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이른 연산홍이 핀 지 열흘은 된 것 같은데 아직도 베란다에서 매일 퇴근하는 나를 반겨준다. 연산홍보다 늦게 핀 군자란은 하나씩 뚝뚝 떨어지고 있는데, 꽃잎 하나 손상되지 않아 곱기만 하다. 아까운 마음에, 떨어진 군자란들을 둥그렇게 포개어 연잎 항아리에 담구었더니 물 속에서 핀 꽃같다.
며칠 전, 그렇게 한창 핀 군자란 같은 충북 연극계의 거목 한 분이 돌아가셨다. 극단 새벽의 대표 이상관 선생님이다. 배고프고 힘겨운 후배 연극인들과 예술인들이 공연을 하고 무대 뒤로 나오면 그들의 땀을 닦아주던 다감하신 분이었다.
그 분을 나는 마음으로 존경했다. 종종 서울에서 문화예술 교육프로그램 기획자 워크숍 때 만나 같이 교육을 받기도 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것은,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소망을 담아 우리 모둠팀이 발표를 할 때 그 분이 인자하게 웃으셨던 것이다.
한창 일할 나이인 향년 51세다. 연극인으로 현장에서 연기를 하면서 공연을 기획하고, 후진을 가르쳤다. 연극단체의 대표 일도 하며, 연극인들의 공연과 교육을 주로 하는 협동조합의 어려운 일도 도맡아 했다. 삼남매의 좋은 아버지였으며 자상한 남편이었다. 그리고 주말에는 조그만 텃밭을 이루면서 소박하게 살아갔다.
그렇게 참 좋으신 그 분이 텃밭 일을 하다가 갑자기 쓰러지셨다. 전날 오후만 해도 이웃 주민과 덕담을 나누셨는데... 그 다음 날 텃밭의 나무 아래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고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막걸리를 좋아하던 그는 고혈압이 있었다고 한다.
충북연극계는 충북 최초 충북연극장으로 9일 그 분의 장례식을 치렀다. 그 분은 1991년 극단 '새벽'을 창단했으며 '비목', '오셀로', '이수일과 심순애', '도둑들의 잔치' 등의 작품에서 공연하였으며, 충북민예총 연극위원장, 2000년 충북연극제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한 충북연극계의 리더였다.
나는 연극인으로서 아깝게 일찍 먼 길로 가신 그 분보다, 남은 사람에게 마음이 더 짠하다. 비슷한 나이에 내가 여성가장으로서 하나씩 어렵게 헤쳐가야 했던 고단한 일들이 덩달아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기획하는 연극프로그램을 처음으로 여자교도소에 보급할 때 만사 제치고 열과 성을 다하며 주강사로 활동한 그 분의 아내. 그 분 또한 연기자이면서 교육활동을 하는 강사와 엄마, 아내, 며느리 1인 5역을 하였는데 이제 가장이란 역할까지 1인 6역을 해야 하니까...
이렇게 예측 못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인생인 것을 어이하랴. 언젠가는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냥 허허롭고 안타깝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