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8일 문화역서울284 RTO 공연장에서 작곡가 남상봉의 <밤 : 인시>공연이 열렸다. 이번 공연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ARKO) 차세대예술인력육성사업(Arko Young Art Frontier, AYAF 2014) 음악부문 당선작으로 바이올린·첼로 등의 악기와 컴퓨터·조명이 쓰였다. 특히 남상봉이 지난 5년간에 걸쳐 직접 개발한 악기 엠포이(mPoi) 각각의 독특한 개성, 그 개성들이 모여 하나의 음악극을 이루는 수준 높은 작품이었다.
우선, 공연 2~3주 전부터 소셜 SNS를 통해 공연 프로그램을 소개하며, 작곡가 본인이 공연준비과정의 노고와 고충 등을 털어놓았다. 공연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또한, 한국 전통 쥐불놀이에서 착안하고 뉴질랜드의 전통 퍼포먼스의 아이디어를 더해 공연이 더욱 다채로워졌다. 엠포이가 이번공연에서는 어떤 신기한 소리와 모습을 보여줄지에 대해 기대와 관심이 모아졌다.
이러한 관객들의 기대와 호응은 RTO 공연장을 꽉 채운 관객 수에서도 드러났다. 마치 패션쇼장처럼 공연장 한 가운데를 세로로 길게 무대를 설치하고, 그 양 옆을 서로 객석이 마주보게 배치한 형태였다. 공연 30분 전부터 객석은 이미 거의 꽉 채워져 있어서, 관객들의 이번 공연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를 느낄 수 있었다.
호기심과 기대감 가지고 들어간 공연장
공연은 '밤'의 고요와 고독에 대한 단상을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의 문학작품 '라 누이트(La Nuit)'을 중심으로 작곡가 남상봉의 이전 음악 작품들·엠포이 퍼포먼스 등 9개 부분의 음악극으로 풀어냈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무대 뒤쪽 높은 단 위에서 작곡가 신지수의 토이 피아노로 첫 곡 '나이트 컴(Night-Calm)'이 시작됐다.
고요함을 깨트리는 '웅~'하는 전자음향의 진동 속에 토이피아노의 금속성 맑은 음색과 아르페지오 움직임이 신비롭다. 천장에서 공연장 전체를 비추며 천천히 회전하는 은색 조명으로 마치 관객들은 별빛 우주 속에 앉아있는 느낌이다.
'엠포이 솔로(mPoi Solo)'는 남상봉이 유학시절부터 개발을 거듭해 온 전자악기 엠포이의 현란한 포물선 움직임과 그에 따라 발생하는 다채로운 전자음향이 무척 신기했다. 움직일 때마다 빨강·파랑·초록으로 갖가지 색깔을 내는 불빛도 멋있지만, 어두컴컴한 가운데 오직 엠포이의 불빛만이 그려내는 원형의 궤적이 그토록 다양할 수 있다는 것에 또한 놀랐다.
원형, 누운 팔자형, S자형, S자형의 연속 등 실로 빠르고 다양한 움직임이 쉼 없이 계속될 때마다 그 움직임에 맞춰 소리 또한 움직임이 재미있다. 포물선 운동이 이렇게 다양한지 처음 알았다.
'어웨이큰(Awaken)'은 이번 공연의 제목 <밤 : 인시>의 '인시(새벽 3시-5시)'에 절에서 잠들어있는 세상의 사물들을 깨우기 위해 사중사물(범종·법고·목어·운판)을 두드리는 것에서 작곡가가 영감을 얻어 곡을 썼다. 절에서 사용하는 주발에서 녹음된 음원이 전자음향으로 몽롱하고 고요하게 울리는 가운데, 작가 올리버 그림이 고안한 무대 천장에 달린 거울이 내는 작은 반사빛이 계속적으로 천천히 무대 앞에서 뒤로 회전했다.
큰 원형의 흰색 조명은 그와 반대로 무대 뒤쪽에서 앞쪽으로 회전해 서로 교차한다. 절에서 108배를 반복해 드리는 것처럼 간절한 염원과 어둠속의 맑은 정신이 느껴지는 곡이었다.
이어서 뒤쪽 무대 통로에서 시작된 바이올린 솔로곡 '인비져블 무브먼트(Invisible Movement)'는 빠른 패시지(곡의 중요한 부분을 연결하는 악구)와 느린 패시지의 대조, 격렬한 부분과 조용하면서도 빠른 부분의 대조가 좋았다.
작곡 당시 바이올리니스트 남카라의 세심한 움직임까지 관찰해 작곡해서인지, 음계의 복잡한 패시지나 선율구조보다는 바이올린 현 사이의 이동에 집중했다. 한 번 크게 연주한 음형이 곧바로 작게 연주되는 움직임의 '확정' 등 오른팔의 활과 왼손가락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춰 곡을 썼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자음향과 함께였어도 좋았겠다 싶은 반면, 바로 뒤의 전자음향 더블베이스 곡과 대비됐다. 전체공연 구성에서 유일한 기악 바이올린 솔로만의 느낌으로도 신선한 감이 있었다.
'쉬프트 넘버2(Shift No.2)'는 컴퓨터의 'Shift(변화시키다)' 키처럼 컴퓨터 음악으로 기존의 예술을 변화·확장시키려는 의도로 재즈 베이시스트 켄 브루스와 함께 만든 작품이다. 더블베이스 특유의 메마르고 묵직한 저음의 보잉이, 컴퓨터를 통해 전자음향으로 변화되어 스피커 사이를 회전한다.
악기의 특성을 잘 살린 현대음악, 전자음악다운 음향의 변조와 무게감, 진행감이 좋았다. 이어서 토이피아노의 '나이트-론니(Night-Lonely)'가 다시 무대 뒤쪽 원형조명 안에서 들려왔다. 점묘적인 토이피아노의 음형이 딜레이·에코로 변조되어 고독감을 드러낸다.
한국 전자음악의 현 주소를 보여주다'엠포이 앙상블(mPoi Ensemble)'은 같은 엠포이인데도 공연 앞부분 엠포이 솔로의 격렬함과는 다르게 차분함과 고요함을 보여주었다. 엠포이 원 운동의 주기와 무한함에서 '패턴의 반복'이라는 착상을 얻고, 이것을 명상적인 소리로 연결시켰다. 엠포이 솔로에서 보였던 원 운동과 소리 사이의 상호 교류는 없었다.
대신 엠포이 세대가 함께 그리는 원 운동의 다양한 모습과 그 조화, 그리고 잔잔한 전자음향의 진동을 느꼈다. 엠포이 세대의 다채로운 빛깔이 만드는 원운동의 모습에서 '무아'의 상태가 떠오르기도 했다. 다음으로 '나이트 널버스(Night-Nervous)'는 밤의 고독을 벗어나기를 원하는 이면의 두려움을 바이올린과 첼로로 하모닉스 등의 현대주법과 전자음향으로 표현했다.
마지막 '언베어러블(Unbearable)'은 바이올린·더블베이스·플루트·클라리넷·타악기·3대의 엠포이 그리고 전자음향이 함께 어우러진 그야말로 이색적인 장면이었다. 어슴푸레한 고요가 끝나가며 동트는 새벽의 기운이 타악기 우드블록의 미묘한 움직임, 현악기의 조화와 하행음계, 목관악기의 지속음으로 표현된다.
점차로 동음 반복 트레몰로를 악기 간 번갈아 하고, 격렬한 전자음향의 회오리도 함께 휘몰아치더니 타악기의 격렬한 비트, 현악기의 글리산도 등이 포르티시모로 계속된다. 악기와 전자음향이 최고조일 때, 3명의 엠포이 앙상블의 현란한 불빛의 움직임도 함께 등장해, 듣는 것과 보는 것의 혼연일체가 밤에 대한 황홀감을 안겨주며 대단원의 막을 장식한다.
공연 마지막의 대담하고 거침없는 조합이 인상적이어서 한 5분 이상 지속했어야 맛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7개월간의 준비로 공연을 올린 작곡가이자 전자음악가인 남상봉은 "음악극의 특색을 가지면서, 작곡가 남상봉의 이전 작품들을 독립적으로 선보이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난 몇 년간의 제 작품 경향이 우연하게 '밤'에 대한 것"이라며 "전자음향의 극대화보다는 악기와 전자음향, 그리고 엠포이 솔로와 엠포이 앙상블 각 요소 간 균형에 역점을 두고 준비했다"고 공연의 취지를 설명했다.
한국 전자음악의 세대교체가 서서히 시작되고 있다. 문화예술의 흐름과 변화는 어느 날, 어느 시점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공연예술은 지난 기간 동안의 축적되었던 에너지를 공연시간 안에 응축해 표현해내야 하는 장르의 특성상, 세월의 흐름과 문화예술과 기술의 변화량을 고스란히 한 작품 안에서 느낄 수 있게 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AYAF 2014 공연예술 창작자부문은 이러한 공연예술의 특성을 잘 알고, 연구조사·해외리서치 지원·공연 창작 지원 등을 통해 앞으로의 우리 문화예술의 미래를 선도할 젊은 예술가들에게 지속적인 창작 작업에 대한 토대를 마련해 주는 사업이다.
AYAF 2014의 체계적인 지원 덕분에 이번 공연을 올릴 수 있었다는 작곡가 남상봉. 물론 그 지원 덕이기도 하겠지만, 이번 음악극은 지난 5년간 유학시절의 대표 작품들인 해외 작곡 콩쿠르 수상작들과 개발악기를 한 자리에서 선사하는 종합선물세트였다. 자신의 작곡 리사이틀을 훌륭하게 연출하는 능력은 아무나 가지는 것이 아니다. 작곡 리사이틀과 음악극의 경계 사이를 사뿐히 넘으면서 자신의 의도와 면면을 욕심껏 펼쳐내어 보일 수 있는, 수수한 외모와는 다르게 배짱이 두둑한 남상봉의 앞으로의 행보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플레이뉴스>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작성한 기사에 한하여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