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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16일, 이스라엘 <채널 10>의 앵커 슐로미 엘다르는 생방송 도중 자신의 개인 핸드폰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걸어온 상대는 팔레스타인 산부인과 의사 이젤딘 아부엘아이시였다. 전화 건너편에서 이젤딘은 울부짖으며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들이 우리 집을 폭격했어요. 내 딸들을 죽였어요. 우리가 뭘 어쨌길래 이러는 거죠?"

이스라엘의 무차별적이고 잔인한 가자 지구 학살이 시작되고 며칠 지난 후의 일이었다. 이 폭격으로 이젤딘은 사랑하는 세 딸과 조카딸을 잃었다. 방송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 한 가장의 슬픔과 절규는 많은 수의 지각 있는 이스라엘인들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방송 영상은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로 확산됐고, 방송이 나가고 이틀 후 휴전이 선포됐다.

울부짖던 아버지 이젤딘 아부엘아이시의 <그러나 증오하지 않습니다>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시 방송을 접한 사람들의 도움으로 이젤딘은 또 다른 부상당한 딸들과 조카딸을 신속히 이스라엘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제때 치료받은 아이들은 다행히도 무사히 살아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아이들의 상처는 결코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폭격이 지나간 후, 분노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피로 응징해야 한다며 이젤딘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이스라엘인을 증오하지 않나요?" 이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이스라엘인을 증오해야 하나요?" 그는 생각했다. 과연 누구를 증오해야 한단 말인가. 함께 일하는 의사, 간호사? 아이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애쓴 사람들? 어린 시절 내게 도움을 주었던 이스라엘인들? 내 집을 폭격한 군인들? 그는 증오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증오는 아무 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증오하지 않습니다> 표지
<그러나 증오하지 않습니다> 표지 ⓒ 낫은산
응징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가 이스라엘인에게 보복한들 내 딸들이 살아날까? 증오는 병이다. 증오라는 병은 치유와 평화를 가로막는다.

이젤딘 아부엘아이시는 가자 지구의 자발리아 난민 캠프에서 나고 자랐다.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곳, 세상에서 가장 큰 집단 수용소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길이가 40킬로미터인 좁고 긴 땅 가자 지구의 150만 명 주민 대부분은 팔레스타인 난민이고, 그 가운데 80퍼센트가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이젤딘은 가자 지구를 이렇게 표현했다.

지평선에는 이스라엘의 무장 항공기가 떠 있고, 머리 위로는 헬기가 날아다니고, 지하에는 이집트로 통하는 숨 막히는 밀수 터널이 뚫려 있고, 길에는 유엔의 구호 트럭이 다니고, 건물이 부서져 있고, 기반 시설은 훼손되어 있는 곳. 넉넉함이라고는 없다. 식용유도, 신선한 과일도, 물도 언제나 모자란다.

먹고 살 수단도, 정상적인 생활도 보장되지 않은 이 곳에서 사람들은 자꾸 극단적으로 변해갔다. 복수심을 갖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울 정도로 처절한 상황. 생존권을 박탈당하고, 무시받고, 밀려나고, 고난받았던 사람들은 점차 미래를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의 목숨까지 쉽게 버리게 되었다. 살아 봤자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보니 누군가가 자살 폭탄이 되려 하면 주변 사람들은 그를 영웅으로 치켜세우기까지 된 것이다.

이젤딘 역시 삶이 증오스러울 때도 있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관절염을 앓으면서도 먹고 살기 위해 새벽 3시에 일어나야만 하는 상황이 야속하고 지긋지긋했다. 그럼에도 어린 이젤딘은 증오심에 빠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상황을 이겨 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보다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강한 사람이 되라던 어머니의 훈육 덕분이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며 끝까지 그를 독려한 선생님 아흐메드 알 할라비 덕분이었다.

맏아들로서 열심히 돈을 벌면서도 이젤딘은 손에서 공부를 놓지 않았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꾸준히 노력해 의사가 되었다. 의사가 되기 위해 그는 이집트, 런던, 이스라엘, 이탈리아, 벨기에 등에서 공부했고, 마지막으로는 하버드 대에서 공중 보건 석사를 마쳤다. 이후 그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오가며 일하는 드문 사람 중 한 명이 됐다.

일하고 공부하며 그가 자연스레 알게 된 것이 있었다. 대다수의 이스라엘인은 팔레스타인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린 시절 돈을 벌기 위해 이스라엘에 갔을 때 그는 친절한 이스라엘인들을 보며 놀라곤 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는 팔레스타인 아이를 친절히 대해주었고, 나중에는 선물까지 줬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의사가 되어 감사 인사를 전하러 갔을 때도 그들은 아들이 돌아온 양 이젤딘를 환대해 주었다. 이젤딘은 생각했다. 이런 이들을 이스라엘인이라고 무조건 증오할 수는 없다고. 그는 말했다.

증오에 쏟아 붓는 에너지, 공존 위해 써야

갈등으로 우리를 늘 갈라놓기만 해온 지난 10년은 참으로 실망스러운 시기였다. 우리 지도자들은 걸핏하면 다투고 약속을 깨며, 언제나 말썽을 일으키며 막무가내로 행동한다. 이에 반해, 내가 만나는 가자와 이스라엘의 환자나 의사나 이웃이나 친구는 지도자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내가 그들 가족을 걱정하듯 내 가족을 걱정한다. 우리는 대립하며 살아야만 했던 지난 세월과 불확실한 미래를 한탄했다.

단순히 이스라엘인이 문제가 아니라 싸움을 이어가는 데만 혈안이 된 지도자들의 문제라는 것이다.

60년이 넘게 다툼을 해오고 있는 두 나라를 보며 이젤딘은 분노를 내세우기 보다는 문제를 풀려는 의지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잘잘못을 따지다 보면 입만 아플 뿐이라는 것이다. 합심해서 현실 문제를 풀 생각은 하지 않고, 서로 반목하고 증오하기만 한다면 싸움은 영원히 계속 되기만 할 것이다. 정작 대다수의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인은 싸움을 원치 않는데도 말이다.

이렇듯 그는 가자 지구에서는 보기 드물게 평화와 공존을 외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런 이젤딘은 2009년 사랑하는 딸들을 잃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념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의 지난 경험과 그를 도왔던 사람들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그가 재차 이스라엘인을 증오하지 않는다고 말한 이유이다. 대신, 그는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자고, 한쪽 편만 들지 말자고, 사실을 똑바로 보자고 말했다. 문제를 해결하자고, 평화롭게 공존하자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진리의 빛을 찾기 위해서는 서로 대화하고 존중하며 서로의 말을 들어 주어야 한다. 에너지를 증오하는 데 쏟을 것이 아니라, 눈을 열어 진실이 과연 무엇인지 보는 데 써야 한다. 진실을 볼 수 있으면 우리는 나란히 공존하며 살 수 있다.

물론 그의 이런 이야기를 듣고 순진한 희망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젤딘은 어쩌면 그들이 옳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저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사람일 뿐이니까.

"나의 딸들은 이 지역에서 누군가가 치러야 할 마지막 희생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이젤딘 아부엘아이시의 진실된 외침을 새겨 들어야 할 곳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뿐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조그마한 땅 덩어리 안에서도 헤아릴 수 없는 다툼과 반목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름 붙이기 나름인 각종 분쟁들. 분쟁을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분쟁은 개인적으로도 벌어진다. 나 역시 친구의 사소한 말 한마디를 꼬투리로 잡고 몇 개월째 마음 속 분쟁을 치르고 있다. 친구를 미워할 것인가, 말 것인가. 내가 이러는 줄 까맣게 모르고 있는 친구의 마음은 평온할 것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려는 내 속만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을 뿐.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대화일 테다. 누군가를 미워할지, 말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덧붙이는 글 | <그러나 증오하지 않습니다>(이젤딘 아부엘아이시/낮은산/2013년 03월 27일/ 1만 3000원)



그러나 증오하지 않습니다 - 세 딸을 폭격으로 잃은 팔레스타인 의사 이야기

이젤딘 아부엘아이시 지음, 이한중 옮김, 낮은산(2013)


#가자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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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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