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가 끝난 직후 박종부(58,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청년회장)씨에게 자료뭉치가 전달됐다. 500여 쪽에 이르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1987년) 공판기록이었다. 박종철 열사의 친형인 그는 그 기록을 읽다가 덮어버렸다.
"그 당시 형으로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게 부끄러웠다."앞서 지난 1월 14일 박종철 열사의 28주기를 지냈던 터라 더욱 마음이 시렸다. 그런데 1주일 뒤 양승태 대법원장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부실하게 수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박상옥 전 검사를 대법관 후보자로 임명제청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픔'과 '분노'가 교차했다.
"울분이 쌓이고 울화통만 터진다" 3일 오후 3시 용산에 위치한 박종철열사 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박종부씨를 만났다. 박씨는 "동생이 하늘나라에서 걱정없이 편안하게 지내야 하는데 박상옥 대법관 지명을 보고 속상할 것이다"라며 "기본과 상식이 없는 사회가 몇 년간 지속되는 것을 보면서 울분이 쌓이고 울화통만 터진다"라고 말했다.
박씨는 "(검찰이) 대표적인 인권사건을 부실하게 수사했다는 것을 국민들이 다 알고 있는데 박상옥 후보자가 궁색한 변명조차 없이 청문회에서 답변하겠다고 해서 기분이 나빴다"라며 "자기가 떳떳하다면 미리 부실수사 의혹에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청문회에 임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꼬집었다.
이어 박씨는 "4일 만에 (1차)수사를 마무리한 것 자체가 졸속수사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로 검찰은 지난 1987년 1월 20일 치안본부로부터 사건을 송치받아 수사팀을 꾸린 지 나흘 만에 수사결과(1차)를 발표했다(1월 24일). 이에 따라 물고문 경찰관 2명만 '가혹행위에 의한 치사' 혐의로 기소됐다.
이날 인터뷰에 동석한 김학규(51) 박종철 열사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검찰은 수사를 확대하지 않고 경찰 발표를 추인하는 것으로 수사를 마무리했다"라며 이렇게 지적했다.
"물고문에 가담한 경찰관 2명을 검찰로 불러서 조사하지 않고 몰래 교도소 출장수사를 벌였다. 이는 물고문 경찰관들을 언론에 노출시키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심지어 현장검증도 실시하지 않았고, 당사자들을 부르지 않은 채 실황조사(당시 상황을 부분적으로 재현하는 수사방법)만 벌였다."하지만 박 후보자쪽은 "당시 수사팀 일원으로 최선을 다해 수사했고, 수사 과정에서 외압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라고 해명했다.
"고문경찰관 수사하고 공소유지까지 맡았는데..."
안상수(현 창원시장) 당시 검사는 1차 수사가 끝난 뒤인 1987년 2월 27일 구속돼 있던 고문경찰관 조한경 경위으로부터 "고문에 가담한 경찰관이 3명 더 있다"라는 얘기를 들었다.
'중대한 증언'이었지만 검찰은 추가 수사를 벌이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해 5월 18일 김승훈 신부 등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명당성당에서 "고문경찰관이 3명 더 있다"라고 폭로하자 2차수사에 나서 경찰관 3명을 추가로 구속했다.
박씨는 "당시 안상수 검사가 동생 고문에 가담한 경찰관이 2명이 아니라 3명 더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같이 수사했던 박상옥 후보자가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라고 주장했다.
박씨는 "그 당시 안상수 검사조차 '관계기관대책회의'를 거론하며 '어쩔 수 없었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면 끝이 아니다"라며 "3명 더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도 수사하지 않았다면 검사로서 능력부족이고, 그것을 몰랐다면 자질부족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박씨는 "박 후보자가 당시 수사팀의 '막내검사'였다고 변명하는데 (1차 수사 때) 고문경찰관 강진규 수사를 맡았고, 이후 사건의 공소유지까지 맡았다"라며 "그런 점에서 '막내검사'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박씨는 "'막내검사라 어쩔 수 없다'고 얘기해서는 안 된다"라며 "수사와 공소유지 검사로서 책임이 있는데 그 책임을 비켜가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라고 지적했다.
김학규 사무국장도 "당시 박 후보자가 수사팀의 막내검사인 것은 맞지만 막내검사라고 해서 문서수발 등 단순한 행정지원 역할을 수행한 것이 아니다"라며 "4년차 검사로서 강진규 수사를 담당하는 등 아주 중요한 수사검사였다"라고 주장했다.
김 사무국장은 "박 후보자에게 공소유지까지 맡겼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이 사건수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준다"라며 "대충대충 재판하려고 '막내검사'에게 공소유지를 맡겼겠는가?"라고 꼬집었다.
"얼마나 수사가 엉터리였으면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이..."
박 후보자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물고문 경찰관이 3명 더 있다"라고 폭로한 뒤에 꾸려진 2차 수사팀에도 참여했다. 1차 수사가 끝난 직후인 1987년 3월 여주지청으로 발령났지만 1차 수사에 참여한 경력을 인정받아 2차 수사팀에 합류한 것이다.
2차 수사팀은 물고문에 참여한 3명의 경찰관을 추가로 구속하고, 박처원 치안감 등을 범인도피죄로 체포해 기소했다. 하지만 사건 축소·은폐에 깊숙하게 관여한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은 "범인 축소 조작에 가담한 혐의가 전혀 없다"라며 무혐의 처분했다. 그런데 검찰은 박종철 열사 부검의의 일기가 공개되자 지난 1988년 2월 1일 강 전 치안본부장을 직권남용과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검찰이 또다시 부실수사 논란을 자초한 것이다.
김학규 사무국장은 "고문경찰관이 2명이 아니라 5명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제대로 수사하지 않은 것이나 김승훈 신부가 폭로한 이후 1차 수사팀이 다시 모여 수사했지만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을 무혐의 처리한 것은 모두 부실수사다"라고 말했다.
김 사무국장은 "1차 수사 때 제대로 못하니까 결국 2차, 3차 수사까지 갔던 것이다"라며 "최종 유죄 판결을 받아냈지만 얼마나 엉터리로 수사했으면 항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되겠는가?"라고 꼬집었다.
김 사무국장은 "박종철 열사가 '고문'에 의해 죽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점에서 (사망 원인조차 밝혀내지 못한) 다른 의문사 사건 수사와 다르지만, 그것을 빼고는 결코 잘한 수사라고 할 수 없다"라며 "박 후보자에게 정말 최선을 다해 수사했냐고 물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박씨는 "그 당시 고문경찰관이 3명 더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심정이 어땠는지, 이후 어떻게 대처했는지 박 후보자에게 물어보고 싶다"라며 "자신이 최선을 다했고, 정의롭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여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스스로 사퇴하든지 대법원장이 임명제청 철회해야" 특히 박씨는 박 후보자의 대법관 임명제청 소식을 들은 직후 검찰에 동생의 수사기록 등을 신청했다. 수사기록을 검토하다 보면 검찰의 부실수사를 확인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검찰은 사건 관계인들의 명예 침해, 소송관계인의 기록공개 부동의, 수사기관의 내부문서, 재판의 증거로 사용되지 않은 자료 등을 이유로 수사기록을 공개하지 않았다.
박씨는 "수사기록을 통해 박 후보자가 당시 수사검사로서 할 일을 다 했는지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해 자료를 신청했다"라며 "하지만 공개한 자료는 공판기록이 대부분이고, 검사가 고문경찰관 등을 직접 수사한 기록은 공개하지 않았다"라고 전했다.
박씨는 "지난 1989년엔가 (국가배상을 위한) 민사소송을 진행했을 때 우리쪽 변호사가 수사기록을 첨부해서 재판부에 제출했는데 '수사기록을 첨부했다'는 기록은 있는데 보존연한(5년)이 지나 자료는 보관되어 있지 않았다"라고 덧붙였다.
이어 박씨는 "동생의 죽음은 민주사회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고, 형식적으로나마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라며 "그런 역사적 의미를 가진 사건을 검찰이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는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한 주범은 당시 검찰이고 수사검사들이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박씨는 "보수진영에서 보면 이런 정도는 흠도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 같다"라며 "워낙 흠이 많은 사람들이 권력을 쥐고 있으니 그런 사람들은 '그런 정도가 무슨 흠이라고 물고넘어지냐'고 생각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인사가 만사인데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검증시스템도 전혀 없다는 것을 느낀다"라고 지적했다.
박씨는 "박 후보자는 인사청문회에서 밝히겠다고 버티고 있는데 그동안 청문회가 거수기 역할에 그쳤다는 점을 생각하면 청문회가 열릴 경우 박 후보자도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라며 "인사청문회가 열리기 전에 스스로 사퇴하든가 대법원장이 임명제청을 철회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진실화해위 "검찰, 권력층 압력에 굴복... 유족에게 사과해야"
한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는 지난 2009년 보고서에서 "검찰 또한 사건의 진상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직무를 유기하여 수사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다가 국민에게 은폐사실이 폭로된 이후에야 추가 공범을 포함, 치안본부 관계자 등 은폐에 가담한 책임자를 최소한만 기소하여 결과적으로 관계기관대책회의의 부당한 개입을 방조하고 은폐한 잘못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를 바탕으로 위원회는 "검찰이 외압에 굴복하여 헌법과 법률에 부여된 수사권을 적절하게 행사하지 못한 점과 헌법에 독립성을 보장받고 있었음에도 권력층의 압력에 굴복하여 진실왜곡을 바로잡지 못한 점을 유족에게 사과할 필요가 있다"라고 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