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나무젓가락과 종이컵 등의 일회용품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방마다 습관적으로 켜두던 불도 끄고, 안 쓰는 콘센트는 뽑아둔다. 남는 음식을 줄이기 위해, 최대한 적게 만들고, 만든 음식은 어떻게든 다 먹어치운다. 음식점에서 남은 음식은 그 양과 상관없이 싸달라고 한다. 가끔씩 화가 날 때면 그 평온한 미소를 떠올리며 마음을 가라앉힌다. 공익광고 문구 같은 이 모든 일들이 한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중년에 그 흔하다는 바람이 당신에게도 부는 것이오? 라며 귀가 솔깃해지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바람의 본질이 변화라면 그 또한 틀린 말은 아니다. 그 사람을 만나면서부터 내 삶에 작은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고, 부정적이고 왜곡되었던 나의 시각이 정상의 범주내로 들어오게 되었으니 말이다.
신부님을 만나기전 나는 무신론자그 사람은 바로 신부님이다. 이 자리에서 종교 예찬론을 꺼낼 생각은 조금도 없다. 신부님을 만나기전 나는 무신론자였고, 지금도 역시 깊은 신앙심의 소유자는 아니다. 조금 멀게는 세상을 떠나신 문익환 목사님과 지학순 주교님, 성철 스님에서부터 가깝게는 현재 바티칸의 수장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까지 종교계에 존경할 만한 분들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내가 운이 없었던 건지 내 가까이에서는 그런 인격체를 가진 종교인들을 거의 만난 적이 없다.
내가 생각하는 사제, 즉 종교인은 신의 대리인이다. 앵무새처럼 신의 말씀만 되뇌이는 사람이 아닌 신의 말씀과 행동을 동시에 실천할 수 있어야한다. 허나 요즘 세상에서 종교 혹은 종교인들은 믿음과 사랑 대신 실망과 배신감을 안겨주기 일쑤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한 신부님을 알게 되었다. 그는 종교와 세상에 대한 나의 생각을 뿌리부터 흔들어 놓았다.
사제를 떠나 한 남자로써 그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첫째, 그는 투철한 근검절약 생활인이다. 그 앞에서 일회용품을 사용하다가는 날벼락을 맞게 되며, 음식을 남기는 날에는 불호령이 떨어진다. 성당 주변의 장기간 공사로 인해 한 여름에도 흙먼지 때문에 창문을 열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가 머무는 사제관에는 에어컨 한 번 켜지 않았다. 한 겨울도 마찬가지여서 전기장판과 잠바(절대 패딩이나 파카가 아니다) 하나로 추위를 이겨낸다.
언젠가 저녁 늦게 맥주 몇 병을 사들고 찾아간 적이 있었다. 냉골 같은 사제관 바닥에 주섬주섬 안주를 내오시는데, 엊그제 먹다 남은 것을 싸가지고 오셨단다. 얼마 되지 않는 양이었기에 과연 나 같으면 싸왔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부스러기 하나 남김없이 깨끗이 비우고 말았다. 구멍 난 양말쯤은 애교로 넘겨야 한다. 큰일 보고 화장지 대신 사용한다는 목화솜행주는 한 개를 가지고 벌써 몇 개월째 빨아서 사용 중이라고 은근히 자랑이다.
둘째, 그는 공정과 정의의 사도이다. 작년 세월호 사건 이후 거의 모든 미사 때마다 희생자들과 유족들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밀양 사태 당시 구속된 예술인들을 위한 탄원서 서명, 월성원전 연장가동 반대 서명, KEC 구조고도화 반대 서명 등 각종 사회 이슈와 관련된 모든 서명은 언제나 그의 몫이다. 정당하지 못한 사회 현안에 대해 강론때마다 짚고 넘어가지 않고서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본당에 얽매이지 않았다면 그의 자리는 늘 삶의 현장속이었으리라.
셋째, 그는 효심이 깊은 아들이다. 하느님의 아들로 살기위해 사제의 길을 걸으면서도, 치매기가 있으신 홀어머니를 극진히 모신다. 그의 행동거지는 신부라는 존재를 떠나서 부모를 모시는 한 개인의 귀감으로 충분히 삼을만하다. 그의 삶에 묻어나는 가난한 어린 시절의 기억들 중 어머니의 말씀은 그가 올곧게 성장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사십대 후반의 그가 지금도 깍듯하게 어머니를 모시는 모습은 자체가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다. 순교하는 마음으로 살겠다는 처음 다짐이후 한날한시를 허투루 살지 않고 몸으로 살았다. 공식적인 시간 이외에 대부분을 신자들과 성경을 읽고, 사회교리 등을 공부하며, 사회 속에서 교회의 역할에 대해 항상 고민하였다. 누군가의 말대로 개인 시간이 없는 신부님, 성경 말씀대로 사는 신부님이라는 표현이 딱 맞아 떨어진다.
그런 그가 이제 나의 곁을 떠난다고 한다. 카톨릭 교회의 생리에 익숙치 않은 내게는 너무도 갑작스런 이별통보다. 매년 1월이면 전국 카톨릭 사제들은 인사발령을 받게 된다. 짧게는 3년 길게는 5년마다 교구에서 지정해주는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이다. 협동조합을 비롯하여 그와 함께 하지 못한 일들이 본당 마당의 잔디만큼 많은데 말이다.
평소 그의 입바른 소리와 행동들, 그리고 사회를 향한 거침없는 외침들이 교구에 잘못 보여 갑작스런 발령이 났다는 소문도 들린다. 보수의 동네에서 개혁적 언동들이 껄끄러웠던 누군가가 민원을 넣었다는 풍문도 전해온다. 하지만 확인 할 길 없는 심증들에 대해서는 미련을 접어두기로 한다. 성스럽기 그지없는 카톨릭 교회에서 공정하지 못한 인사를 시행했겠는가? 그럴 리 만무하다. 꼭 그렇게 믿고 싶다.
다만, 공허함이 남는다면, 앞으로 이런 신부님을 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어떤 신부님은 싱글 실력을 자랑하며 골프채를 휘두를 때, 어떤 신부님은 얼어붙은 수도를 녹인다고 삽자루를 들고 언 땅을 파헤쳤다. 2천년을 거슬러 예수라는 사내가 살아 돌아온다면, 과연 어느 쪽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신부님께서 내게 마지막으로 남긴 한마디는 바로 "몸으로 사십시오"였다. 그 어떤 성경의 구절보다 여운이 남았다. 교회와 지역의 경계를 허물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몇 년 간 터를 닦고 이제 겨우 구체적인 실행에 옮기나했더니 덜컥 발령이 나서 마음이 편치 않으실 분. 그럼에도 남는 이들의 평화와 안녕을 걱정하시는 천상 신부님.
올해부터 정의평화위원회의 일을 맡으신다니 기대반 걱정반이다. 정의감 넘치는 신부님께서 또 어떤 십자가를 짊어지실지, 자신은 돌보지 않고 불의와 싸우다가 해라도 당하지는 않으실지. 신부님 말씀대로 저는 몸으로 살아보겠으니, 신부님도 어디에 계시든 몸 건강하십시오. 분도 신부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