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반 도시 우다이푸르 두 번째날시간이 나는대로 숨막힐 정도로 적막한 피촐라 호수가에 앉아 있었다. ⓒ 윤인철
세밀화와 볼리우드인도 최고의 신혼여행지에서 나는 사랑하는 신부가 아닌 낯선 유목민들과 첫날밤을 보냈다. 그 기분은 정말 짜릿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첫 경험이다. 만나는 모든 사람을 첫 경험의 설렘으로 대한다면 삶은 건전한 에로틱이 될 것이다. 살짝은 수줍으면서도, 호기심 어린 눈은 자주 가게 되는, 보일 듯 말 듯 들킬 듯 말 듯 모든 것이 외줄타기마냥 조심스럽고 초조하게 되는 건전한 에로티시즘! 사람을 그렇게 만나면 난 변태가 될까? 아니면 뜨거운 사람이 될까?
아침 9시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이곳에서 우리 방을 찾아올 사람은 없는데? 누구지? 어젯밤 과음으로 잠에 취해 있던 우리는 후다닥 옷을 대충 걸치고 문을 열었다. LG 주재원 부부였다. 그들은 우리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라이프 이즈 굿(Life is good)?"
부부는 지금 우다이푸르의 명물 세밀화를 사는데, 함께 가자고 했다. '맞다. 어제 밤에 세밀화를 사러 같이 가자고 했지.' 우리는 세밀화 가게에 먼저 가 있으면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하고 뒤따라가겠다고 하였다.
부부를 보낸 후 우린 속을 풀기 위해 정말 닝닝한 맛의 짜xx티를 시켜 먹고, 더 뒤틀어져 버린 속을 쓸어내리며 밖을 나서야 했다. 인도에는 한국 배낭족들이 많아 한국산 라면을 어느 도시에서도 쉽게 먹을 수 있었는데, 한국에서의 맛과는 좀 차이가 있었다. 제품 자체가 다른 것인지, 조리를 하는 요리사의 손맛이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다.
세밀화 가게에 앉아 LG 부부의 안내로 세밀화의 멋에 눈을 뜨게 되었다. 대부분의 세밀화는 힌두의 다양한 신들, 인도의 역사적인 인물과 풍속, 동물 등을 표현한 것이 주를 이루었다. 돋보기를 쓰고 아주 세밀하게 그린 그림이 초보자인 나의 예술적 감수성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1000RS를 주고 말, 낙타, 코끼리를 낙타 뼈에 그린 세밀화를 구입하였다. 종이에 그린 세밀화와 낙타 뼈에 그린 카멜본(Camel bone)의 가격 차이가 상당히 컸다.
부부 사랑 전도사 병오형은 2800Rs를 주고 타지마할의 주인공인 샤 자한이 뭄타즈를 뒤에서 다정하게 안아주고 있는 세밀화를 구입했다. 처음에는 샤 자한과 뭄타즈가 각각 다른 코끼리에 올라탄 채 서로를 애틋한 눈빛으로 마주보고 있는 세밀화를 구입하려 했는데, 이미 LG부부가 구입한 터라 어쩔 수 없이 다른 세밀화를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를 가나 병오형의 아내 사랑과 부부 예찬은 식을 줄을 몰랐다. 가끔 부부 사랑 전도사님의 말씀을 듣다보면, '사랑'의 경계를 넘어 '19금'으로 아슬아슬하게 줄 타는 경향이 없진 않았지만, 그 속에는 아름다운 성(性)을 음지에서 양지로 꺼내 담론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인간 사랑이 담겨 있었다. 나는 병오형의 에로티시즘을 사랑한다. 이제 형의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는 일만 남았는데, 음~ 그것이 쉽지만은 않다.
구입한 세밀화를 액자에 넣어달라고 부탁한 후, 릭샤를 잡아 장인 민속촌인 '쉼라'로 향했다. 이목구비가 시원스레 조합되어 있는 릭샤 왈라의 얼굴이 간다라 조각상을 닮아 있었다. 그 눈빛에서는 상대방을 압도하는 포스까지 느껴졌다. 장호는 친절하면서도 카리스마가 넘치는 릭샤 왈라에게 자이살메르 성 안에서 구입한 선글라스를 선물했다. 선글라스에 붙은 브랜드는 명품이었는데, 그 가격과 성능은 길거리 짝퉁이었다.
우리가 준 선글라스를 착용한 릭샤 왈라는 얼굴에 쭈글쭈글 미소 주름이 번지며 패션쇼를 벌이기 시작했다.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허연 이를 드러내며 본인 딴에 멋진 포즈를 취했다. 우리는 기고만장한(?) 그의 모습을 호들갑스럽게 카메라에 담았다. "오~ 굳, 하하 굳(Oh~ good. Haha good~)" 우린 한순간 인도 볼리우드의 주연급 스타를 만난 듯 마음이 한없이 들떴다. 하지만 깃털처럼 가벼워진 우리와 달리 그는 포스를 잃지 않은 채 꼿꼿이 서 있었다. 그는 눈으로 우리에게 말했다.
"아야~, 나이 값 좀 해라. 촐싹거리지 좀 말고." 옹골찬 사람
▲민속촌 쉼라1인도의 전통춤 공연장에 난입하여 한국의 춤사위를 뽐내었다. ⓒ 윤인철
▲민속촌 쉼라2민속촌 내에서 세밀화를 팔고 있는 상인! 우다이푸르에 오면 세밀화 하나쯤은 꼭 가방에 챙겨 간다. ⓒ 윤인철
장인 민속촌은 신기한 곳이었다. 우리가 그들의 공연과 전시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이 외국인인 우리는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주객이 전도된 느낌? 전통 가옥과 인형극, 민속춤을 추는 무희의 공연을 보았다. 무희들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들썩거리는 어깨춤에 놀라 몸이 가는대로 무대 위로 올라갔다.
얼쑤! 좋다. 펄쩍펄쩍 뛰고 한 바퀴 돌고 얼굴 마주보고 웃고……. 장호는 그런 나를 보고, "참 오지랖도 넓으유!"라고 핀잔을 주었다. 장호는 오전에 세밀화를 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는지, 좌판처럼 길가에 자리잡은 한 세밀화 가게에서 세밀화를 세트로 대량 구입하였다.
천변에 자리잡은 작은 한식당 리틀 프린스에서 중식을 했다. 여기에서 지난 4년 동안 한 번도 음식을 남긴 적이 없었던 환경주의자 병오형이 잡채밥을 남긴 충격의 현장이 목격되었다. 우린 이 장면을 증거로 남기기 위해 기념사진까지 찍으며 희희낙락거렸다. 음식을 남겨 놓고 이렇게 힘들어하는 형님의 모습은 처음이다. 잡채에 들어가 있는 인도 향신료들, 고 녀석 참 대단하다. 병오형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모든 음식을 가리진 않지만... 음..."하며 이런저런 변명을 하였다. 하여튼 환경주의자 병오형은 인간의 탐욕과 소비로 환경이 나빠지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곧은 사람이다.
▲천변의 작은 한식당 리틀 프린스병오형이 향신료 가득한 인도 음식 앞에 자신의 신념을 무너뜨렸다. ⓒ 윤인철
사람들은 병오형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동안 살면서 이렇게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삶을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내가 곁에서 본 병오형은 지행합일 뿐만이 아니라 가슴으로 사람을 담고,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이다. 1회용 종이컵을 자제해 달라, 음식을 절대 남기지 말라, 인스턴트는 되도록 삼갔으면 좋겠다 등 형은 자신이 속한 곳에서 일상 속의 작은 환경캠페인을 벌였다. 당연히 그런 말을 뱉기에 앞서 본인 스스로 그런 삶을 실천했다. 학교 내에서 사회에서 불의에 맞닥뜨리면 제 위치에서 저항하고 분노하며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몸부림쳤다.
어떤 이들은 이런 병오형을 향해 "자기 혼자 환경을 사랑하는 것 마냥 티낸다.", "잘난 체 하며 나댄다." 등의 비난을 하기도 했다. 이런 비난에 상처도 받을 만하건만 항상 형은 "제가 부족해서 그렇죠. 죄송합니다. 그리고 사랑해요!"라고 응대한다. 내 딴에는 가끔 그런 병오형이 너무 우직하고 바보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심성을 가진 분이기에 나는 형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행하는 도중에 반진담 반농담으로 "형,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너무 빡빡하게 그러지 마"하며 타박을 주면 그것을 마음에 담아 곰곰이 생각하고 성찰하였다.
형이 좋아하는 표현이 '옹골차다'이다. 옹골차다는 사전에서 '다부지다, 야무지다, 단단하다, 오달지다, 알차다, 짱짱하다'와 유사한 의미라고 나온다. '올해는 이삭마다 벼 알이 옹골차다.' 병오형은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옹골찬 사람'이다. 자신보다 남을 위해 더 마음을 쓰는 이타주의자, 박병오!
봄 햇살처럼 포근함이 우리를 꼬옥 감싸 안았다. 아~, 이 나른한 기분! 우린 어제에 이어 피촐라 호수가로 가서 속된 말로 '멍 때리는 시간'을 갖기로 하였다.
"잠시 인도 소가 돼 보는 거야." 배낭여행의 묘미는 역시 스케줄에 얽매이지 않고 멍 때리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는 것! 호숫가 따뜻한 강변에서 잠들어 있는 소, 목욕하는 아저씨, 빨래하는 할머니와 머리 감는 아가씨, 그리고 인도 어디서나 빠질 수 없는 걸인과 구걸! 사진을 찍다가 빨래를 하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이상한 녀석, 예절 없는 여행객으로 쳐다보는 할머니는 노여워하는 눈빛과 빨래 방망이로 강한 메시지를 나에게 전달했다.
"시방 뭐 하는 거여? 찍지 말랑게!"
▲한가로운 피촐라 호수가의 일상따뜻한 햇살 아래 여인들이 호수가로 나와 머리를 감고 빨래를 하고 목욕을 했다. ⓒ 윤인철
나는 이런 여행이 너무 좋다. 주제도 없고 계획도 없고 사진 찍고 서둘러 돌아갈 일도 없는 무료한 여행! 나는 혼자 어제 방문했었던 힌두 사원 작쉬 만다르를 다시 찾았다. 계단 꼭대기 왼편 오른편에 나란히 자리 잡은 코끼리상 아래에 푹 눌러 앉아 형태도 없고 이미지도 없는 곳을 보고, 느끼고, 음미하였다.
이 낯선 시간, 그리고 소리 없는 소음과 냄새 없는 악취. 사원 아래에서 한 아름 꽃을 사서 사원으로 향하는 인도 여인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나의 시간은 이곳에 오기로 결정되어 있었으며, 오늘 이 자리에 앉는데 수천년 인연의 겁의 쌓여왔을지도 모른다는 인연을 생각했다. 나는 힌두교도였다.
병오형이 액자로 만들어달라고 요청한 세밀화를 찾으러 오전에 세밀화를 샀던 가게에 갔다. 그런데 갑자기 주인아들이 형이 그렇게도 간절히 원했던 코끼리 위의 샤 자한과 뭄타즈를 표현한 세밀화를 꺼내는 것이었다. 이미 형은 꿩 대신 닭의 심정으로 산 세밀화를 액자에까지 넣어 비용을 지불한 상태 아니던가? 형은 그림을 보자마자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기 시작했다. 세밀화 가게를 나오며 형님은 먼발치를 바라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형은 우리에게 괜찮다, 괜찮다 했지만 결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두 시간 내내 병오형은 초점을 잃은 눈빛으로 먹먹하게 인도 거리를 걸었다. 옆에서 그 찜찜한 기분을 어떻게든 해소시켜주려는 장호는 "형, 그럼 바꾸러가자. 내가 아는데 형은 나와 비슷해서 계속 찜찜할 걸?" "아니라니까." "에이, 아닌데 뭐." 결국 우리 셋은 그 가게를 다시 찾아 오전에 산 세밀화에 웃돈을 얹어 병오형이 간절히 원하는 세밀화와 바꾸자고 했다.
서로 의사소통이 되는지 안 되는지도 모를 영어로 옥신각신 하더니, 결국 주인은 바꿀 수 없다며 긴 줄다리기에 마침표를 찍었다. 상황을 유심히 둘러본 주인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싸게 줄 테니, 이것까지 구입하는 게 어때?" 찜찜한 병오형. 아침에는 도저히 구입할 수 없다던 그 그림이 어떻게 내 앞에 있는 것이야? 원한다면 또 구입하라고?
편견을 버리면 인도가 보인다오늘밤 기차로 우다이푸르를 떠나 아그라로 향한다. 우다이푸르는 형체가 있는 그 무언가를 찾는 여행자들에게는 그리 매력이 없는 도시일 것이다. 아마도 사랑에 빠지기 시작한 연인, 혹은 오랜 시간 동안 누룩을 넣고 발효시켜 만들어진 막걸리 같은 사랑을 해 온 늙은 부부, 짝이 없이 홀로 이곳을 찾은 싱글녀들에게 우다이푸르는 기대만큼 큰 선물을 안겨줄 것이다.
이렇게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에는 뭔가가 아쉬운 병오형을 따라 귀족의 저택인 하벨리로 갔다. 시티 팰리스와 같이 저택을 박물관으로 꾸며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곳에 전시된 그림과 물품들은 대부분 왕족의 화려함을 뽐내는 시티팰리스와 달리 결혼하는 모습 등 정감어린 서민의 모습을 담은 것들이었다.
대부분의 박물관은 입장료와 함께 카메라 사용권을 함께 구입해야 했다. 조드푸르의 메헤랑가르 성이나 우다이푸르의 시티 팰리스 모두 카메라 사용권을 비싸게 구입한 후 자유롭게 사진을 찍었다. 그런 경험을 통해 우리는 구태여 '카메라 사용권을 끊지 않아도 되겠네.'라는 지혜를 얻을 수 있었다. 역시 인간은 경험을 통해 빠르게 학습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우린 카메라 촬영권도 없이 자유롭게 셔터를 눌러댔다. 그때 갑자기 그곳을 관리하는 한 여인이 사진을 찍고 있는 장호를 발견하더니, 'No'라고 제재를 하였다. 우리는 'Sorry. Sorry.'하며 사과를 청했고 손에 들고 있는 카메라와 핸드폰을 재빠르게 가방과 호주머니에 넣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그 후 장호는 나에게 망을 보고 있으라며 계속 사진을 찍었다. 이런 나쁜 여행자를 어떻게 응징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벨리 옥상에서 피촐라 호수의 석양을 보았다. 유람선 한 척이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랄가트 게스트 하우스에 맡긴 짐을 찾아 우다이푸르 시티 역으로 향했다. 우리가 잡은 릭샤 왈라는 품에 나이 어린 딸을 안고 있었다. 아빠 품에 안겨 있는 딸을 보며 훈훈한 감동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고국에 있는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잔잔히 스며들었다.
"네 딸은 너무 귀여워(Your daughter is so cute)!" 굳은 얼굴로 이방인에 대한 마음의 끈을 놓아주지 않는 그 아이에게 10루피를 주며 '꼭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방긋 인사를 건넸다. 이 아이가 장성한 시기의 인도가 지금보다 더 행복한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취장사단(取長捨短)! 지금의 인도를 모두 부정하지도 모두 긍정하지도 말고, 장점은 취하되 단점은 도려내는 미래가 기다렸으면 좋겠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인도가 변한다고 한다. 몇 해 전에 인도에 다녀온 여행객은 이제 더 이상을 인도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본 것은 변화하는 인도가 아니라 정지된 인도일 것이다. 인도는 살아 있다. 인도 여행의 후기는 극대 극이라고 한다. 정지된 인도를 원한다면 실망감이 클 것이요, 변화하는 인도를 편견 없이 바라본다면 경이로움의 연속일 것이다. 편견을 버리면 인도가 보인다.
▲우다이푸르에서 아그라 행 기차를 타다.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를 향해 떠났다. ⓒ 윤인철
22시 20분, 기차에 몸을 실고 타지마할의 도시 아그라로 향했다. 이제 조금씩 장거리 인도 야간열차에 익숙해진다. 객차 베드에 누워도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덧붙이는 글 | 본 글은 중고등학교 현직 교사 세 명이 2014년 1월, 한 달간 인도를 여행한 기록입니다. 델리에서 자이살메르, 우다이뿌르, 조드뿌르, 아그라, 바라나시, 맥그로드 간지 등 인도 중북부를 방문했습니다. 단순히 '관광'이 아니라 '사색과 반추, 철학'이 있는 '여행'에 관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