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공개된 이명박 전 대통령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는 경제 관련 내용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대부분 '2008년 금융위기 극복' '한미FTA 비준' 등을 자신의 경제적 치적으로 자화자찬하는 내용들이다.
반면 당시 산업은행이 세계 금융위기를 촉발시킨 리먼 브러더스 인수를 시도한 사실은 감춘 채, 금융 위기 책임을 야당과 일부 진보 언론·누리꾼에게 돌렸다. 지난 2008년 9월 만기가 도래하는 외화 단기 채권 때문에 한국이 외환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는 '9월 위기설'이 대표적이다.
금융위기는 미네르바-언론 탓?... '리먼브러더스 인수' 언급 안 해이명박 전 대통령은 "당시 외환보유고가 2400억 달러에 이르는 상황에서 67억 달러의 단기 채권으로 외환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는 9월 위기설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면서 "광우병 사태를 주도하던 세력 중 일부가 9월 위기설을 매개로 인터넷을 이용해 정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라고 주장했다.
이 전 대통령은 그 책임을 인터넷 경제 논객인 '미네르바'와 야당과 일부 언론, 학자들에게 돌렸지만 당시 <파이낸셜타임스> <더 타임스> <포브스> 등 외신도 이미 한국의 금융 위기 가능성을 보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9월 위기설을 퍼뜨린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당한 표현의 자유를 행사한 것이라 주장한다"라면서도 "그 주장으로 인해 한국 경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불신이 커져 금융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국가부도 사태에 직면한다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라고 따졌다.
'미네르바'로 알려진 박대성씨는 이듬해인 2009년 1월 허위 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지만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이 전 대통령은 '9월 위기설'을 터무니없는 괴담으로 치부했지만 실제 '위기'는 있었다. 당시 국내 은행들은 외환 수급에 어려움을 겪었고 2008년 4분기에만 650억 달러에 달하는 외국 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멀쩡한 기업도 부도 위기라는 잘못된 소문이 퍼지면 투자자와 채권자들이 자금을 일거에 회수해 부도를 맞는 경우가 있다"라면서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상황마저도 언론의 부정적인 보도로 인해 통제 불능으로 치닫고 있었다"라며 책임을 당시 국내외 언론에 돌렸다.
정작 우리 정부가 당시 산업은행을 통해 리먼브러더스 인수를 추진해 우리 경제를 큰 위기에 빠뜨릴 뻔한 사실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이 전 대통령과 강만수 전 장관도 리먼브러더스 인수를 적극 지지한 사실이 담긴 내부 문서가 공개되기도 했다(관련기사 :
"리먼 브라더스 인수, MB-강만수도 지지").
"고환율정책 덕에 금융위기 극복"... 강만수 적극 두둔
그러면서도 이 전 대통령은 금융위기 직전 기획재정부의 외평채(외국환평형기금채권) 발행 실패에 강한 미련도 나타냈다. 이 전 대통령은 외평채 발행 실패에 대해 당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안일하게 대응하다 사태가 더 악화된 것 아닌가"라면서 "지금 나라가 외환위기를 맞게 생겼는데 금리가 문제냐"라고 따졌다.
이에 강 전 장관은 "금융위기가 터질 줄은 아무도 몰랐다"라면서 "그렇게 높은 금리로 한국이 국채를 발행하면 오히려 국제사회에 '한국 경제가 어렵다'는 나쁜 시그널(신호)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해명했다. 박병원 당시 경제수석도 "실무자들은 너무 비싼 가격으로 발행했다가 나중에 책임 추궁을 당하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한다"라고 거들었다.
청와대 내부에서도 금융 위기에 직면해 갈팡질팡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전 대통령은 "이런 시기에 CEO 출신인 내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데는 역사적 소명이 있을 것이라며 수없이 마음을 다잡았다"라면서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급박했던 상황에서 우여곡절 끝에 미국·중국·일본 3국과 통화스와프를 체결함으로써 우리는 또 한 번의 외환위기를 막을 수 있었다"라고 자화자찬했다.
이 전 대통령은 2008년 대통령 취임 직후 경상수지 적자를 줄이려고 물가 상승을 초래한 '고환율 정책'도 적극 해명했다. 당시 달러당 900원대에 머물던 원-달러 환율은 2008년 3월 이후 급상승해 1000원대를 넘어 1100원대에 육박했다.
당시 정부가 개입해 일부러 환율을 높이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지만 이 전 대통령은 오히려 "그때는 이미 정부가 개입하지 않아도 환율이 저절로 오르고 있었다"라면서도 "다만 환율을 낮추기 위해 적극적인 환율 방어 정책을 쓰지는 않았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강만수 장관은 경상수지를 개선하기 위해 환율이 적정 수준에서 유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라면서 "물가가 오르면 국민이 힘들지만 그렇더라도 경상수지 적자가 커져 외환위기를 맞는 것보다 낫다는 의견이었다"라고 고환율 필요성을 인정하는 한편, '저환율 정책'의 위험성을 제기했다.
당시 경상수지 적자가 감소하긴 했지만 2008년 1분기 물가상승률이 4.5%에 달하는 등 고공행진을 하자 "정부가 수출 대기업에만 좋을 뿐, 서민들을 고물가에 시달리게 하는 고환율정책을 쓴다"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을 이 또한 야당과 진보성향 언론의 '정치적 공격'으로 치부했다.
이 전 대통령은 "환율을 인상하면 경상수지가 악화되고 외환보유고가 줄어 심각한 경제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사실은 외면한 채, 물가 문제라는 한 가지 측면만 놓고 정부를 공격한 것"이라며 "야권의 요구대로 취임 초부터 물가 안정을 위해 저환율정책을 썼더라면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되고 외환보유고는 소진된 상태에서 금융위기를 맞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고환율주의자'인 강만수 장관 해임 요구에도 "만일 그때 여론을 수용하여 강 장관을 해임했다면 정치적 비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을지 모른다"라면서도 "내 개인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국가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었다"라고 적극 두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