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지 못해서 안달이다. 대도시와는 거리가 먼 작은 시골마을에서 살고 있는 청소년이라면 더욱 그럴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 자신의 꿈을 펼치기에는 너무 좁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주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파악하고, 잔소리를 늘어놓으려고 하는 작은 마을의 폐쇄성을 싫어한다.
반면에 절대로 고향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랫동안 이어져온 가업을 물려받기 위해서, 또는 고향을 벗어나서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자신이 없어서, 고향에 너무 정이 들어서 등. 이유는 다양하다.
떠나는 사람이 있으면, 남는 사람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헤어진다면 그 심정이 어떨까. 세상이 조각조각 부서진다. 함께 만들어온 앞날의 계획, 함께 꾸어온 모든 꿈, 그것들이 전부 무너진다. 떠난 사람도 남는 사람도, 예전 같은 삶을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지루한 농장에서 성장하는 15세 소녀독일 작가 넬레 노이하우스의 2014년 작품 <여름을 삼킨 소녀>의 주인공인 15세 소녀 셰리든도 자신이 사는 곳을 떠나고 싶어 한다. 작품의 무대는 1994년 미국 네브래스카 주의 페어필드라는 곳이다.
셰리든은 이 지역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농장주의 딸이다. 그렇다면 별다른 불편이나 경제적인 어려움없이, 학교에 다니면서 자신의 삶을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셰리든은 농장주의 친딸이 아니라 입양된 자식이다.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고, 함께 살고 있는 네 명의 오빠들도 알고 있다.
가정이 화목하고 단란하다면 이런 위화감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셰리든의 가족은 그렇지가 않다. 농장주인 아버지는 엄격하며 보수적이고, 어머니는 사사건건 셰리든에게 트집을 잡아서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온갖 잔일을 시킨다. 오빠 중 한명은 노골적으로 셰리든을 무시하며 "넌 내 동생이 아니야!"라고 말한다.
이런 환경에서 학교와 가정을 오가는 생활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셰리든은 떠나는 것을 꿈꾼다. 학교를 졸업하고 18살이 되면 자신은 이곳을 떠난다. 그녀에게는 재능도 있다. 멋진 목소리와 가창력이 있고, 작곡 능력과 피아노 실력도 있다. 학교 선생님들도 그것을 인정했을 정도다.
대신에 떠나기 전에 해결할 문제가 있다. 자신의 친부모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 이상하게 양부모는 그 문제에 대한 언급을 꺼리고 있다. 거기에 무슨 금기라도 담겨 있는 것처럼. 셰리든은 동네의 남자들과 어울리면서 동시에 자신의 출생의 비밀에 한 발씩 다가가기 시작한다.
한 소녀가 가지고 있는 출생의 비밀넬레 노이하우스는 미스터리 작가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이 포함된 '타우누스 시리즈'로 유명하다. 반면에 <여름을 삼킨 소녀>에서는 범죄와 스릴러의 요소보다는 한 소녀의 성장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도 미스터리는 있다. 셰리든은 자신의 친부모가 누구인지, 그들에게 무슨 일들이 있어서 자신이 입양되었는지 집요하게 추적해간다. 자신의 출생에 무언가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만큼 호기심이 생기는 것도 없을 것이다. 나중에 진실을 알고 나면 엄청난 충격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을 고향이라고 믿는 것은 착각일 수 있다. 고향은 자신이 편안하게 느끼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곳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또는 가족에게서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떠나는 것을 꿈꾼다. 다른 곳에서는 무언가를 이룰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불가능하니까. 이곳에 남아있으면 항상 누군가의 먹잇감이 될 수 밖에 없으니까.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덧붙이는 글 | <여름을 삼킨 소녀>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 전은경 옮김. 북로드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