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은 요즘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있다. 예년보다 낮은 기온이 계속되고 있는 탓이다.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지는 날이 부지기수다. 아침 기온이 영상이었던 날이 거의 전무한 상태다. 그러다 보니 아침 기온이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지만 않아도 제법 견딜 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내일은 또 얼마나 추울지 인터넷 상의 일기예보 창을 수시로 들여다보고 있다.
하지만 일기예보도 날씨만큼이나 변덕스럽다. 어찌된 일인지 당장 내일 아침 기온이 얼마나 떨어질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내일 아침 영하 7도까지 떨어진다는 일기예보를 보고 잠이 들었는데, 다음날 아침 눈을 떠 보니 일기예보 창의 온도계가 영하 11도까지 내려가 있다. 지금은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상태다. 영하 20도로 내려가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날씨가 매서우리만치 춥다 보니 요즘 춘천시 내의 강과 호수는 모두 꽁꽁 얼어붙어 있다. 입춘이 지난 지 오래다. 그런데도 수면 위로 그늘이 지거나 물결이 호수만큼이나 잔잔한 곳은 여전히 두꺼운 얼음으로 뒤덮여 있는 걸 볼 수 있다. 최근에 한낮의 기온이 영상으로 치솟아 오르면서, 일부 얼음이 녹기 시작했다. 하지만 겨우내 얼어붙은 강과 호수를 녹이기엔 여전히 역부족이다. 춘천시 내의 강과 호수가 다 녹아 내리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살아 있는' 강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풍경
강물이 얼어붙어 있을 때, 꼭 한 번 찾아가봐야 할 곳이 있다. '북한강'이다. 북한강은 강이 살아 있다는 게 어떤 건지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다. 얼어붙은 강과 그렇지 않은 강은 사뭇 다르다. 요즘은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 돼 버렸지만, 과거 한강이 꽁꽁 얼어붙어 있던 광경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잘 아는 사실이다. 강물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완전히 얼어붙어 있는 강을 보고 있으면, 누구나 자연이 가진 위대한 힘을 느끼게 된다.
그 힘은 인간이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 힘이 인간을 겸허하게 만들었다. 그 힘은 또 그 자체로 인간이 강을 지배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 옛일이 되고 말았다. 한강을 개조하려는 인간이 있어서 그 강이 심하게 파헤쳐진 뒤로, 강물이 얼어붙는 일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일이 되고 말았다. 지금은 어디에 가서 그 옛날 그 강이 가지고 있었던 건강한 힘을 되찾아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얼어붙지 않는 강은 더 이상 살아 있는 강이 아니다. 얼어붙는 일이 없는 강은 사실 죽은 강이나 마찬가지다. 살아 있는 강은 때가 되면 어김없이 얼어붙기 마련이다. 순수하고 맑은 강은 겨울이 되면 마치 동면이라도 하듯이 꽁꽁 얼어붙음으로써 스스로 살아 있음을 입증한다. 얼어붙은 한강은 뉴스가 돼도, 얼어붙은 북한강이 뉴스가 될 수 없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죽은 줄 알았던 강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됐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한강이 이쪽에서 저쪽 강변까지 완전히 얼어붙었다는 뉴스를 보았던 것이 언제 적 일인지 알 수 없다. 한강이 살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그 강이 완전히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점점 더 짙어지고 있다. 세상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변해 버린 것일까? 죽어가고 있는 강은 '한강'뿐만이 아니다. 강들이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이런 때, 우리 곁에 북한강이 남아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살아 있는 강을 찾아보기 힘든 요즘,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온몸으로 입증해 보이고 있는 북한강이 있어 더 큰 위안을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얼어붙은 강을 그리워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다. 자연이 살아 있음으로 해서 인간이 살아 있는 것이다. 인간은 가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얼어붙은 강을 찾아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북한강은 그 자체로 매우 아름다운 강이다. 평야를 가로지르는 강과 달리, 북한강은 대부분 높고 가파른 산과 절벽 사이를 가로지른다. 산 밑을 낮게 흐르는 강은 그 위로 검은 산그늘이 드리워져 있어 수면 아래 물 속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감히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그곳에 위엄과 기품이 서려 있는 건 당연하다. 그 풍경이 왕이 앉는 어좌 뒤에 조용히 서 있는 '일월오봉도'를 연상 시킨다.
그런 북한강이 한겨울이 되면 사정없이 얼어붙는다. 얼어붙은 강 역시 산 밑을 잔잔히 흘러가는 강만큼이나 아름답다. 강물이 온통 하얗게 얼어붙은 채 산과 산 사이를 꽉 메우고 있는데, 그 풍경이 마치 산과 산 사이에 하얀 대리석 바닥을 깔아 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 위로 사람들이 길을 만든다. 누구는 그 위에 아예 자리를 깔고 앉아 낚시 삼매경에 빠진다. 강이 얼어붙는 순간, 그 위에 새로운 세상이 들어선다. 살아 있는 강이 아닌 곳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때때로 그 강에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강물이 통째로 얼어붙느라 심하게 앓는 소리다. 그 소리가 어떤 때에는 인간이 고된 노동에 시달린 끝에 석고처럼 굳어버린 등골을 일으켜 세우려고 애쓰는 소리처럼 들린다. 고통이 느껴지는 소리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강을 돌이나 쇳덩이 같은 무생물처럼 다루는 데 반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강이 끙끙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적어도 강은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생명체라는 인식이 강해지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치고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이 없다.
살다 보면, 간혹 산다는 게 무언지 분명하지 않을 때가 있다. 복잡한 세상일 때문에 머릿속이 전기 코일처럼 뜨거울 때도 있다. 그럴 때 북한강에 나가 서면, 그렇게 복잡하고 뜨겁던 머릿속이 갈라지고 부서져 날이 선 얼음조각처럼 차가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단순하고 분명해진다. 살아 있는 강은 '살아 있다'는 게 무언지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에 속한다. 하얗게 얼어붙은 북한강이 오늘따라 유난히 시리고 아픈 풍경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