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11 년 여행길에서, 독일, 루터슈타트비텐베르크에서의 어느 집 벽면
2011 년 여행길에서, 독일, 루터슈타트비텐베르크에서의 어느 집 벽면 ⓒ 배수경

남자는 연애에 네 번 실패했다. 다섯 번째로 만난 여자에게 남자는 사랑을 느낀다. 같이 있고 싶다. 그런데 아무래도 여자가 곧 자기를 떠날 것 같다. 밤새 뒤척이던 남자는 다음 날 여자를 떠나보낸다. 남자는 여자가 떠나는 모습을 차마 바라보지도 못한다. 여자가 떠난 뒤 남자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후회한다. 뒤늦게 여자를 찾아 뉴욕까지 날아가지만 여자의 집은 비어 있다. 남자는 망설임 끝에 여자에게 전화를 건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여자가 묻는다.
"왜 날 떠나보냈어?"
남자는 한참 후에야 겨우 웅얼거린다.
"어차피 안 될 것 같으니까.. 내가 먼저 망쳐 버린 거야!
- 황상민의 '독립연습' 중에서

공산주의체제의 잔재는 동독 거리의 대부분을 회색빛 건물로 특징지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루터가 종교혁명을 일으켰던 Lutherstadt-wittenberg(루터슈타트비텐베르크)에서의  새벽 산책 중, 저 집 앞에서 그만 저는 탄성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밋밋한 차가운 콘크리트 벽의 집을 나뭇잎과 작은 꽃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낸 주인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서였죠.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동독 시절의 아픔이 여전히 남아 있던 이곳에서 벽을 칠할 멋진 색깔의 페인트도, 으리으리한 창문과 대문도 애당초 구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하지만 오래된 나무로 된 현관과 바람이 불면 심하게 흔들릴 얇은 구식의 유리창만을 가진 저 집의 주인이 만들어 낸 작품은 그 새벽, 그 어떤 세련된 유럽의 고급주택들보다 제 마음을 깊게 울렸습니다.

남들은 같은 상황에서 더 이상을 생각해내지 못했지만, 주인은 자신의 삶을 보다 더 아름답게 가꾸는 일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고, '가진 것이 없으니 어차피 안 될 일'이라는 생각보다는 그가 가진 아주 소소한 것들로도 최고의 것을 이루어낼 줄 알았습니다.

삶의 어느 시점에서 제가 그러했듯, 황상민의 글에서의 청년은 어쩌면 가장 소중한 것을 잊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을. 사랑은 함께 걷는 그 길이 어디에서, 혹은 무엇에 의해서 끝나건 그 끝까지 자신이 가진 온 마음을 다하고 관계를 가꾸어가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인간이 산다는 일은, 사실상 모두가 그러하다는 것을...그리고 아주 많은 경우 "그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가치 있다"는 것을.

좋아하는 한 후배가 어느날, 식탁에 있는 한 장의 냅킨 위에 이렇게 적어주었습니다.

"미래의 불확실함이, 현재의 불성실함의, 핑계가 될 수는 없다"

손을 펴보아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 같은 날엔, 그 새벽의 저 집을 기억해봅니다. 대리석 대신 얇디 얇은 나무판자 문과 비싼 통유리 대신 작은 바람에도 흔들릴 것 같은 창문을 가진 저 집의 주인장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콘크리트 벽 가득을 아름답게 드리운 담쟁이들을. 싸구려 화분이지만 회색과 멋스럽게 조화된 저 빠알간 꽃들을...

그러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됩니다.

"나는 참으로 많은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유럽여행 #행복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