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들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걸 쏟아낸 듯 허탈해 하고 있었다. 고통 뒤에 오는 기쁨보다는, 지나온 여정이 눈에 아른거린 듯 했다.
주변에 민가도 없는 폐쇄된 오리가공 공장 건물에서 3년 동안 그려온 작품에 그는 완성을 의미하는 화가의 '서명'을 지난 4일 넣었다.
이날 마지막 서명을 한 100호 캔버스 77개를 이어붙인 총 길이 102.4미터에 이르는 작품 <들꽃처럼 별들처럼>은 오는 11월 미국 뉴욕 UN본부에 전시된다.
그는 "미친놈이 세상에서 인정받는 순간"이라고 했다. "20년 동안 외로웠지만, 한방에 모든 외로움과 서러움을 날렸다"고 회고했다.
화가 김근태(58)는 그런 사람이다. 명색은 '화가'이지만, 그들끼리의 사회에서도 인정받지 못했다. 거실 한 쪽에 걸어두는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고, 작품이 고가에 팔리는 잘 나가는 화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김근태의 그림에는 온통 일그러진 아이들 얼굴들만 나온다. 맞다. 그림 속 주인공들은 모두 정신지체아들이다. 지난 20년 동안 제 몸도 가누지 못해 몸이 뒤틀리고 얼굴이 일그러진 아이들만 그려왔다. 1994년부터 '들꽃처럼 별들처럼'이라는 주제로 지적 장애인의 이야기를 화폭에 담아온 화가다.
꼬박 3년 걸려 100미터 대작 <들꽃처럼 별들처럼> 완성김근태도 초기에는 아름다운 풍경 등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그가 화가로서 변화를 하게 된 배경에는 두 번의 방랑과 두 번의 운명적 만남이 있다.
대학 졸업 후 김근태는 1983년 전남목포 문태고등학교 미술교사로 발령났다. 하지만, 교육자로서 품행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술과 방탕,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주위와 어울리지 못했다. 그는 "원인 모를 정신적 혼란과 방황, 답답함이 치밀어 올랐다"고 회상한다.
결국, 학교 교사를 5년 만에 스스로 그만두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자유로워진 그는 그림에 몰두해 국선에도 입선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에 시달렸다. 돈과 인맥이 있어야 더 큰 상을 받을 수 있는 상납 제의도 받은 뒤였다. 외우다시피 해 기교만 늘고 영혼 없는 그림에 대한 회의도 느껴졌다. 그는 미련 없이 프랑스로 떠났다. 영혼이 담긴 그림에 대한 갈망, 무너질 대로 무너진 자아를 찾고 치유하는 여행이었다. 그의 부인은 돈을 대출해 매달 학비와 체류비를 송금했다.
유학을 다녀 온 후 그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천착한다. 인물의 내면을 탐구하면서도 늘 무언가를 갈구하고 쫓고 있었다.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끌어 오르는 '복잡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유도 몰랐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된다. 대학 4학년 때 겪은 5·18광주민중항쟁 때문이었다는 것을.
당시 그는 20여 명으로 구성된 사태수습위원으로 참여했다. 무기를 나르고 총칼에 짓이겨진 시체를 책임지는 역할이었다. 잊은 줄 알았던, 아니 잊고 싶었던 당시 그 사건의 후유증이 내면에 깊게 쌓인 채 남아있었다. 산 자로서 느끼는 허무와 나약함, 책임감이 트리우마가 되어 있었다. 같은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향해 저지른 살상의 기억은 인간이란 존재에 천착하게 한 것이다.
이후 가장 소외되고 낮은 곳을 찾아 떠났다. 그가 찾은 곳은 목포 앞바다 작은 섬 고하도에 있는 목포공생재활원이었다. 지금도 그는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아이들의 일그러진 얼굴이 그토록 예뻐 보이고, 냄새마저 달콤했다. 그 아이들을 만난 순간 바로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한다.
그곳에 3년을 머물며 계속 그림을 그렸다. 150여명의 정신지체아들에게 그림을 지도하고 때론 집으로 아이들을 데려오기도 했다. 김근태를 "아빠"라고 부르며 품으로 달려드는 아이들의 얼굴을 그렸다. 그의 부인은 스케치북이 동났다고 하면, 사들고 찾아갔다.
주위에서는 "왜 그런 그림을 그리냐"고 핀잔을 주고, 그림 한 장 사주지 않았다. 그러나 김근태는 그림을 통해 장애인들의 환한 웃음에서 희망을, 살고자 하는 몸부림에서 존재의식을, 고통스런 얼굴에서 세상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묵묵히 그려냈다.
조금씩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자 그는 다시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떠난 곳이 인도였다. 지난 2003년에는 공동체 생활을 위해 시골 폐교로 들어간다. 일종의 피난처였다.
"그림 속 주인공 몇 명은 이미 하늘의 별로..."
3년 만에 다시 세상에 나온 그는 다시금 장애인의 얼굴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화가 김근태의 전시회 이름은 늘 그대로다. <들꽃처럼, 별처럼>. 들꽃과 별은 김근태의 상징어이자 그가 지금껏 그려온 아이들의 존재이기도 하다. 장미꽃처럼 화려하지 않아서 그냥 지나칠 수 있고 관심 있게 봐야만 눈에 들어오는 들꽃, 밤하늘에 아름답게 반짝이는 '별'은 모두 그가 그린 아이들이었다.
장애인 아이를 자식으로 둔 부모들은 "내 자식이지만 부끄러워서 숨겨놓고 살았는데 화가의 그림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니 눈물이 난다. 끝까지 내 아이를 그려줄 수 있냐"고 수차례 되물어 왔다.
화가 김근태는 "인간은 누구나 잘 나고 못난 조건을 갖고 있다. 생명의 존엄성, 생명 자체가 소중하고 귀하다. 생명의 본질에 대한 사랑"이라고 답했다. "계산하고, 포장하고, 으스대지 않는, 아니 정신지체아가 지닌 낮은 지능으로는 그럴 겨를도 없었기에 순수한 영혼의 대화가 가능하다"며 장애인을 둔 부모들을 위로했다.
그는 지금껏 지적장애인이 주인공으로 나온 그림을 총 3점 팔았다. 하지만 돈과 명예 대신 그는 영혼을 울렸다. 그의 그림은 내면의 영혼과 인간에 대한 순수한 존엄의 결과물이다.
"지적장애라는 아픔을 안고 있는 아이들과 함께 하며 극복의 대상인 장애가 아니라 긍정과 인정하는 공동체 일원으로 이끌어가는 작가의 예술혼에 담긴 깊은 뜻이 거친 바람에 제 몸을 뉘일 줄 아는 들풀의 지혜를 일깨운다." - 한국미술센터 이일영 관장"화가 김근태에게 교감이란 마음을 나누고 손짓과 발짓으로 표현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해주는 아주 단순한 행위다. 그 경청이 그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생각을 바꾸고 이제는 그림으로 그들을 말해주고 있다." - 서성록 안동대 미술학과 교수"막걸리를 마시고 취해 김근태의 그림 앞에서 하루 종일 춤추고 노래부르고 싶다. 빈센트반 고흐보다 더 위대하다. 이 그림은 심장으로 보는 그림이다." - 박재동 화백화가 김근태의 작업을 거들기 위해 교직에서 퇴직한 그의 부인은 "화가 김근태는 미술계에서는 소외되고 정말 외로운 사람이다. 작가에게 정신이 중요하다. 누가 사주지 않아도, 알아주지 않아도 20년 동안 묵묵히 작품을 성숙시키고 도의 길을 가는 모습이 경이롭다. 이런 화가 한 명 정도 있어야, 되지 않겠나"라고 했다.
"김근태의 그림은 심장으로 보는 그림... 장애인이 UN 중심에 선다"이제 그의 그림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UN본부에 걸린다. 아니,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장애인들이 세계의 중심에 당당히 선다.
UN전시회는 지난 2013년 1월 이낙연 현 전남도지사가 김근태의 무안군 임성리 작업실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어 추진됐다. 화가 김근태가 지난 2012년부터 시작한 100미터 길이의 대작을 직접 본 뒤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오준 UN대표부 대사, 반기문 총장 등의 도움으로 전시회 일정이 확정됐다. 전시 일정은 세계장애인의 날인 12월 3일에 맞춰서 11월 30일~12월 11일로 잡혔다.
김근태의 UN 전시가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정신지체장애인을 그린 데다가 전시될 작품은 대작이다. <들꽃처럼 별들처럼>은 100호 캔버스 77개를 이어붙인 총 길이 102.4미터에 이르는 대작다. 꼬박 1년 반을 스케치하고 3년이 걸려 작품을 완성했다. 이는 그가 걸어온 길을 형상화한 고통스러운 작업의 결과물이다.
지난 3년은 매일같이 자신과의 고통스러운 싸움의 연속이었다. 어떤 날은 몸살로, 체력이 바닥 나 쓰러지기도 했다. 유화 특성상 첫 겹은 바탕칠을 하고 밑그림을 그려 넣은 뒤에도 다양한 회화적 효과를 주는 바림칠, 겉칠을 하는 등 대여섯 번의 덧칠을 그려야 한 점의 작품이 완성된다.
김근태의 대작 <들꽃처럼 별들처럼>은 비발디의 사계에서 영감을 얻어 캔버스를 악보로 장애인을 음표로 표현했다. 남도의 사계절과 자연을 배경 삼아 장애 편견을 없애는 조화와 공존하는 세상에 대한 염원은 지난 3년 동안 100미터의 화폭에 담았다.
화가 김근태는 대작 작업 마무리를 앞둔 최근 그림 속 주인공을 찾아갔다. 그러나 이미 그림 속 주인공 중 몇 명의 아이들은 죽고 없었다. 그가 말하는 하늘의 별로 사라졌다. 그래서 그는 소망한다.
"화가의 그림은 공익적 가치와 사회적 기여가 있어야 한다. 그림을 통해 좀 더 좋은 세상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장애인이 담긴 그림을 공공건물에 걸어야 한다. 왜 우리는 나무와 꽃만 걸어야 하는가. 내가 그리는 유화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벽화로, 타일화로 만들어 늘 보면서 장애인들과 친해지고 익숙해져서 결국에는 담장을 허물고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이다.""장애인예술학교를 만들어 장애인들이 함께 어울리는 공동체, 장애인이 화가가 되는 예술인 공동체를 운영할 계획이다. 내가 죽더라도 후배들이 그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도록 하겠다.""그들은 몸이 불편하지만, 우리는 마음이 불편하다. 이 불편한 진실 앞에 작은 붓질로 서로의 조화와 균형을 맞추는 움직임, 서로를 끌어안는 아름다운 동행이 나의 그림이다. 이렇게 나는 100미터를 채워갔다."그가 장애인을 화폭에 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