낮잡아 부르는 말)들은 함성을 지르고보급관이 찾아낸 칠면조도 골골거렸다.땅에서 막 캐낸 고구마는 어떠했던가.우리가 조지아를 진격하던 그 때처럼.3절몇 년간 보지 못한 영광의 깃발을 보고기쁨의 눈물 터뜨린 합중국의 시민도 있었지.폭발하는 그 환호성 억누를 수 없었지.우리가 조지아를 진격하던 그 때처럼.4절"셔먼의 기생오라비 양키들은 해안선에 닿지 못한다!"뻔뻔스런 반란군들은 지껄이며 뽐을 냈었지놈들은 우리를 무시할 수 없었음을 잊지 못하리.우리가 조지아를 행진하던 그때처럼.5절그리하여 우리는 자유의 길을 닦았지.폭 60마일에 길이 300마일의 길이었네.우리를 본 반역자들은 저항도 헛되이 달아나 버렸도다.우리가 조지아를 행진하던 그 때처럼.미국 남부 사람들이 호핑존을 먹는 이유
조지아, 사우스캐롤라이나 등 주로 미국 남부 사람들이 새해 첫날 먹는 '호핑존'은 동부콩(검은색 반점이 있는 콩)과 쌀, 양배추, 순무 잎사귀, 베이컨, 돼기고기 등을 섞어 푹 끓여낸 음식입니다. 콩은 동전, 푸른 채소는 지폐, 돼지고기는 부를 상징한다고 하는데요. 때문에 호핑존을 먹는 것은 '한 해 동안 돈이 굴러들어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부 사람들이 명절 음식치고는 소박한 느낌마저 주는 이 호핑존을 먹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남북전쟁 막바지, '셔먼의 바다로의 행군'(Sherman's March to the Sea)으로 불리는 북군의 대공세가 만들어낸 풍속이기 때문이죠.
남군과 북군 간에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남북전쟁의 분수령은 1863년 7월 1일부터 사흘 동안 벌어진 게티즈버그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남군은 전 병력의 1/3을 잃고 버지니아로 퇴각했죠.
거의 같은 시기 그랜트 장군이 지휘하는 북군이 미시시피주의 빅스버그를 점령하고, 미시시피 강 유역의 남군 요새 몇 개를 함락시켰습니다. 남부 연맹의 중심을 흐르고 있는 미시시피 강의 상실은 남군으로써는 큰 타격이었습니다. 남부 전체가 두 동강이 날 위기에 처한 것이죠.
승기를 잡은 북군은 이듬해, 남부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습니다. 총공세를 이끈 북군 지휘관 중에는 윌리엄 테쿰세 셔먼(William T. Sherman,1820~1891) 소장이 있었습니다. 부하들이 '빌리 아저씨'(Old Billy)란 별명으로 불렀던 셔먼 장군은 골초에다 성미가 급하고 말이 많았지만 직관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때까지 전쟁사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방식의 전투를 구상했습니다.
"파괴하라!"... 이 군인의 전투 방식
"우리는 적의 군대뿐만 아니라 적의 국민과도 싸우고 있다." 셔먼 장군의 이 한 마디는 그가 생각하고 있던 전쟁의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승리를 위해서는 남군을 격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부의 부와 생활에 막대한 타격을 가해 남부 주민들의 전쟁의지 자체를 꺾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죠.
흔히들 현대전은 국가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야하는 총력전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사시설과 산업시설의 구분이 사실상 무의미합니다. 전후방이 따로 없고 전선의 군대뿐만 아니라 후방의 전쟁 잠재력을 파괴함으로써 상대방의 전쟁 의지를 꺾는다는 것은 오늘날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2차대전 당시 한 도시 전체를 공습으로 파괴하는 전쟁방식은 이러한 전략의 반영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남북전쟁 때까지만 해도 이런 발상 자체가 없었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민간인에 대한 약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략적 안목을 가지고 적의 산업 근거와 생활 본거지를 조직적으로 파괴한 것은 셔먼이 최초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1864년 5월 초, 셔먼은 남부의 심장부인 조지아주(州) 아틀랜타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셔먼의 군대는 로키 페이스 고원, 레사카, 뉴호프 처치, 피켓츠 밀 등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며 아틀랜타로 향해 진군했습니다. 남군에 비해 2배 정도의 병력을 거느리고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셔먼은 갈수록 악명을 떨쳤습니다. 그의 군대는 마치 메뚜기 떼처럼 철도를 파헤쳤고 지나는 마을마다 불을 놓았습니다.
셔먼은 자신의 부하들이 저지른 약탈과 파괴행위에 대한 항의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조지아 사람들의 후회와 고통의 신음소리가 하늘까지 뻗치게 할 것"이라는 셔먼의 공언처럼, 이런 식의 전쟁방식이 남군을 신속하게 패배시키는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그는 가는 곳마다 철도와 목장, 목화밭, 공장이나 주택을 가리지 않고 남부가 전쟁을 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모조리 파괴하고 불태웠습니다.
1864년 9월 2일, 한 달 반 동안의 포위 끝에 셔먼은 아틀랜타를 함락시켰습니다. 후퇴하는 남군이 이미 보급물자에 불을 놓고 달아났는데도 셔먼은 도시 자체를 철저하게 파괴했습니다.
시장이 그를 찾아와 도시를 태우는 계획을 재고해 달라고 요청하자, 셔먼은 "전쟁에 대해 당신은 나보다 더 혹독한 용어로 정의할 수 없다, 전쟁은 잔인함이다, 그보다 더 세련되게 말할 수 없다"라고 답했습니다. 자신을 탓하지 말고 전쟁을 탓하라는 의미였죠.
셔먼 장군의 말대로 아틀랜타는 철저하게 파괴됐습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가 불타는 도시를 탈출하는 장면에는 실제로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습니다.
북군이 남겨둔 유일한 곡물, 동부콩
아틀랜타를 함락시킨 두 달 후인 11월 15일, 셔먼은 6만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미국의 남동쪽 대서양을 향한 진군을 개시합니다. 이른바 '바다로의 행군'(March to the Sea)을 시작한 것이죠. 그는 통신과 병참지원도 없이 행군에 나섰는데요. 병사들이 먹고 쓸 물자는 그때그때 현지에서 조달하겠다는 심산이었습니다.
당시 셔먼이 예하 지휘관들에게 내린 지침(Special Field Order 120)은 '각 부대는 행군 도중 자유롭게 약탈 하거나 파괴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셔먼 장군의 북군은 약탈을 위한 부대를 따로 편성해서 작물을 수확해서 가져가거나 창고의 식량을 강제로 징발했습니다. 셔먼 입장에선 약탈은 보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지아주 주민들의 저항의지를 꺾는다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었습니다.
남부를 휩쓸며 약탈을 자행했던 북군이 남겨둔 유일한 곡물이 바로 동부콩이었습니다. 북군은 완두콩이나 강낭콩은 빼앗아갔지만, 동물사료로나 쓰이던 동부콩 만큼은 그대로 남겨뒀습니다. 북군의 약탈로 잿더미 속에 남겨진 남부 주민들은 동물의 사료였던 동부콩으로 끼니를 때우며 전쟁을 버텼고, 이것이 새해 첫날 호핑존을 먹는 풍습을 낳았던 것이죠.
이후 대서양 연안까지 조지아주의 500킬로미터를 가로지르는 동안 셔먼의 군대가 남긴 것은 불에 타지 않는 철도의 레일뿐이었습니다. 그마저도 다시 쓸 수 없도록 불에 녹여서 나무에 둘러 놓았죠. 남부 사람들은 이것을 '셔먼의 넥타이'라고 불렀습니다.
셔먼이 민간인들에 대한 난폭한 행동까지 부하들에게 허용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일부 부대들이 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노예해방을 명분으로 싸운 북군에게 어울리지 않게 그들에게 고통을 당한 것은 남부 백인들뿐만 아니었습니다.
북군의 진주로 법적으로는 노예에서 해방이 됐지만, 셔먼 장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북군이 통과한 지역에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방치상태에 내몰린 수많은 흑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한 북군 부사관은 "이번 작전에서 민간인들에게 가해진 잔혹한 행위는 우리가 이 전쟁에서 추구하는 가치를 산산조각 내기에 충분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병력상으로도 열세에 처한 남군이 셔먼의 공격을 막아낸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또 셔먼은 실제 자신이 목표로 하는 도시의 중간선을 따라 애매하게 움직임으로써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컬럼비아를 장악한 데 이어 셔먼은 그해 12월 9일 거의 아무런 군사적 제지 없이 대서양 연안도시 서배나에 도착했습니다. 시내를 방어하고 있던 남군 사령관 윌리엄 하디 중장이 12월 20일 병력을 철수시키면서 서배너를 손에 넣은 셔먼은 이 도시를 링컨 대통령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바친다는 보고를 올렸습니다.
이어 셔먼은 북으로 진로를 바꿔 노스 캐롤라이나주까지 진격, 이듬해 4월 26일 존스턴 장군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5년간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시계>(Grandfather's Clock)의 작곡가로 유명한 '헨리 클레이 워크'가 바다로의 행군을 기리는 < Marching Through Georgia >를 발표한 것은 1865년, 막 전쟁이 끝날 즈음이었습니다.
히트곡 된 '조지아 행진곡'... 상처에 소금 뿌리는 격
북부 코네티컷에서 노예제 폐지론자의 아들로 태어난 워크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23살 때까지 악보 인쇄용 식자공으로 일을 했는데, 인쇄기가 돌아가는 소리에 영감을 받아 피아노도 없이 작곡을 했다고 전해지죠.
워크는 이 전쟁을 지켜보면서 50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희년'(禧年, year of jubilee)에는 사람들의 부채를 탕감해주고 모든 노예를 풀어줬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율법을 떠올렸습니다. 그에게 이 전쟁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성스러운 전쟁'이었을 겁니다.
전쟁 중 여러 개의 히트 곡을 냈던 그가 셔먼 장군의 남부 원정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 낸 노래는 '조지아 행진곡'이라고 불릴 정도로 멜로디 자체가 흥겨웠고, 종전 후 제대 군인들을 통해 미국 전역으로 전파돼 대단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남부 사람들에겐 몸서리치는 노래가 됐습니다. 승자가 소리 높여 부르는 해방가가 패자의 아물지 않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역할을 한 셈이지요.
이후 <Marching Through Georgia>는 전세계로 퍼져나가 다양한 변신을 하게 됩니다. 행진곡으로 연주되거나 멜로디가 차용돼 정당의 당가, 찬송가, 저항가요의 원천이 됐던 것이죠. 이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들려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