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1~22일 양일 간 쿠바에서 진행되었던 미- 쿠바 관계정상화 회담이 산고 끝에 성과 없이 해산했다. 첫 고위급 회담의 대표는 미국 측 국무부 차관보(Roberta Jacobson)와 쿠바 측 외교부 북미국장(Josefina Vidal) 각국의 두 여성이 나섰다.
오바마와 라울의 최측근들이었던 비밀협상의 당사자들이 아니라, 공식 외교 라인을 대표하여 나선 두 여성은 화학적 결합을 이루지 못하고 예상대로 기 싸움으로 일관했다. 4월을 전후하여 다음 회담이 재개될 것이라고 예상되지만, 양측 대표는 공식적으로는 일정을 확정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험악한 첫 번째 협상회담 첫날인 21일은 미국의 쿠바 탈출 장려 프로그램(wet foot dry foot policy), 22일은 테러지원국 해제 문제 등으로 논란이 지속됐고, 장외에서는 인권문제 공방이 이어졌다. 미국 대표들이 언론 브리핑에서 미국이 공식 의제로 인권 문제를 올려놓고 쿠바에 '압박'을 가하였다고 표현하자, 이에 발끈한 쿠바 대표는 '압박'이란 단어조차 들어본 적 없다며 쿠바 외교는 압박에는 대꾸조차 하지 않는다고 응수하였다.
미측이 스페인어 presionar (press)를 압박(pressure)으로 잘못 이해하고 사용하여 벌어진 촌극이라며 마무리하려 했지만, 쿠바는 이 같은 해명을 수용하기보다는 퍼거슨 사태 등 미국의 인권 상황을 조롱하는 것으로 신경전을 이어갔다.
이런 험악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쿠바는 2013년 6월 이래 18개월에 걸쳐 진행된 비밀 협상을 통해 합의된 정책 지향과 정상화 일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연말 전격적으로 발표된 협상 결과, 즉 미국이 행정 명령을 통해 쿠바에 대한 경제 제재를 완화하고 쿠바는 정치범을 석방하는 합의는 예정대로 이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쿠바 여행 제한 완화, 쿠바 물품 반입 규모 상향, 쿠바 현지 미국 카드 사용, 송금 제한 규모 4배 증액 등 경제 제재 완화 조치들은 순조롭게 실행되고 있고, 쿠바는 미국 대표단의 쿠바 입국에 맞춰 50명의 정치범을 석방하였다.
중간 선거 패배와 오바마의 변신
오바마 대통령의 쿠바 협상에 대해서 공화당 지도부는 중간 선거 결과에 드러난 민의를 거스르는 것이라고도 비판하고 있지만, 오바마 대통령의 구상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은 듯하다.
먼저, 지난 중간 선거의 투표율과 오바마 대통령의 정치 전략 변화이다. 기본적으로 미국 사회는 대선이 있는 해의 투표율이 50~60% 대이고 중간 선거기는 40%대 초반의 투표율을 유지해왔다. 그런데 이번 중간 선거에서는 36%대라는 전후 최저치의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이런 저조한 투표율은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에 실망한 민주당 표심의 이탈 때문이라는 해석이 정설이다. 선거 기간 내내 공화당이 '무능한 오바마 때리기'로 일관하며 표를 긁어모으자, 오바마로서는 새로운 전략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선거 직후 오바마 대통령과 민주당이 패배를 수용하기보다는 '전체 미국민'의 의사를 특별히 강조하며 전의를 불태운 것은 이런 전략의 시발점이었다. 민주당은 당내 좌파인 엘리자베스 워런을 정책소통위원회 전략보좌관(strategic policy adviser)으로 지도부에 입성시켜 당내 진보 진영의 목소리를 높이는 동시에, 인종, 환경 문제 등 민주당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대표할 수 있는 고유 아젠다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이민법 강행, 중국과의 온실 가스 감축 협상 강행, 키스톤 XL 송유관 건설 법안에 대한 거부권 표명 등 진보적 정책 성향으로의 좌클릭을 감행했다. 쿠바와의 수교 협상에 대한 결단 역시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둘째는 레임덕 단계에 들어선 대통령이 자신의 업적을 남기기에 이만한 사안도 없다는 현실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쿠바 협상은 성공한다면 닉슨의 핑퐁 외교나 클린턴의 베트남 수교만큼이나 큰 업적이다. 쿠바는 캐리비안 중미 최대 규모의 국가이자,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정학적으로 미국에게 매우 중요한 상징이다.
이런 사정을 반영한 듯, 신년 연두연설에서 오바마가 "50년을 지속한 정책이 효과가 없을 때는 새로운 시도를 해 볼 때"라며 "유효 기간이 한참 지난 정책을 끝내겠다"고 말하자, 의회에서는 큰 환호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셋째, 미국 내 여론의 변화다. 이미 5년 전 여론 조사(<워싱턴 포스트>)에서 쿠바와의 수교를 찬성하는 수가 2/3를 넘어섰고 반대 여론은 27%에 불과했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 내 쿠바계 미국인(Cuban American)이 2013년 통계에서 200만 명을 넘어서면서 카스트로 형제에 대한 그들의 태도도 변했다.
과거 쿠바 이민자들이 격렬한 반카스트로 운동의 신봉자들이었다면, 최근 특히 1995년 이후에 들어 온 쿠바인들의 경우 개입주의 성향이 다수인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실제 오바마 대통령은 쿠바와의 수교를 공약으로 내걸어 두 번의 대선에서 중요 선거구인(swing state) 플로리다 주와 마이애미의 쿠바인 밀집 선거구 모두에서 전승하였다.
쿠바에 대한 제재를 강조해 온 1세대 이민자들이, 경제적 목적으로 도미한 후세대 난민들을 과잉대표하고 있다는 점을 오바마는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수의 침묵을 왜곡대표하고 있는 공화당 성향 쿠바계 미국인들과 싸울수록, 대중적 지지도 확보에 더 유리하다는 정치 감각이 유감없이 발휘된 셈이다. 이는 우리 탈북자들의 미래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의 중남미 지정학과 쿠바의 봄?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국내 정책 동기만으로 정책 결정을 하지는 않는다는 점은 명확하다. 그럼 무엇이 오바마를 이렇게 변화시켰을까?
미국의 앞마당인 바하마나 푸에르토리코보다 가까운 쿠바가 미국 경제권에 흡수될 가능성은 상존해왔다. 그런 쿠바 내에서 시장 경제가 활성화되고 정권에 대한 불만도가 증대된다면 쿠바에 대한 개입 정책의 유혹과 매력은 분명하다.
2008년 쿠바 의회 선거 당시 쿠바인들의 13.4%가 무효 혹은 백지표를 던졌다. 2013년 선거에서는 무려 그 수가 2배인 24%로 급증했다. '아랍의 봄이 쿠바에도 일어날까'라는 논란이 공개적으로 전개된 것도 이 즈음이다. 못 먹을 과일은 쳐다보지도 않는 현실주의적인 외교관들에게 쿠바의 '시민 혁명'이라는 유혹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들이 그 해 6월에 비밀협상을 시작한 것도 그냥 우연만은 아니다.
한편 중남미의 지정학과 지경학 변화도 간과하기 어려운 변수다. 남미에서 좌파 바람이 분 이후, 미국은 중남미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왔다. 경제적으로도 미국의 앞마당이던 중남미에 중국 자본이 대규모로 들어오면서 미국은 경계심을 늦출 수 없게 되었다.
니카라과에 중국 자본이 들어가 파나마 운하의 100년 독점을 끝낼 새 운하를 건설하기 시작한 것은 그 한 예에 불과하다. 시진핑 주석이 지난해에만 두 차례 즉, 4월 멕시코 등 3개국 순방, 7월 쿠바, 베네수엘라, 브라질, 아르헨티나 4개국 순방 등 부지런히 남미를 다닌 것도 미국을 자극하였다. 며칠 전 바이든 부통령이 25년 만에 처음으로 브라질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한 것도, 쿠바 협상과 마찬가지로 중국에 기울어가는 중남미에 대한 미국의 새로운 지정학의 일부분이라 하겠다.
라울 카스트로의 셈법이번 협상은 단기적으로는 쿠바에게 이익이라는 평가가 중론이다. 대 쿠바 송금의 합법적 규모 증대, 관광 수입 증대, 쿠바의 국제 기구 가입 논의 진전 그리고 쿠바 의인 5인(Cuban Five)의 석방 등 라울에게는 여러 가지의 정치경제적 셈법이 가능했다.
2010년 이후 쿠바의 연간 교역 적자 규모는 70~100억 달러 수준이다. 이 교역 수지의 적자 폭 중 1/3은 쿠바 이민자들의 송금으로, 또 다른 1/3은 관광 수입으로 그리고 나머지는 쿠바 의사, 교사들의 (베네수엘라와 브라질 등) 해외 진출에 따른 인력 서비스 수익으로 충당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협상을 통해 송금과 관광 수익이 결정적으로 늘어난다면 교역 수지 적자를 메우는 건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쿠바 가구의 62%가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미 이민자들의 송금액은 이미 20억 달러 수준에서 35억 달러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번 협상으로 2015년에는 그 규모가 더욱 급속히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미 급속히 증대하고 있는 관광객 수 역시 폭발적으로 증대할 것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동안 쿠바의 외채와 외환 보유고는 동시에 늘어나 왔다. 2010년 220억 달러이던 외채는 현재 250억 달러가 되었고, 외환보유고는 당시 53억 달러이던 것이 107억 달러로 증대했다. 동일 기간 중 외채가 30억 달러 증가한 것에 비해, 외환 보유고는 50억 달러가 증대한 것이다.
이 수치만으로 보면 교역 수지 적자가 송금, 관광, 서비스 수출 등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해소되어 온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현상 유지론이나 소극적 땜질로는 향후 급속한 개혁 과정으로 들어설 때의 시장화와 수요 증대를 감당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라울이 생각하는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는 사실 쿠바로 하여금 국제기구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해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쿠바의 개혁은 본격적인 외자 유입 단계로 들어가고 있다. 관광, 송금, 서비스 수입에 의존하는 현상 유지 단계를 넘어서 중미 최강국으로 발돋움 하는 데는 본격적인 자본 투자 유치가 관건이다.
현재 쿠바에 대한 외자 유치를 방해하는 요소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미국의 제재이고 다른 하나는 이중환율 체제이다. 후자의 이중 환율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외자가 필요하다. 쿠바 페소(CUP)와 태환 페소(CUC)간 시장 환율은 24:1의 수준이어서, 환율 단일화를 시도할 경우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예상된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외환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IMF 등 국제기구의 지원을 통하지 않고는 대규모의 실탄을 마련하기가 어렵다. 미국과의 수교는 제재 해제와 환율 단일화라는 두 토끼잡이를 가능하게 하여, 외자 유치와 중국식 도약이라는 장밋빛 구상의 디딤돌이 되어줄 듯하다.
호사가들은 베네수엘라 재정 위기가 라울의 항복을 끌어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베네수엘라 재정 위기와 이에 따른 경제 지원 삭감 문제는 아직 현실화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 영향력도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다. 쿠바는 중미에서 멕시코 다음으로 소득 수준이 높은 나라이고, 교육 수준에 따른 인적 자본은 중남미 최고 수준이다. 쿠바-베네수엘라 관계를 과거 쿠바의 소련 의존도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이다.
라울의 후계 레짐사실 라울의 계산은 현재의 위기에 대한 대응이라는 수세적 카드라기보다는, 다가올지도 모를 위기에 대한 선제적 조치라는 성격이 강하다.
쿠바가 선택한 점진주의 개혁 노선의 한계는 분명하다. 현재의 점진주의 개혁은 장기적으로 자유주의 사조의 유입과 시장화 강화라는 패턴화된 개방 압력으로 증대될 것이고 이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 한, 현 정권에 대한 불만 증대는 불가피할 것이다.
라울이 선언한 중국식 개혁 노선, 다소 몸에 맞지 않는 옷인 듯한 점진적 개혁론은 장기에 걸쳐 평온하게 지속된다면 성공하겠지만,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고 여건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결정적 단점에 노출되어 있다. 2018년 은퇴를 공언한 라울로서는 차베스의 후계자 마두로가 겪고 있는 리더십의 한계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을 것이다.
쿠바는 1990년대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당-국가 체제를 벗어나 군부가 생산과 이권의 중심에 선 체제로 변화해왔다. 쿠바 경제의 60% 이상을 쿠바 군부와 군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다. 대외적인 접촉과 관련된 자산은 거의 100%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쿠바의 군대가 혁명화군이 아니라 남미식 준타 체제의 이권 군대로 전환한다면, 쿠바 체제의 안정성을 결정할 군대의 향배는 과거와 같은 혁명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경제 성장과 개혁의 떡고물에 달려 있게 마련이다.
한번 시동을 건 개혁의 호랑이 등을 탈 경우 내릴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 라울로서는 더 많은 개혁과 더 많은 개방 외에 선택이 없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신년 연설에서 오바마가 보인 자신만만함은 이 같은 라울의 걱정을 읽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화당 주도 의회라는 무기 아닌 무기를 배경으로 한 미국과 쿠바의 협상은 한동안 샅바싸움을 계속할 태세다. 이런 지리한 협상에서 종국적 승자를 단기에 판단하기는 어렵고 그 판단 또한 시간이 지나면 뒤바뀌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바마 대통령에게는 2년이라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공화당과 다른 한편으로는 라울과의 이중 협상(two level game)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84세의 노인 라울이 경제 성장을 통해 후계 과정과 쿠바의 군사 레짐을 안정화시키는 데 사력을 다하고 있다면, 오바마는 자영업자들의 시장 좌판이 즐비한 아바나의 말레콘 해변에서 바다같이 몰려오는 시위대들을 즐기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한반도에의 함의미국이 개입주의(engagement)를 시작할 때는 체제 변환에 대한 분명한 계산이 서 있을 때이다. 쿠바나 이란과의 협상에 나서고 있는 미국의 셈법은 철저하다. 이 점에서 북한에 대해 무시로 일관하고 레토릭으로만 강경 발언을 쏟아내는 미국 정부가 북한 정권의 변환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점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100만의 군대를 운용하는 북한 정권을 상대로 한 힘겨루기에서 미국의 계산은 한국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런데도 미국만 쳐다보고 북한 정권의 붕괴나 흡수통일이 임박했다며 두 손 놓고 있거나, 통일 대박이라면서 중국이나 쫓아 다녀서는 두 대국의 뒷 계산을 읽고 따라갈 길이 없다. 한국에게는 한국의 길과 한국식 방법이 있다.
오바마 대통령의 새로운 전략과 변신이 북한에 대해 적용될 여지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맹국 한국의 대북 이니셔티브에 대한 지지에는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가 분쟁 지역으로 변하기보다는 남북 협상 체제가 자신의 새 전략에 부합함을 오바마 대통령이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미국 대통령의 이런 변신과 교감했으면 하는 이유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코리아연구원 홈페이지(knsi.org)에도 함께 실립니다. 이 글을 쓴 이정철 교수는 숭실대학교 교수입니다. 지금은 미국의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방문교수로서 미국과 쿠바관계를 연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