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는 올해 창간 15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지난 2000년 2월 22일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창간한 뒤, 보수일변도의 언론지형에서 '열린 진보'의 목소리를 꾸준히 내왔습니다. 여기 <오마이뉴스>와 나이가 같은 닮은꼴이 있습니다. 바로 혁신학교입니다. 2000년 남한산초등학교에서 시작된 학교 개혁 운동은 2009년 혁신학교이라는 이름으로 제도화된 뒤, 전국으로 확산됐습니다. 혁신학교는 무너진 공교육을 되살리는 행복한 학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여러분들을 행복한 학교에 초대합니다. [편집자말] |
경기도 성남시 산성역에서 배차간격 30분의 버스를 타고 산길을 오르면, 20분 뒤 남한산성에 닿는다. 그 가운데에는 최근에 복원된 행궁과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음식점들이 모여 있다. 음식점 사이로 단층의 조그마한 초등학교가 눈에 띈다. 올해로 개교한 지 103년 된 남한산초등학교다.
4일 오후 2시 11년 전 이 학교를 졸업한 이정(24)씨가 학교 정문에 들어섰다. 운동장은 시끌벅적했다. 학생들은 녹지 않은 빙판에서 넘어지며 축구를 하고 있었고, 한쪽 놀이터에도 학생들로 가득했다. 이미 1시간 전 하교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 뒤였다. 이정씨는 벙글거리며 "뭉클하다, 저도 저렇게 신나게 놀았는데…"라고 말했다.
남한산초는 전교생이 167명에 불과한 시골학교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초등학교이기도 하다. 이날 광주의 한 초등학교 교장·교감이 4시간을 달려 이곳에 도착했다. 이달에만 인천·경북·제주의 학부모나 교육 관계자들이 이곳을 찾는다. 이 학교 고양옥 교감은 "연간 학교 방문객만 2000명이다, 싱가포르와 중국에서도 찾아온다"고 귀띔했다.
지난 2000년 이 학교 학생 수는 26명까지 줄었다. 이듬해 폐교 결정이 떨어졌다. 학부모·지역사회가 교사들과 손잡고 학교 살리기에 나섰다. 곧 입소문이 났다. 자녀를 이 학교에 보내기 위해 신도시의 아파트를 팔고, 이곳 반지하방을 얻은 학부모들도 있었다. 고 교감은 "이곳 집값은 분당 아파트와 비슷하다"고 했다. 이 학교의 성공담은 전국으로 퍼졌다. 남한산초에서 핀 학교 개혁 운동은 이후 혁신학교라는 결실을 낳았다.
이정씨와 함께 교장실을 찾았다. '교육상담실 이야기마을'이라는 팻말이 붙은 이곳에는 각종 어린이서적이 가득했다. 학생들은 제집 드나들듯 거리낌 없이 이곳 문을 열어젖혔다. 남한산초 살리기 주역 중 한 명인 김영주 교장은 이정씨를 보자, 반갑게 인사하며 안부를 물었다. 이정씨는 "대학에 안 가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고 있다"고 답하자, 김 교장은 "멋지게 잘 살고 있네"라고 껄껄 웃었다.
"'학원 뺑뺑이'를 안 해도 되니, 정말 좋았다"
이정씨는 초등학교 3학년이던 2000년 남한산초로 전학 왔다. 부모님은 그에게 "산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학교가 있는데, 가볼래?"라고 했고, 이정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씨는 "도시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 개구쟁이였는데, 자주 혼나고 손바닥도 많이 맞았다"면서 "그때는 학교 가는 게 즐겁지 않았다, 꾀병을 자주 부렸다"고 말했다.
남한산초 교사들은 학교를 바꾸기 위해 주번, 상장, 벌점, 조회, 시험 등을 없앴다. 체험이 가능한 수업을 위해 40분짜리 수업을 묶어 80분의 블록수업을 꾸렸다. 대신 쉬는 시간은 30분으로 늘었다. 이정씨에게 "수업이 힘들지 않았느냐"고 묻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가만히 앉아서 수업만 듣는다면, 어른조차 1시간을 버티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틀에 박힌 수업이 아니었다. 선생님들은 어떻게 우리가 수업을 잘 이해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학생이 책상에 가만히 앉아있는 게 아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활동적인 수업이었다. 필요하면 야외수업도 했다. 힘들어 하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이런 수업을 통해 수업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쉬는 시간이 길어 좋았을 것 같다."종소리가 들리면, 모든 학생이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30분 동안 신나게 놀았다. 점심시간은 1시간 30분이었다. 우리들은 뒷산을 뛰어다니거나 냇가에서 물장구를 쳤다. 등굣길 배차 간격이 긴 통학버스를 놓치면, 40~50분 산길을 걸어 등교했다. 그만큼 학교에서의 모든 생활이 신나고 좋았다. 특히 도시에서 온 친구들은 '학원 뺑뺑이'를 안 해도 되니 정말 좋아했다."
-선생님들은 어땠나. "학교를 바꿔보겠다고 온 선생님들이었다. 많은 노력을 하셨다. 아이들 놀이조차 허투루 생각하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협동심을 기를 수 있고 남녀 학생 모두 참여할 수 있는 놀이를 연구하고 가르쳐줬다. 항상 학교 주변을 돌아다니시는 정연탁 교장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앵두 한 움큼 따주시는 편안한 분이었다."
- 남한산초에서 혼난 적은 없나."없었다. 선생님 입장에서 매를 들고 공포심을 조장하면, 학생들은 시키는 대로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선생님은 독후감을 써오는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저도 선생님과 같이 놀고 싶어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썼다. 학생들이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것을 스스로 하도록 만들었다."
이정씨는 하루 중 첫 수업시간이 가장 좋았다고 회상했다. "첫 수업 20분 동안 학교 뒷산에서 뛰어놀았다, 눈 감고 산길 걷기, 나무와 이야기하기, 맨발로 눈 밟기 등을 하면서 사계절을 보냈다"면서 "그때의 경험들은 웃으면서 학교를 다닐 수 있게 해줬고,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전교생이 모여 학교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다모임 활동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혁신학교는 방황하는 비행청소년을 품어줬다"
이정씨는 2004년 2월 남한산초를 졸업한 뒤 대안학교인 성남의 이우학교에 들어갔다. 이우학교는 현재 혁신학교로 지정된 곳이다. 그는 "중고등학교 중에서도 남한산초와 비슷한 학교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선택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정씨는 여러 이유로 방황했다. 이른바 비행청소년이었다.
그는 선생님한테 "왜 영어를 배워야 하는지 모르겠다, 영어 수업 시간에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겠다"고 했다. "다른 학교였으면 선생님한테 맞았을 텐데, 학교 선생님은 '좋은 점수를 보장해줄 수 없지만, 그렇게 하라'고 했다"면서 "학교는 저 같은 아이들을 거치적거린다며 내치지 않았고 오히려 품어줬다, 참 고마운 일"이라고 말했다.
- 2010년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많이 걱정했을 것 같다. "고2 때까지 부모님은 대학 진학에 대한 얘기를 안 했다. 고3 때 대학 진학을 권유했다. '대학을 한 번이라도 경험을 해보고, 대학을 다닐지 안 다닐지 생각해보라'고 하셨다. 하지만 단순히 경험하러 수백만 원의 학비를 내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학이 필요하다면, 내가 원할 때 가고 싶었다. 결국 부모님은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네 삶의 흐름을 네가 가꿔보라'라고 하셨다."
이정씨는 이후 1년간 자연에서의 삶을 경험하기 위해 강원도 영월·철원군에서 보냈다. 시골에서 물고기를 잡은 뒤 내다팔아 생활비를 벌었고, 서울에서 단편영화를 찍거나 퍼포먼스 배우를 하면서 지내기도 했다. 2012년 서울에서 마을 만들기에 나선 청년들을 만나면서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
2013년 봄 다시 강원도 영월군으로 내려갔다. 지역 주민, 귀농한 사람들과 함께 마을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폐교를 활용해 마을 미술관·사랑방·공방 등을 꾸렸다. 2014년에는 강화도에서 마을 만들기 활동을 했다. 청년기획자네트워크에 참여해 게스트 하우스를 짓고, 상인들과 함께 젬베를 배우고 간판을 만드는 전통시장 활성화에도 나섰다. 특히 축제와 옥상캠핑장 만들기에 참여했다."
- 보통 사람들 눈에는 안정적이지 못한 삶을 사는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삶의 궤적을 좇는 게 안정적인 삶인지 반문하고 싶다. 대학 4년을 다니면서 수천만 원의 학비를 내고 어렵게 취업한다. 좋은 직장은 많지 않다. 대부분은 일에 얽매여 자기 시간을 쓰지 못하고 산다. 결혼식, 사교육에 많은 돈을 들이고 서울에 집을 사기 위해 평생 일해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
- 그렇다면, 이정씨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나?"행복하다. 처음엔 저도 외로웠고, 지금도 가끔 불안할 때가 있다. 하지만 주변에 비슷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남들보다 더 좋은 스펙을 쌓고, 더 벌고,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닌, 연대를 지향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니 불안하지 않다."
- 혁신학교의 경험이 이런 삶을 사는 데 영향을 미쳤나."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처음엔 혁신학교에서 말하는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가치가 미웠다. 사람들이 왜 나한테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우나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혁신학교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적응하지 못하고 많이 망가졌을 것 같다. 특히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힘들었을 것 같다."
* 오마이뉴스 창간 15주년 기획 : 행복한 학교 [①-2 남한산초] 무허가 사설 강습소, 혁신학교의 시작이었다 [② 선사고] 졸업식장에 조폭이...학교가 '완전' 뒤집어졌다 [③ 조현초] 산만한 학생에게 "약 먹이세요"... 서울과 이곳 학교는 달랐다[④ 부명초] 위장전입까지 하며 기피하던 학교, 그 놀라운 변신 [⑤ 삼각산고] '잡스런 빵' 없앴더니, 학교에 '롯데월드' 생겼다 [⑥ 동화중] 욕하며 대들어 뼈가 녹을 정도.. 이런 학교가 변했다, 행복하게 [⑦ 오산혁신교육지구] 일진 학생들에게 토론을 가르쳤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