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각 시절(時節)마다 해먹는 음식이 여러 가지다. 예를 들면 음력 정월에는 떡국, 식혜, 수정과를, 대보름에는 오곡밥과 나물을 먹는다. 3, 4월에는 화전과 미나리강회를, 7월에는 삼계탕, 8월 추석에는 송편, 호박떡을 해먹고 10월에는 김장김치를 담근다. 동지에는 팥죽을 쑤어 먹고, 섣달에는 동치미, 호박범벅, 조청 등을 해먹는다.
과거에는 음식과 함께 술 또한 세시풍속에 따라 매우 다양했다. 설날에 마시는 술을 '세주(歲酒)'라고 하는데, 세주를 마시면 괴질을 물리치고 일 년 중 사기(邪氣)를 없애 준다고 한다. 세주에는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의 도소주(屠蘇酒)가 많이 쓰였다. 도소주에 관해 '대황, 길경, 오두거피 등 약재를 붉은 주머니에 싸서 우물 속에 넣었다가 정월 초하루 새벽에 꺼내 술을 넣어 잠깐 끓인 것을 동쪽으로 향하여 마신다'는 동의보감 기록이 있다.
이렇게까지 많은 품을 들여 술을 빚었던 것을 보며 '정성을 몹시 들이면 술맛도 좋겠지' 정도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약재에서 우러나는 자양강장 효과 뿐 아니라, 음중음(陰中陰)인 겨울을 지나 봄을 원초적인 모습 그대로 맞아야 하는 때, 새벽 시간은 그야말로 절묘한 기운이 작용하는 때다. 때와 방향을 가려 빚는 술, 우리 술에는 음양오행을 비롯한 모든 동양 사상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외에도 정월 대보름에는 "귀밝이술로 용수술을 마신다"는 기록이 있는데, 용수에 맑게 고인 술 즉, 청주를 마신다는 뜻이다. 정·이월이 다가고 삼월이 되면 두견주, 도화주, 송순주 등 봄 향기 그윽한 술을 빚어 마셨다. 오월 단오에 창포주를, 팔월 추석에는 신도주(新稻酒)라는 햅쌀로 빚은 술을 마셨다. 구월 중양절에는 '황금주'라고 불리는 '국화주'를 빚어 마셨는데, 이이(李珥)의 '서리 속 국화를 사랑하기에(爲愛霜中菊), 노란 잎 따서 술잔에 가득 띄웠네(金英摘滿觴)'로 시작하는 詩는 읽기만 해도 입 안 가득 향기롭다.
이렇듯 자연의 흐름에 따르며 음식과 술을 즐기던 풍요로운 문화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곧 설을 앞두고 있지만 명절 선물 목록에는 안타깝게도 서양 와인이 주를 이루고 있다. 술은 그 민족의 역사이고 문화인데, 우리 아이들의 DNA조차 바뀌는 것이 아닐까 염려스럽기도 하다. 알고 보면 술 빚는 일은 김치 담기보다도 쉽다. 선뜻 마음 한 자락 내어 올해부터는 내가 빚은 내 집안 술로 명절과 시절을 지내보자.
덧붙이는 글 | 설 명절 선물에 어김없이 수입 와인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조상님께 올리는 차례와 제사 상에 일본 술 주조방식으로 만들어진 술을 올리고 있습니다. 대형 주류회사의 상술도 문제이지만 제대로 전통 술을 만나지 못한 탓도 있습니다. 앞으로는 제대로 된 우리 전통 술로 뜻 깊은 자리를 채워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