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위대한 왕'의 아버지에 해당하는 호랑이가 백두산에 서식하는 '조선호랑이'였다는 사실도 어린 재일조선인이었던 나를 매료시켰다. '조선'이라는 말에 경멸과 조롱의 울림이 진드기처럼 늘 들러붙어 다니던 일본에서, 비록 '조선호랑이'의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이 말이 경의의 뜻으로 쓰이는 사례를 접한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왕>을 읽고 용기를 얻는 나는 '조선호랑이'가 얼마나 크고 강한 지를 같은 반 일본인 급우들에게 자랑하곤 했다. 그라고 사자가 더 강하다고 주장하는 아이와 결국에 가서는 주먹다짐이 벌어지기도 했다. 성장하고 난 뒤에도 <위대한 왕>을 향한 내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중앙공론사에서 이마무라 다쓰오의 번역으로 완역판이 출간되자 곧바로 구입해서는 넋을 놓고 읽어댔다. -<위대한 왕> '발문(서경석)'중에서<위대한 왕>의 주인공은 조선호랑이, 1930년대 중반에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바이코프'가 쓴 동물소설이다.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작가인데, 만주의 자연을 주제로 한 그의 작품들은 세계에 많이 알려졌다고 한다.
<위대한 왕>이 세계에 유명해진 것은 작품이 나온 그 얼마 후인 1938년에 프랑스어로 번역되면서.
이후 일본어, 체코어, 독일어, 이탈리어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번역, 그간 세계인들에게 널리 읽혔다고 한다. 특히 일본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데, 재일조선인 서경석씨(법학부 교수이자 작가다)의 발문을 보면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를 사지로 몰았던 자신들의 잘못은 나 몰라라. 재일조선인들을 조센징이라 부르며 조롱과 멸시를 했던 일본사회의 비뚤어진 풍조는 유명하다. 1951년생 서경석씨도 그런 분위기 속 일본에서 자랐는데, 그런 그가 <위대한 왕>의 주인공이 조선호랑이라는 사실만으로 용기를 얻었으며, 자신을 멸시하는 일본 아이들에게 자랑하며 우쭐해졌다니 말이다.
그렇다면 많은 일본인들에게 경의의 대상이었던 조선호랑이(한국호랑이)는 어떤 동물이며, 많은 일본인들이 읽었다는 <위대한 왕>은 어떤 작품일까? 일본에서 특히 인기가 많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위대한 왕>의 무엇이 일본인들을 매료시켰던 것일까?
새끼들의 크기는 집에서 키우는 보통 고양이보다도 작았다. 하지만 수놈은 여동생보다 몸집이나 머리가 크고 체격도 더 우람해서 쉽게 구별할 수 있었다. 두 놈 모두 주둥이가 납작하고 귀는 접혀서 머리 쪽에 붙어 있었다. 닷새 동안 어미는 한순간도 새끼들과 떨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핥아주고 자기의 체온으로 따뜻하게 해주었다. 갓 태어났을 때 새 생명들은 거의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약했다. 그래서 어미가 주둥이로 끌어당겨서 젖을 물렸다. 배불리 먹고 나면 새끼들은 곧 잠이 들었고 다시 젖을 빨 때가 되어서야 깨어났다. 엿새째 되는 날 새벽이 되자 어미는 비로소 굴을 떠나 샘으로 내려가 목을 축일 수 있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어미는 잠들어 있는 새끼들과 은신처를 샅샅이 돌아보며 무언가 수상한 것이 없는지 살폈다.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어미는 평정을 되찾고 새끼들 옆에 몸을 뻗고 앉았다. 그럴 때도 혹시 입구에 갑자기 적이 나타나는지 감시하려고 동굴 안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신중을 기하기 위해 어미는 절대로 보금자리 근처에서 볼일을 보지 않았다. 다른 호랑이들, 특히 수컷들이 용변 자국을 보고 금방 은신처를 알아내 새끼들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위대한 왕>(아모르문디 펴냄) 본문에서.한국호랑이의 생태적 특성을 잘 묘사하다<위대한 왕>의 배경은 한반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타투딩즈 산과 코쿠이찬 산, 그리고 영고탑, 하이린 등의 만주일대와 백두산 등. 수많은 호랑이들은 물론 숲속 모든 동물이 왕(王)으로 인정하는 한국호랑이(이하 책의 지칭에 따라 한국호랑이)의 새끼를 낳을 날이 그리 멀지 않은 암호랑이 한마리가 마땅한 은신처를 찾아 여정을 시작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한국호랑이는 물론 곰이나 멧돼지 등의 생태적 특성을 사실적으로 잘 묘사했다는 찬사를 받고 있는 작품이란다. 소설은 인간들의 발길이 닿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타투딩즈 화강암 지대 한 동굴을 은신처로 삼은 그 3일 후에 남매를 낳은 암호랑이가 6일 만에야 물을 마시러 가는 장면 묘사를 시작으로 한국호랑이의 일생을 들려준다.
<위대한 왕>의 주인공 한국호랑이는 암호랑이가 낳은 남매 중 수컷. 책에 의하면 이마는 물론 몸에 왕(王)자 무늬가 특징인 한국호랑이는 다 자랐을 경우 300kg 정도이고, 발 길이는 35cm나 된다. 주로 멧돼지를 먹이로 하는지라 멧돼지 떼를 따라 이동하며 멧돼지들을 사냥하곤 하는데, 취향에 따라 모든 동물들을 사냥하기도 하고, 물고기를 잡아먹거나 열매를 먹기도 한다.
소설은 새끼를 가진 암호랑이가 부부의 연을 맺은 수컷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어떻게 새끼를 낳으며, 사냥을 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냥을 배우며, 멧돼지나 곰은 어떻게 사냥하며 숲속의 다른 동물들과 어떤 식으로 공존하는지 등을 들려준다.
또, 어떤 식으로 무리를 이루며 배우자는 어떻게 선택해 새끼를 갖는지, 발톱갈이는 어떤 식으로 하는지, 인간들과는 어떤 관계이며 당시 사람들에게 호랑이는 어떤 존재였으며 그들에게 한국호랑이에 대한 인식은 어느 정도였는지, 한반도를 주요 서식처로 시베리아 등에 그리 많았다는 한국호랑이가 왜 멸종위기에 처했는지 등 한국호랑이의 참 많은 것들을 들려준다.
아마도 왕의 후예로 태어난 한국호랑이 한 마리의 동선을 따라 오랜 시간에 걸쳐 그 일생을 추적한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과 같은 장엄함과 감동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으리라.
여하간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작가가 우리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한국호랑이의 생태를 매우 섬세하고 생생하게 다룬 소설이라는 것이다. 이것만으로 이 책에 관심을 둬야 하는 이유가 충분하지 않을까?
소설의 배경인 '1890년대 말~이후'는 러시아의 동청철도 부설과 그를 수비하는 군인들의 주둔으로 많은 숲들이 파괴되면서 그에 깃들어 살던 수많은 동물들이 위협을 받던 때다. 동청철도는 러시아의 시베리아횡단 철도 가운데 만주를 통과하는 노선으로 러시아는 이 구간을 통해 중국전역으로 침투하려는 속셈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작가도 이 철도를 수비하는 군대의 장교로 소설의 배경이 되는 만주 일대에 첫발을 디뎠으며 이를 계기로 작가로서의 삶을 꿈꾼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발발 등으로 쉽지 않자 망명자로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글쓰기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그가 망명자 신분으로 만주 하얼빈으로 돌아가 이 작품을 쓴 1930년대, 일본 제국 세력이 득세했다.
앞서 그가 동청철도에 파견되었던 1900년대 초 한반도에선 한국호랑이 씨를 말리려는 계획아래 조선총독부가 한국호랑이 사냥을 적극적으로 지원, 일본인들 사이에 한국호랑이 요리 시식 열풍까지 불었던 때다. 참고로 한반도에서 한국호랑이가 마지막으로 사살된 것은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라고 한다.
이런지라 하필 그가 당시 만주일대를 호령하던 한국호랑이를 주인공으로 한 <위대한 왕>을 썼다는 사실이 남다르게 와 닿는다. 우리가 이 소설에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가져야 하는 또 다른 이유라면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에서는 그간 아동용 문학전집 중 한 권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그러나 많이 읽히지는 않은 듯하다. 필자처럼 책을 좋아하는 지인 몇에게 책의 존재를 말했을 때 전혀 몰랐던 책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솔직히 좀 아쉽다. 일본 아이들처럼 흔하게 읽을 정도로 그다지 유명한 작품이 아니었다는, 여하간 읽지 못하고 자라났음이 말이다.
아동용으로 나오며 생략되기도 했을 터. 청소년 이상 연령이 읽을 수 있도록 완역된 것은 2007년(아모르문디 펴냄), 필자가 읽은 <위대한 왕>은 2014년 개정판이다. 2014년 초, 작품의 존재를 알고 읽으려 했으나 절판이라 아쉬웠던 터라 개정판이 매우 반가웠던 책이기도. 반가운 마음에, 묻히지 말고 가급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마음을 더해 권하고 싶은 책이다.
'니콜라이 바이코프' |
러시아의 군인이자 작가, 박물학자. 1872년 지금의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 키예프에서 태어났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정 러시아의 장교가 되었으며, 30세에 만주 동청철도의 수비대로 파견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후 18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백군에 가담했으나 혁명이 적군의 승리로 돌아가자 터키, 이집트, 인도 등을 떠돌다 1922년에 다시 만주 하얼빈으로 돌아갔다.
이후 30여 년을 만주의 자연 속에서 생활하면서 여러 작품을 저술했다. 그의 작품은 만주 밀림의 동식물과 원주민 생활에 대한 세밀한 관찰을 담고 있으며, 그중 <위대한 왕>은 만주 밀림에서의 체험과 완성도 높은 구성이 어우러진 뛰어난 동물문학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한때 일본에서 지내다가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가, 1958년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만주의 산과 숲에서>, <타이가의 소음>, <만주 사냥꾼의 기록> 등 많은 작품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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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위대한 왕>|니콜라이 바이코프 (지은이) | 김소라 (옮긴이) | 아모르문디 | 2014-04-20 |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