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니! 딸이에요?" 만나는 동네 사람마다 나를 가리키며 딸이냐고 저니에게 물었다. 저니는 그때마다 껄껄껄 웃으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국에서 온 친구야!" 아침 6시 30분, 저니와 나는 숙소를 나서 코코넛 야자나무 숲 마을길을 따라 서쪽으로 향했다. 햇살과 공기가 찰랑찰랑 맑은 아침이었다. 저니가 생선을 사러 간다기에 따라 나선 길. 그는 매일 아침, 그날그날 먹을 생선을 사러 간다고 했다.
저니는 한 손에 대나무 바구니를 들고, 무릎이 굽혀지지 않는 오른쪽 다리를 끌며 느릿느릿 걸었다. 동네 사람들과 큰 목소리로 아침 인사를 나누고, 아이들에게는 대나무 바구니에서 사탕 한 알을 쏙 꺼내 손에 쥐여주었다.
"친구가 와서 좋겠어요?""허허, 오늘 물 좋은 생선이 들어왔나 모르겠네!"저니는 팔라완 엘니도의 시발탄(Sibaltan)이라는 바랑가이(필리핀의 최소 행정 단위, 마을)에 들어온 지 6개월째라고 했다. 그는 타이완 사람으로 70대 백발노인이었다.
"저니, 이 동네 유명인사시네요!" 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그가 대답했다.
"허허헛! 글쎄요. 아, 내가 여기 와서 관광객하고는 한 번도 말을 섞은 적이 없는데, 강은 알빈 호스타 소개로 왔으니 특별히…."시발탄 바랑가이, 해변에 드리운 야자나무
알빈 호스타는 내가 그제 엘니도 타운의 관광안내소 사무실로 찾아가 만난 사람이었다. 시끌벅적한 관광지를 벗어나 한적한 동네에 가고 싶다고 했더니, 그의 고향인 시발탄 바랑가이를 소개해 주었던 것이다. 엘니도에서 5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동쪽 해안마을. 엘니도 23개의 바랑가이 중에 가장 오래된 어촌마을이고, 유일하게 박물관이 있는 곳이라고 했다. 그의 어머니가 숙소를 운영하고 있단다.
어제 나는 엘니도의 버스터미널에서 로컬버스를 탔다. 시발탄까지 하루 한 대 운행하는 오전 11시 20분 버스. 버스는 11시 5분에 출발했다. 승객을 꽉 채우고. 북쪽을 향해 한참을 꼬불꼬불 달리던 버스는,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다시 남쪽 방향으로 가다 서다 하며, 승객들을 싣거나 내려주었다. 차창으로 바다와 열대나무 숲, 추수를 끝낸 빈 논과 물소들이 번갈아 스쳐갔다. 오후 2시께 시발탄에 도착했다. 3시간 가까이 걸린 여정이었다.
시발탄은 코코넛 야자나무 숲에 들어있는 마을이었다. 마을 앞에는 갯벌과 모래가 섞인 해변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펄럭이는 오색기와 길가에 늘어선 간이매점 천막들이 눈에 들어왔다. 때 맞춰 '피스타(Fiesta)', 마을 축제기간이었다.
알빈 호스타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숙소를 찾아가 짐을 풀었다. 시멘트 바닥 위에 올린 니파 헛(필리핀 오두막집), 하룻밤 150페소(한화로 약 3700원)짜리 숙소였다. 저니를 거기서 만났다. 그는 장기투숙자였다.
10분쯤 걸어 저니와 나는 바닷가 한 오두막집에 도착했다. 생선을 산다기에 어물전에 가나 했더니, 어부가 사는 집이었다. 뱃살이 출렁거리는 덩치 큰 남자가 "딸이에요?"라고 또 물었다. 저니가 또 유쾌하게 웃으며 "한국친구!"라고 대답했다.
저니는 싱싱한 생선이 가득 들어있는 아이스박스를 한참 동안 신중하게 들여다보았다. 마침내 '라푸라푸' 1마리랑 '까노핑'이라는 생선 1마리를 골랐다. 30페소(한화로 750원)에 흥정됐다. 작은 생선 1마리가 덤으로 추가됐다. 저니는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어부는 물고기를 토막 내어 깨끗하게 손질하고 씻은 후 저니의 바구니에 넣어주었다.
숙소로 돌아와 저니는 라푸라푸를 굽고 밥을 해 나를 불렀다. 우리는 아침을 같이 먹고, 알빈 호스타의 어머니가 타준 커피를 마셨다. 저니가 바다로 수영을 하러 간다기에 또 따라 나섰다.
숲길에서 해안으로 나서는 길에 늘어져있던 나뭇가지를 둘이 들어 올렸다. 앗! 저니는 웃통을 훌렁 벗어 젖혔다. 불개미 떼를 뒤집어쓴 탓이었다. 나는 옷을 벗을 수도 없었다. 옷 속으로 들어가 등허리, 팔뚝, 겨드랑이를 물어뜯는 불개미를 털어내느라 불판 위에 올라간 개구리처럼 펄쩍펄쩍 뛰었다. 쩔쩔매는 우리 꼴이 어찌나 우스운지, 우리는 허리를 비틀며 웃었다.
무인도에서 즐긴 낭만, 새드엔딩이어도 괜찮은 인생
우리의 목적지는 어촌마을 바로 코앞, 무인도였다. '부우버그 섬'이라 불리는, 손바닥만 한 바위섬이었다. 부우버그 나무 세 그루, 기둥 위에 지붕만 덮인 콘크리트 구조물이 서 있었다. 거친 바위 끝으로 짧게 뻗은 모래밭. 저니의 배는 한 사람만 탈 수 있는 노 젓는 쪽배였다. 그래서 아침에 만난 어부의 동생이 방카(필리핀 나무 배)로 우리를 섬까지 태워다 주었다.
"매일 오전 오후, 여기로 두 번 건너와서 놀지. 혼자 수영하다 쉬다 그래. 나만의 세상이지. 2008년도에 첫 암 수술을 받았어. 그 후로 암이 여기저기로 전이되어 세 번 더 수술을 받았는데, 나중에는 다리로 전이 되는 바람에 오른쪽 다리를 쓸 수 없게 됐지. 마닐라에서 온천욕으로 물리치료를 받다가 여기로 왔어. 지금 이렇게라도 걸을 수 있는 게 기적이야. 암이 언제 또 재발할지 모른다지만…."나는 갑자기 어떤 생각에 깊이 빠져버렸다.
"강, 왜?"
나는 얼떨결에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해피엔딩이 아니라 새드엔딩 같아요. 어떻게 살든, 결국 구석구석 망가져가는 그 고통 끝에, 육체도 정신도 참혹하게 끝나잖아요? 그 뻔한 결말을 향해 죽을 둥 살 둥…."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대부분의 문학작품들이 새드엔딩이지. 맞아. 내 인생 돌아보면, 참 짧고 감동적인 시간이었어. 평범하지만... 뻔한 결말 신경 쓰지 말고, 강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살아."나는 그의 말을 되새기며 입을 다물었다. 그의 구릿빛 몸은, 몸집은 작지만 노인이라고 하기에도, 암 환자라고 하기에도 믿어지지 않게 정정했다. 쩌렁쩌렁한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건강해보였다.
"수영이라면 내가 국가대표급이지. 다이빙 장비 없이도 20미터는 거뜬히 잠수하지, 이 3킬로그램짜리 웨이트 벨트만 있으면! 수영하다 졸리면 바다에 떠서 잔다니까? 난 바다만큼 좋은 데가 없어. 바다에 들어가면 내 다리도 멀쩡해져! 물고기가 된 기분이지."그는 중간 중간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의 얘기를 들어가며 덩달아 따라 웃게 됐다.
"이 동네, 이 바다가 정말 좋아! 평화롭고, 사람들은 친절해. 나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그런데 관광객들이 더 늘어나면 다른 섬으로 옮길 거야. 도시로 나갈 생각은 없어. 도시는 싸움터야. 정말 싫어."
그를 따라 모래밭에 서서 맨손 체조를 한 후, 스노클링 채비를 갖추고 바다로 뛰어 들었다. 저니는 내 옆에 붙어 수영을 하며, 산호랑 물고기가 많은 쪽으로 천천히 나를 안내했다. 1 시간쯤 즐기다 수면 위로 나왔다. 저니가 챙겨온 캐슈너트를 씹으면서 부우버그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쉬었다. 저니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래 불러주세요!" 뜬금없는 내 요구에 그는 또 껄껄껄 웃더니, 중국어로 구성지게 한 곡 뽑았다. 애수가 배어있는 멋진 가락이었다. 나는 박수를 짝짝짝 치면서, 혹시 내게 답가를 청하면 어쩌나 걱정됐다. 난 노래 참 못 하는데... 한 곡 더 불러달라고, 내가 얼른 선수 쳤다. 저니는 마다하지 않았다. 흥이 오른 목소리로, 이번에는 좀 더 빠른 박자의 노래를 불렀다. 바다, 섬, 황혼의 노인, 노래, 찬란한 햇살... 어딘가 나는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저니의 아내와 두 아들은 타이완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젊어서부터 아내랑 같이 여행사를 경영했단다. 투어 리더로 세계 여행을 많이 했고, 한국도 간 적이 있다. 그의 입에서 서울, 부산, 제주도라는 지명들이 튀어나왔다.
"1992년이지. 두 나라 수교가 단절된 게. 그 후로는 한국에 가지 않았어."아, 그랬었지. "타이완과 한국의 45년 간 이어졌던 긴밀한 외교관계가 1992년 끊어졌다, 중국과 수교를 맺기 위한 한국의 일방적인 단교 선언이었다"던 당시 뉴스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서울에 있는 대만 대사관 직원들이 철수를 할 때, 눈물을 흘리며 대만 국기를 내리던 모습... 저니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자, 또 바다로 들어가 볼까?" 뭔가 재미있는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거기서 1시간 쯤 더 놀다가 바랑가이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했다. 마당에서 우물물을 퍼 뒤집어썼다. 점심을 먹고 저니는 낮잠을 자는 시간이라며, 해먹을 들고 나갔다. 그는 매일 또 시원한 야자나무에 해먹을 걸고, 그 위에서 오수를 즐긴다고 했다. 그의 일과는 매우 규칙적이고 단순했다. 한 끼 식사도 하룻밤 잠자리도 소박한 일상. 병, 죽음, 그 '뻔한 결말'로 가는 그의 시간이 어쩐지 비극적이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뭘까.
나는 오색기 휘날리는 마을의 축제마당을 찾아갔다. 농구경기를 하고 있었다. 구경꾼들이 북적였고, 확성기를 통해 경기가 중계되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 틈에 끼어 구경했다. 선수들은 뜨거운 땡볕 속에서 팔팔 뛰고 있었다. 해설자의 열띤 목소리도 펄펄 뛰었다. 구경꾼들의 응원소리도 뜨거웠다.
거기서 빠져나와 해변으로 갔다. 가는 길에 보조개가 예쁜 아가씨가 파는 '할로할로(필리핀 식 빙수)'를 사 먹었다. 입안이 얼얼하게 찼다. 땀이 좀 식었다. 해변의 야자나무 그늘 아래 앉았다. 썰물 때였다. 바닷물이 슬렁슬렁 빠져나가고 있었다. 내겐 슬슬 밀물이 밀려오듯 졸음이 밀려왔다. 눈꺼풀이 내려앉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한국에서 온 저니 친구죠?"필리핀 남자의 오른쪽 콧방울 옆에 커다란 점이 박혀있었다.
"우리가 이번 축제에 '미스 쿠요논(Miss Cuyonon)' 대회를 준비하고 있는데, 도와주시겠어요? 출전자 아가씨들과 인터뷰를 해주면 고맙겠습니다." 나는 그가 누군지, 인터뷰라니? 뭘 부탁하는 건지, 어디로 가는지 몰랐지만, 졸래졸래 그를 따라갔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