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이나 힘든 하루였다. 기다렸던 퇴근시간. 주저 없이 회사를 나섰다. 칼퇴근을 해도 가야 할 길이 멀다. 나는 경기도 외곽에서 서울로 출퇴근 하는 장거리 출퇴근족. 매일 지하철 6호선에서 2호선으로, 다시 1호선으로 환승해 집으로 간다. 집에 1분이라도 일찍 간다고 뭔가 대단한 게 있는 것도 아닌데, (사실 해야 할 일이 더 많은데) 쫓기듯 에스컬레이터를 오르고 걷고 또 걷는다.
그렇게 1시간 20분여 만에 도착한 집. 현관문을 열면 기다렸다는 듯 나를 향해 달려드는 두 아이들. "씻었니? 밥 먹었니? 숙제 했니?" 물으며 냉장고에 있는 반찬을 꺼내 5분 저녁을 먹는다. '내가 왜 이러고 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그런 날, 옆에 있는 딸에게 하소연하듯 말을 걸었다.
"다은아 오늘 엄마가 좀 힘드네. 회사 일도 힘들고..." "그래?(시크한 표정이라니)." "응...그래서 엄마가 좀 기운이 없는데, 좀 재밌는 책 없어? 너 읽었던 것 중에?" "음... 몰라(어쩜 이렇게 쿨하실까)." 에구, 이제 9살짜리 애한테 내가 뭘 기대한 거람. 시큰둥한 표정으로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큰딸. 5살 작은딸도 마찬가지다. 엄마의 속사정을 알 리 없는 막내는 습관처럼 책을 탑처럼 쌓아놓고 "많이많이많이 읽어 달라" 무한반복 랩 발사 중. '그래, 남편이 퇴근할 때까지만 견뎌보자'며 영혼없는 책읽기가 시작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큰딸도 책 두 권을 가져와 내 옆에 앉는다.
"엄마, 나도 이거 읽어줘."
"응?" "엄마 힘들다고 했잖아"라고 말하면 "그러면서 엄마는 맨날 동생만 읽어주고..." 할 게 뻔하고, "넌 책 읽을 수 있잖아?" 하면 "그래도!"라는, 아주 뻔한 레퍼토리가 시작될 터였다. 뭔 책인가 싶어 제목부터 확인하는데... 어라? 이 책은 <테푸할아버지의 요술 테이프>(글 박은경, 그림 김효주)?
"(다은이를 빤히 보며)너 이 책 엄마 보라고 일부러 가져온 거야?" "(전혀 아니라는 표정으로)아니... 왜?" "(다소 실망하면서도 기분이 좋아서)오늘 같은 날엔 엄마한테도 '테푸할아버지'가 있으면 좋을 거 같아서." "그래?"진짜였다. 테푸할아버지는 민기네 동네 아이들의 고민을 만능테이프로 해결해주는 고마운 분이니까, 어쩌면 나도 테푸할아버지를 만난 동네 아이들처럼 '온몸이 따뜻해지면서 속상했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방귀 냄새가 지독한 민기도, 동생이 자기 물건을 자꾸 가져가 속상한 현서도,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아 서운한 아이도, 엄마아빠가 바빠 심심한 아이도 모두 테푸할아버지의 요술테이프만 붙이면 방귀 냄새가 향기로워지고 기분이 좋아지며, 편안해졌다. 아이들은 모두 그런 테푸할아버지를 따르고 좋아한다. 그러던 어느날 아이들은 테푸할아버지의 이가 모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깜짝 놀라는데... 아이들은 과연 테푸할아버지의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동생 때문에 속상한 현서에게 테푸할아버지가 "이리 와라 아가야, 많이 속상했겠구나" 하는 대목을 읽을 때는 울컥했다. 그 소리가 마치 "다은 엄마, 오늘 회사에서 좀 속상했지?" 하는 말처럼 들려서. 테푸할아버지가 내 마음도 알아주고 위로해 주는 것 같아서. 이 책의 추천사 말마따나 '누군가의 지지와 공감에 의한 치유는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니까.
아마도 아이들은 더 그렇겠지. 우주 최고 엄살쟁이도 엄마가 '호~ 얼른 나아라' 하고 공감해주면 언제 아팠냐는 듯 멀쩡해지고, 벼락같이 울던 아이도 반창고 하나만 있으면 슬픈 감정이 치유되는 마법 같은 순간을 알고 있으니까.
이날 내가 <테푸할아버지의 요술테이프>를 읽은 게 혹시 우리딸의 마법은 아니었을까? 테푸할아버지에게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은 동네 아이들이 테푸할아버지의 고민을 마법처럼 해결해 준 것처럼.
ps. 책 속엔 테푸할아버지의 요술테이프가 '진짜로' 들어있다. 그 효과, 따로 길게 설명하진 않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베이비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