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13일부터 19일까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아래 ABC) 트레킹을 일주일간 다녀왔습니다. 이 글은 인생의 반환점을 돌고 있는 마흔 언저리의 나와 K, 두 남자가 히말라야를 오르면서 느낀 여러 생각과 소회를 담은 이야기입니다. 익히 히말라야를 경험하신 분들께는 그때의 기억과 감흥을, 버킷리스트 한 편에 히말라야를 적어 놓고 '언젠가'를 준비하고 계신 분들에게는 설렘과 정보를 함께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 기자말
[깨달음이 있는 설산 기행①] : 히말라야, '언젠가' 꿈꾸고 있는 당신께왜 간드룩의 뷰포인트가 멋지다고 하는지 알게 되는 아침입니다. 어제 오후는 구름이 많이 끼어 뭐가 좋다는 것인지 인지가 잘 안 되었는데, 해가 떠오르며 모습을 드러낸 숙소 뒤편의 설산 파노라마에 감탄을 연발합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같은 로지에 머물렀던 사람들 모두 휴대폰 카메라 셔터를 연방 눌러대며 행복한 미소를 짓습니다.
멋진 풍경에 마음이 열렸을까요? 처음 만나는 이국인들끼리 서로 사진을 찍어도 주고 함께 찍기도 하며 금세 마음을 엽니다. 문법에도 맞지 않는 짧은 영어지만, 샘 해밍턴을 닮은 외국인과의 아침 식탁 대화가 무척이나 즐겁습니다.
포터가 짊어지는 가방과 우리 각자가 짊어질 가방을 나누어 어깨끈을 질끈 조이고 둘째날 여정을 시작합니다. 가볍습니다. 기분 좋은 아침 특유의 느낌이 온 몸에 퍼져나가 발걸음도 상쾌하고, 중간 중간 만나는 현지인들, 여행자들과 나누는 '나마스테'(내 안의 신이 당신 안의 신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인사는 얼굴을 더욱 환하게 만들어 줍니다.
점심 식사 주문하면 1시간... 그래도 좋다
간드룩에서 오르막길을 한참 걷다가 급격한 내리막길 끝에 커다란 계곡이 나타납니다. 바람이 지나갑니다. 시원한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계곡의 물줄기는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들까지 씻어 줍니다. 물가에 앉아 있음과 동시에 저절로 명상이 됩니다. 산과 하나 된다, 물과 하나 된다, 자연과 하나 되는 느낌이 바로 이런 거겠지요.
이 마을의 이름은 킴롱콜라, 오늘 점심은 여기서 먹습니다. 날씨도 좋고 야외 테이블이 놓인 오두막에서 한숨을 돌립니다. 인적이 많지 않은 곳이어서 그런지 점심 식사를 주문하고 나오는 데까지 한 시간이나 걸립니다.
너무 오랜 시간을 쉰 것일까요? 오늘의 문제는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점심을 먹고 나니 나른하기도 하고, 그 사이에 땀이 다 식었기 때문인지 체온은 급격히 떨어집니다. 가방 속에 넣어 두었던 점퍼를 꺼내 입어도 한기가 느껴지고 체력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더욱 아찔한 것은 오후에 걸어야 할 코스입니다. 오늘의 목적지는 촘롱인데, 여기서부터 급격한 오르막길을 2시간 이상 걸어야 한답니다.
간드룩에서 시작하여 촘롱에 이르는 구간은 ABC 트레킹에서 만나는 첫 번째 롤러코스터입니다. 한 번 오르막, 한 번 내리막 그리고 다시 오르막. 이번에는 만만치가 않습니다. 오전 내내 그렇게 좋았던 마음이 흐트러지는 건 한 순간입니다. 오만 가지 생각과 감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올라옵니다.
땅은 왜 이리 건조한 건지, 흙먼지가 풀풀 날려서 길을 걷는 맛도 최악입니다. 또 뭔 놈의 소똥과 말똥은 이리도 많은지…. 둘러보면 사방은 짙은 녹색의 산봉우리 뿐, 하얀 설봉은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강원도 두메산골이랑 뭐가 다른가?', '이거 보러 돈 들이고 시간 들여서 온 것인가?' 하고 후회하는 마음도 0.1초 사이로 왔다 갔다 합니다.
서부 영화처럼 마주한 말 떼... 속력을 줄이지 않았다
트레킹 도중에 당신은 종종 말 떼와 소 떼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좁은 길에서 마주 칠 때 말들이 사람 먼저 지나가도록 기다려주는 모습에, 처음에는 '히말라야에서는 동물까지 도인이 되는 모양이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니 말이 스스로 하는 행동이 아니라, 몰고 가는 이의 신호, 즉 사람의 배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르막길이 거의 끝나고 모처럼 평탄한 길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멀지 않은 앞에서 말 떼가 우리 일행 쪽으로 달려오는 것이었습니다! 흙먼지를 풀풀 날리며 마치 서부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습니다.
'어어, 말이 속력을 줄여야 하는데…?' 하는 생각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습니다. 순간 말이 내가 매고 있던 배낭 옆구리를 들이 받았고, 나는 그냥 밭두렁 사이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보통 말몰이꾼들은 천천히 걸어오기 마련인데, 이번 말 떼 뒤편에는 열다섯 살 남짓 정도 되어 보이는 목동 둘이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순간 내 머릿속에서 스쳐가는 생각.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나마스테라고 인사하면 용서해준다, 아니면…!'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습니다. 개구쟁이인 악동 둘은 '재밌다'는 웃음을 지으며 달아나 버립니다. 순간 내 안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
"나마스테고 나발이고, 이런 어린놈의 녀석들이!"
사람들은 산의 변화무쌍한 날씨를 가리켜 '변덕스럽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오늘 하루를 돌이켜 보건데, '변덕스럽다'는 말을 산에게 함부로 붙여서는 안되겠습니다. 산의 날씨야 '다채롭다' 정도면 될 것 같고, 내 마음이야 말로 '변덕스럽다' 정도로는 모자라겠지요.
오늘 걸었던 롤러코스터 같은 길 이상으로 우리 인생도 굴곡이 있기 마련이고, 하루하루도 그런 변화의 연속입니다. 오르막 내리막, 기분이 좋고 나쁘고, 이런 생각이 일어나고 저런 감정이 일어나고… 수만 갈래로 일어나는 마음 그 자체의 변화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지요. 문제는 그 마음의 경계가 일어나고 작용하는 현상에 푹 빠져 버려서 중심을 잡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言)은 마음의 작용이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이지요. 그래서 심사가 꼬이면 꼭 말실수를 하게 마련입니다. 일어나는 생각을 바라보고, 일어나는 감정을 바라보고, 내 마음의 주인으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히말라야의 유쾌한 일침이 말(馬)과의 추돌사고가 아니었을까요?
지나고 나니 내가 생각해도 웃음이 터져 나오는 슬랩스틱 코미디였습니다. 각진 마음을 씻어 주려는 듯 촘롱의 저녁에는 비가 시원하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