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가 2월 22일로 창간 15주년을 맞이합니다. 돌이켜보면, 오마이뉴스가 헤쳐온 길이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다사다난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오마이뉴스 15년의 역사를 100대 기사와 사건으로 풀어 5회에 걸쳐 독자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
[41] 국민 모금으로 만든 친일인명사전 (2004. 1. 8)
지금이라도 일제강점기 친일행위의 진상을 규명하자는 호소를 야당은 대놓고 묵살했고, 행정자치부와 국무조정실 등 정부 부처들은 서로 책임지지 않으려고 떠넘기기에 급급했다.
결정적으로 2003년 12월 29일 국회 예결위 예산조정소위(위원장 박종근 한나라당 의원)가 예산조정과정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자료 조사에 책정된 예산 5억 원 전액을 삭감해 사업 자체가 좌초돼 버렸다. 이런 분위기에서 "차라리 친일인명사전 발간비용을 우리가 모으자"는 고등학교 철학교사 김호롱씨의 익명 댓글(1월7일)은 광야를 불사르는 한알의 불씨가 되었다. (
http://omn.kr/bnre)
이튿날부터 시작된 캠페인으로 모인 성금은 19일 5억 원을 돌파해 7억 원의 편찬자금으로 결실을 거두었다. 그날 저녁 7시 서울 명동의 옛 반민특위 표석 앞에서는 작은 성공을 축하하는 누리꾼들의 '번개'가 열렸다.
2009년 11월 8일 완간된 친일인명사전(총3권, 3000여 쪽)은 친일인사 4389명의 기록을 담았다.
[42] '탄핵 반대' 촛불시위 현장 중계 (2004. 3. 20)
3월 12일 오후 11시 56분 국회에서 193 대 2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의결돼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됐다. 탄핵을 강행한 정치세력을 심판하자는 민심은 촛불시위로 재점화됐고, 3월 20일의 '탄핵무효 100만인 대회'에서 절정을 이뤘다.(
http://omn.kr/bnrk)
서울 광화문에만 22만 명(주최측 추산, 경찰추산 13만 명)이 모였고, 오마이TV를 통해 현장 생중계를 시청한 사람도 35만 명에 이르렀다. 이날 오마이뉴스에 만들어진 100만인대회 특별게시판에는 하루 동안 약 8만5천건의 독자의견이 올라와 창간 이래 단일기사 최대 댓글 건수를 기록했다.
[43] 오마이뉴스 인터내셔널 창간 (2004. 5. 27)영문판 오마이뉴스 인터내셔널은 5월 27일 창간했다. 그해 3월 인터내셔널의 시민기자로 가입한 론다 하우벤 기자는 2006년 10월 오마이뉴스 기자로는 처음으로 유엔의 출입기자로 등록했고, 2008년 12월 4일에는 유엔특파원협회 인쇄-전자매체 보도부문 은상을 받았다. 2006년 8월 28일에는 오마이뉴스 재팬이 일본에서 창간됐지만, 한국과 다른 인터넷 환경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2009년 4월 24일 문을 닫았다.
[44] 시민기자 해외통신원 1기 발족 (2004. 6. 1)해외 이민자나 유학생들에게 오마이뉴스는 고국과 소통할 수 있는 좋은 창구였다. 세계 각지의 한국인들이 정치, 문화, 사는이야기를 보내왔다. 그해 6월, 오마이뉴스는 정식 특파원제 대신 시민기자들로 해외통신원을 발족했다. 미국의 강인규와 조명신, 프랑스의 박영신, 뉴질랜드의 정철용, 중국의 김대오 시민기자가 1기 해외통신원으로 위촉됐다. 해외통신원이 공동기획한 '세계의 공영방송을 가다'는 독자는 물론, 국내 기자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또 2005~2006년 황우석 사태, 2008년 광우병 사태 당시에는 해외 전문가 인터뷰 등으로 특파원 못지 않은 활약을 펼쳤다.
[45] 유재순 "감옥갈 각오로 전여옥 '표절' 밝혀낼 것" (2004. 7. 1)재일 르포작가 유재순씨의 인터뷰 기사(
http://omn.kr/bjye)가 나간 날 저녁 국회 기자실은 발칵 뒤집어졌다. 한나라당 전여옥 대변인이 표절 피해자 유재순씨의 인터뷰가 나가자마자 기자실을 찾아와 "비방 목적의 허위보도를 한 오마이뉴스를 고소하겠다. 보도를 인용하는 언론사에도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엄포를 넣은 것이다.
두 달 뒤 5억 손해배상 소송을 넣은 뒤에는 "끝까지 가겠다. 10여 명의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100% 승소를 확인하고 낸 것"이라고 자신감을 표시했다. 2012년 5월 18일 대법원이 "전씨가 유씨의 소재와 아이디어 등을 무단으로 이용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표절 혐의를 사실로 확정하는 데는 7년 11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46] 한나라당 연극 '환생경제' 파문 (2004. 8. 28)
전남 곡성에서 열린 연찬회에서 한나라당 의원 24명이 질펀한 연극판을 벌였다.(
http://omn.kr/bjyk)
아들 '경제'가 죽은 장례식장에서 아버지 노가리(주호영 의원)가 허구한 날 술주정이나 해대며 이사갈 궁리만 하는 반면, 어머니 '근애(이혜훈 의원)'는 이사를 반대하며 경제의 회생을 바라면서 시종일관 아들의 죽음에 슬피 흐느껴 운다는 줄거리였다.
박근혜 대표는 "프로를 방불케 하는 연기였다"고 호평했지만, 오마이뉴스가 공연 실황을 전부 녹화해 공개하자 여론의 반응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정치권의 막말 파동이 생길 때마다 "환생경제를 잊었냐?"는 부메랑이 날아오는 것도 한나라당에게는 두고두고 부담이 됐다.
[47] 김용옥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 결정을 통박함' (2004. 10. 26)10월 21일 헌법재판소의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 결정으로 정치권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5일 뒤에 실린 도올 김용옥의 기고문 '신행정수도 특별법 위헌결정을 통박함'은 원고지 120장 2만자에 달하는 장문이었다. 글을 완독하지 못하는 독자를 위해 요약본을 따로 만들어야 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분량이었다. (
http://omn.kr/bg3s http://omn.kr/bg3t)
그럼에도 도올의 글과 관련 기사는 네티즌들의 '자발적 원고료'가 3000만 원 넘게 쌓일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다. 도올은 "원고료 성금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데 종잣돈으로 사용되도록 해달라"며 원고료 전액을 오마이뉴스에 기탁했다.'좋은기사 원고료 주기' 시스템은 2006년 10월 21일 발명특허를 받았다.
[48] 이렇게 힘들게 사는 거, 당신들은 아는가? (2004. 11. 13)'가스는 5월부터 끊겨 버너로 밥하고, 전화는 발신 정지, 물건 살 돈이 없어 썰렁한 가게...' 인천의 속옷가게 주인 이은화 시민기자가 전한 불황의 모습은 적나라했다.(
http://omn.kr/bmpj) 하지만 '넘어지면 두 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씩씩하게 닦고 다시 또 일어나리라!'는 맺음말에 독자들은 박수를 보냈고 십시일반 정성을 모아 500만 원이 넘는 좋은 기사 원고료를 전달했다. 명사가 아니라도 좋은 글은 보답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 기사였다.
[49] 창간 5주년 기념식 (2005. 2. 22)창간 5주년을 맞은 오마이뉴스는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600여 명의 내빈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기념식을 열었다.(
http://omn.kr/bntq)
노무현 대통령이 보낸 영상 축하 메시지와 함께 정동영 통일부 장관,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한나라당 김덕룡 원내대표와 김용갑 홍준표 의원, 주요 언론사 사장들이 행사장을 찾았다. 영화팬들에게는 배우 이은주씨의 갑작스러운 자살로도 기억에 많이 남는 날이었다.
[50] 삼일절에 세조각 난 '박정희의 '충의사' 현판' (2005. 3. 1)
오마이뉴스 심규상 대전충남팀장은 2004년 1월부터 충남 예산 윤봉길 사당의 박정희 대통령 현판을 보도해 왔다. 그러나 2005년 삼일절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양수철씨가 현판을 철거하려고 할 때는 현장(예산)까지 갈 형편이 못 됐다.
문득 예산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는 이정희씨가 떠올랐고, 심 팀장의 토스를 받은 이씨가 당일 밤 11시까지 모든 상황을 취재하게 된다(
http://omn.kr/bmpk). 충의사 현판 철거 사건은 지금도 상근기자와 시민기자의 훌륭한 협업 사례로 사내에서 회자된다.
[51] 아버지 살해한 여중생의 일기장 박상규 기자 (2005. 4. 19)4월 15일 강원도 강릉에서 40대 아버지를 목졸라 살해한 15살 여중생의 사연은 초창기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오마이뉴스의 입사 2년차 박상규 기자가 이양의 남은 가족들을 수소문해 일기장에 담긴 사연을 소개하기 전까지는(
http://omn.kr/bl20).
상습적인 학대와 폭력에 시달리는 이양의 사연이 기사화되자 누리꾼들의 구명운동이 시작됐고, 검찰은 5월 9일 불구속 기소하기로 방침을 바꿨다.
[52] 서명숙 편집국장 취임 (2005. 5. 1~2006. 7. 31)시사저널 편집국장 출신의 서명숙씨는 오마이뉴스 첫 여성 편집국장이자 두 번째로 영입된 '외부인' 편집국장이었다(
http://omn.kr/bnuk). 서 국장의 발탁은 한 달 전 선출된 한겨레 권태선 편집국장의 등장과 함께 남성 위주 기자사회 문화의 변화를 보여주는 징후로도 해석됐다.
1년 3개월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편집국을 지휘한 그는 남성과 다른 여성의 감수성으로 사회를 들여다보고자 노력했다. 특히 여성들의 난자 매매로 촉발된 황우석 줄기세포 조작 사건은 서 국장의 안목이 없었다면 오마이뉴스가 발 빠르게 나서기 쉽지 않은 취재였다.
[53] 세계시민기자포럼 2005 (2005. 6. 23)
세계 25개국의 외국인 시민기자 100여 명과 한국인 시민 기자 150여 명이 참가한 제1회 세계시민기자포럼은 창간 5주년을 기념하는 이벤트였다(
http://omn.kr/bnun).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60여 명의 통역 자원봉사자들이 도움을 주는 가운데 한국의 시민기자들과 세계의 시민기자들이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됐다.
[54] 제1회 시민기자 전국 투어 (2005. 7. 25)오마이뉴스 편집국과 시민기자들간의 소통을 위한 전국 투어가 7월 25일 광주를 시작으로 부산(7월 29일), 천안(8월 17일), 대구(9월 7일) 등지에서 열렸다. 지금까지 전국 투어는 격년제로 계속 열리고 있다.
[55] 언론중재법 개정으로 언론중재 대상에 포함 (2005. 7. 28)인터넷신문 초창기에만 해도 언론보도 내용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하면 곧바로 소송으로 가고, 양측 모두 판결이 나올 때까지 1년 이상 기다리는 경우가 많았다. 2005년 1월 언론중재법이 개정에 따라 인터넷신문도 중재대상에 포함되게 됐다. 첫 해 오마이뉴스에는 5건의 조정신청이 들어왔다.
[56] 창사 후 첫 단체협약 체결 (2005. 8. 29)오마이뉴스 노사의 첫 임금 및 단체협약에는 노사 동수의 인사위원회 구성과 매달 10만 원씩 초과근무수당 지급, 연차휴가 확대 등의 내용이 담겨 있지만, 가장 획기적인 제도는 안식휴가의 도입이었다.
근속 5년 이상 1개월, 10년 이상 2개월, 15년 이상 3개월, 20년 이상의 직원에 대한 6개월의 안식휴가는 지금까지도 언론계에 유례가 없는 제도로 평가되고 있다. 안식휴가 제도를 받아들이기로 한 사측의 결정을 놓고 당대에는 "회사가 10년 이상 지속할 것을 예상 못한 것 아니냐"는 우스개도 나왔다.
[57] 주성영 의원 국감 폭탄주 추태 논란 (2005. 9. 23)오마이뉴스가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이 국정감사가 끝난 뒤 술자리에서 여사장에게 성적 폭언을 했다는 보도에 주 의원은 강력 반발했다(
http://bit.ly/KlD48).
그러나 문제의 여사장은 검찰에서는 "주 의원으로부터 욕설을 들은 것은 사실이지만 주 의원보다 더 심한 욕설을 한 사람은 검찰 간부"라고 말했다. 오마이뉴스의 첫 보도가 국회의원들과 검사들의 부적절한 술자리라는 핵심을 놓쳤다는 지적도 가슴 아픈 부분이었다.
오마이뉴스와 주 의원의 상호 소송전으로 비화됐던 사태는 첫 기사를 쓴 기자가 형사소송에서는 벌금 800만 원, 민사소송에서는 오마이뉴스가 주 의원에게 3000만 원, 주 의원이 오마이뉴스에 500만 원을 각각 지급하라는 법원 판결로 일단락됐다.
[58] 노충국 사건 연속 보도 (2005. 10. 24)
2005년 전역 보름 만에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석달여 투병 끝에 사망한 노충국씨의 사연이 오마이뉴스 보도로 세상에 알려지면서 군 의료체계 개선 문제가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http://omn.kr/bjmy).
군의관의 오진과 진료기록 조작까지 드러나면서 윤광웅 국방장관이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머리를 숙여야 했다. 그러나 보도 이후에도 사병들의 진료접근권이 제한받는 환경은 피부에 와닿을 만큼 개선되지는 못했다.
[59] 현대판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 (2005.10.31)김혜원 시민기자의 기사는 성남에 사는 한 '야쿠르트 아줌마'의 제보로 시작됐다. 유방암에 걸린 필리핀인 아내를 치료할 길이 없어 필리핀으로 보낸 뒤, 두 아이를 데리고 어렵게 사는 농사꾼이 있다는 얘기였다(
http://omn.kr/bo2y).
김씨의 기사가 나온 후 이들 가족을 돕고 싶다는 독자들의 성원과 격려가 쇄도했고, 차곡차곡 쌓인 '좋은기사 원고료'는 1700만 원을 넘었다. 이 돈으로 필리핀인 아내 아멜리아씨는 돌아와 항암 치료를 받고 가족과 재결합했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이듬해 남편이 8월경 사망하자 아내는 두 아이를 거둬 필리핀으로 돌아갔다.
[60]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이 마라톤으로 만나다 (2005. 11. 24)
남측 144명, 북측 100명의 마라토너들이 참여하는 평양~남포 통일 마라톤대회가 오마이뉴스 주최로 열렸다(
http://omn.kr/bo4h).
참가자들은 평양 만경대 구역에서 출발해 청춘거리와 광복거리(총 6km)를 거쳐 청년영웅도로를 약 4.5km포 구간을 달린 뒤에 다시 출발지로 돌아오는 총 21km의 하프마라톤 (22km) 코스를 달렸다. 남측 출전자 중에는 영화 <말아톤>의 주인공 배형진씨도 있었다.
그러나 남북의 첫 마라톤 대회는 행사 자체를 탐탁치 못하게 보는 이들의 견제를 받았다.
행사 직후 "마라톤 대회에 통일부가 남북협력기금 중 3000만원을 '몰래' 지원했다"는 보도에 통일부는 "기금지원 목적에 부합한다고 판단해 8051만3000원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통일부 해명이 나오자 한나라당에서는 "친여매체가 북한에서 개최한 마라톤 행사에 정부가 8000만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지원을 하고도 공개적으로 이를 밝히지 않고 있다가 뒤늦게 드러난 것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는 논평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