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1년 계획에 없던 중국어 공부를 처음 시작한 후, 이듬해 중국 랴오닝성 진저우시 현지대학교에 입학한 32살 늦깎이 유학생입니다. 올해 7월 졸업을 앞두고, 이후 중국을 더 가까이 느끼고자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중국의 일상생활과 유학에 얽힌 에피소드를 담담하게 풀어나갈 예정입니다... 기자말
춘제(春节)는 중국의 최대 명절이다. 매년 이 시기에 엄청난 인파가 고향을 찾는다. 춘제를 맞아 기차표는 하루에 천만 장 가까이 팔리고 예상 연인원 이동 인구수는 자그마치 37억 명에 달한다. 귀향하는 사람 수를 감당하지 못하니 가짜 기차표까지 횡행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2014년 1월 겨울방학. 귀국하지 않고 하릴없이 기숙사에서 빈둥거렸다. 중국에 있을 때 마음껏 여행하고 경험하라는 엄마의 신조 덕분이었다. 하지만 명절기간이 되자 어쩔 수 없는 적적함이 밀려왔다. 그렇게 춘제를 며칠 앞뒀을 때 한국인 언니가 솔깃한 소식을 전했다. 진저우(锦州) 변두리에 있는 지인 고향집으로 설을 쇠러 같이 가자는 제안이었다. 때땡큐였다!
설날 아침이 밝자 고맙게도 직접 데리러 오셨다. 한 시간 정도를 달려 도심을 완전히 벗어나자 대륙의 농촌이 시야에 펼쳐졌다. 휑함을 넘어선 황량함. 눈과 코를 통해 와 닿았던 중국 시골 정취다. 솔직히 시골하면 으레 떠올려지는 푸근한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느낌은 기우였다. 중국 대접문화는 세계 제일이라는 이야기를 몸소 체험했다. 정말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2박3일 일정에서 단 한 순간도 배가 고프거나 허기졌던 적이 없었다. 배가 불러 헉헉 거려도 음식은 계속 나왔다. 거절해도 권한다. 맛이라도 보란다. 그렇게 먹는 음식 양이 무시 못할 정도다. 난생 처음으로 살이 찌는 소리를 들었다.
"한국 어디서 왔니? 음식은 입에 맞아? 어디 학교 다니니?"마치 기자회견을 방불케 하는 질문 폭탄이 이어졌다. 이방인을 구경하러 주민이 와글와글 모였다. 어디에 있다가 나타났는지 모를 정도다. 이웃집에서 오신 아주머니는 우리를 보자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나를 바꾸어 주신다. 자신의 딸이란다. 연예인이 따로 없다. '무슨 말을 하란 거지?' 당황스러웠지만 몇 마디 인사를 하고 끊었다. 작은 마을에 외국인이 떴으니 재밌는 모양이다. 나도 여기가 신기하긴 매한가지인데.
음식은 남자들이 준비, 여자들은 TV 삼매경
"카이싀쭈오완판바!(이제 저녁 준비하자!)"온 집안 남자들이 팔을 걷어 올렸다. 그들은 주방으로 가 재료 손질을 시작하더니 뚝딱뚝딱 음식들을 내온다. 여자들은 편한 자세로 중국식 온돌 캉(炕)에 앉아 TV를 시청한다. 이내 눈앞에는 돼지갈비, 새우 등 진수성찬이 쏟아진다. 남자들 솜씨라고 믿기 힘들 정도다. 중국에서는 남자들이 음식을 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진다.
어릴 적 명절이 되면 엄마는 며칠씩 음식을 준비했다. 식사 때는 편했을까. 식구들 시중드느라 밥 한술 편히 넘기지 못했다. 어린 마음에도 고생하는 엄마를 보는 게 싫었다. '엄마가 중국남자를 만났으면 명절에 편했을까'란 말도 안 되는 생각에 피식 웃으며 수저를 들었다.
즐겁고 맛난 식사 후 TV 앞에 모두 모였다. 춘제롄환완후이(春节联欢晚会, 춘완)를 시청하기 위해서다. 중국 최대 명절 특집 프로그램이다. 매년 최고의 톱스타가 출연하고 일년 중 시청률이 가장 높다. 그런데 이민호가 TV에서 노래를 부른다.
'응? 중국 명절 프로그램에 이민호라니!' 모두 이민호가 나오자 호들갑을 떨며 좋아한다. 중국에서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와 공통점은 국적밖에 없건만 괜히 어깨가 으쓱거려진다. 한국 연예인이 최초로 춘완에 출연한 순간을 직접 목격한 것에 희열감까지 든다.
춘완 시청이 끝나자 빙 둘러앉아 만두를 빚는다. 이때 아저씨가 동전 두세 개를 올려놓고 만두 속에 넣었다. 동전만두를 먹는 사람은 그 해 재물이 들어온다 했다. 나중에 쪄낸 만두를 먹을 때 은근히 기대했지만 당첨운이 없는 나는 역시나 꽝이었다.
먹을 것은 계속 이어진다. 한국인이 왔다고 그 집 딸내미인 밍양이가 한국 대표음식 떡볶이를 만들었다. 한국 떡볶이와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동전만두를 놓친 헛헛한 마음을 채우기에는 충분했다.
춘제 하이라이트 폭죽! 하지만 무서운 후유증이...
중국은 결혼식, 명절 등 특별한 날에 폭죽을 터트린다. 12시가 되면 전쟁이 난 듯 굉음이 울려 퍼진다. 마당에 나가보니 폭죽 세 상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무려 50만 원 어치라고 한다. 비싼 가격에 입이 떡 벌어졌는데, 싱글벙글 전혀 아까운 표정이 아니다. 열두 시가 다가오자 시계를 보면서 카운트한다.
"우, 쓰, 산, 얼... 이!(5, 4, 3, 2, 1)"여기저기 폭죽이 터지기 시작한다. 시커먼 하늘에 화려한 빛 분수가 퍼진다. 연신 탄성이 나왔다. 머리 위 불빛은 물론 다른 집 폭죽을 감상하는 재미까지도 쏠쏠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바로 밑에 서있으니 불똥들이 쏟아진다. 뜨거워 이리저리 춤을 추고 있는데 옆집에서 고함이 들려온다.
"쟈오훠러!(불이야!)"폭죽의 위력은 무시무시했다. 불똥이 앞마당에 세워둔 옥수수 짚단에 떨어져 불이 붙은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물동이를 이고 뛰쳐나왔다. 무슨 만화 속 장면 같다. 우리도 빠질 순 없었다. 삼십여 분간 열심히 긷고 퍼부은 결과 말끔히 정리됐다. 힘들기도 했지만 어이없는 상황에 시커먼 얼굴을 마주보며 웃음을 터트린다. 그렇게 설날 전야제는 무사히 끝을 맺었다.
고마움만큼 깊어진, 고국에 대한 그리움
이윽고 설날 아침이 밝았다. 중국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세뱃돈을 주고받는다. 다른 점은 돈을 붉은 봉투 홍빠오(红包)에 넣어 준다. 세뱃돈뿐 아니라 축하할 때 두루두루 사용된다.
아이들이 홍빠오를 받고 함박웃음을 머금는다. 물론 어르신들도 받았다. 멀뚱히 서있자 우리에게도 홍빠오를 건네는 게 아닌가! 손사래를 치며 강하게 거부했다. 대접받는 것도 모자라 세뱃돈이라니! 계속 주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한참 실랑이가 오갔다. 결국 돈은 빼고 봉투만 받는 걸로 해결했다. 마음 착한 아주머니는 아쉬움이 그득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먹고, 또 먹고, 먹으면서 일정을 마쳤다. 집으로 돌아갈 때 또 뭐가 아쉬운지 음식을 바리바리 싸준다. 시골인심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 주신다. 양 손 가득 명절음식을 가지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가슴에 싸한 바람이 분다. 어쩔 수 없는 쓸쓸함이다. 한국과 비슷한 듯 다른 중국 설날을 보내며 너무 즐거웠지만 그만큼 고향이 그리워졌다.
지금도 그 분들과 연락하며 지낸다. 가끔 초대받아 집밥도 얻어먹고 딸과는 따로 만나 시내 구경도 한다. 딸 밍양이는 작년 말 한국으로 유학을 왔다. 이번 설에 한국에 남아 있다면 초대해서 떡국 한 사발을 먹일 계획이다. 그때의 나처럼 배에 틈을 주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