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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의 행운

요즘 내 일과 중 하나는 <오마이뉴스>에 들어가 김삼웅 선생의 '조지훈 평전' 연재를 살펴보는 일이다. 평전의 내용은 대부분 익히 알고 있었던 시와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 그것을 반복 학습하면서, 은사에 대한 아련한 추억과 그 분이 남기신 체취를 김삼웅 선생의 해박하신 필치로 새삼 알뜰히 맛보고 있다.

사람은 저마다 제 잘난 맛에 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과 가르쳐주신 스승님 때문에 오늘이 있는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십수 년 많은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대학 시절에 조지훈 선생님에게 2년 남짓 배운 것은 대단한 행운이요, 영광이었다. 굳이 행운이라고 말한 것은 선생의 마지막 제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선생은 1968년 5월 17일에 영원히 잠드셨는데, 내가 대학 3학년 때였다.

대학 입학 후 1학년 때는 '작문'과 '교양 국어'를, 2학년 때는 '문학 개론'을 조지훈 선생님께 배웠다. 문학 개론 강의시간에는 심한 기관지염 때문에 자주 기침하셨던 것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스승의 '다부원에서' 시비 곁에서 필자
스승의 '다부원에서' 시비 곁에서 필자 ⓒ 박도

첫 만남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

-<승무> 中

고등학교 때 <승무>를 배우면서 경이로움에 빠졌다. 이렇게 우리말이 아름다울 수 있으랴. 시선(詩仙)의 경지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시를 토해낼 수 있으랴. 마치 그윽한 한 편의 승무를 눈앞에서 보는 듯했다.

이 시를 가르쳤던 고교 은사 유인식 선생님은 마냥 신이 나서 나비처럼 춤을 추셨다. 그때 조지훈 선생은 나의 우상이었다. 그런 가운데 내가 선생을 처음 뵌 것은 고2 가을이었다.

그 무렵 나는 학교 문예반 반장이었는데 지도 교사이셨던 박철규 선생님은 조지훈 선생님을 초빙해 문학 특강을 열어주셨다. 그때 지훈 선생은〈승무〉시작 과정을 자세히 말씀하셨다. 

선생은 이 한 편을 쓰기 위해 2년여 시유(詩庾 : 시를 창작하는 과정에서 앓는 병)를 앓으면서 최승희 춤과 김은호 화백의 <승무도>를 감상하셨다 했다. 수원 용주사로 달려가서 달밤에 승무를 보고서도 완성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구황실 아악부의 <영산회상> 가락을 듣고서야 이 시를 쓸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선생의 훤칠한 용모와 시원한 음성, 진지한 모습이 굵은 테 안경과 함께 지금도 또렷이 남아 있다. 학(鶴)처럼 우아하고 고고(孤高)한 선비의 모습이었다.

두 번째 만남

대학 시절에는 지훈 선생을 자주 뵐 수 있었다. 구자균 선생 묘소 참배 겸 신입생 환영회 때, 지훈 선생은 먼저 막걸리 한 바가지를 당신이 들이키신 다음 신입생 모두에게 돌렸다. 나는 그 바가지 막걸리를 호기 있게 받아 마신 후, 눈을 떠보니 서울로 돌아오는 학교 버스 안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선생의 멋진 '농무(農舞)' 춤사위를 다시 보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선생이 천수를 다 누리지 못한 까닭 중에 하나도 자주 제자들과 밤새워 마신 술 탓이라고 할 만큼 술과 제자를 좋아하셨다. 강의 시간 중 때때로 당신 시집을 펼치시고는 굵은 저음으로 낭독했다.

마음 후줄근히 시름에 젖는 날은
동물원으로 간다.

사람으로 더불어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짐승에게라도 하소연해야지.

난 너를 구경오진 않았다.
뺨을 부비며 울고 싶은 마음
혼자서 숨어 앉아 시를 써도
읽어 줄 사람이 있어야지.

쇠창살 앞을 걸어가며
정성스레 써서 모은 시집을 읽는다.

철책 안에 갇힌 것은 나였다.
문득 돌아보면
사방에서 창살 틈으로
이방의 짐승들이 들여다본다.

<여기 나라 없는 시인이 있다>고
속삭이는 소리...

무인(無人)한 동물원의 오후 전도(顚倒)된 위치에
통곡과도 같은 낙조가 물들고 있다.

- <동물원의 오후> 中 

그 무렵 선생은 '정치 교수'로 몰려 대학을 떠났다. 선생이 없는 대학은 텅 빈 듯했다. 선생이 다시 강단에 돌아왔을 때는 심한 기관지염을 앓았다. 그래서 2학년 2학기 선생의 <문학 개론>은 한 학기 동안 두 시간밖에 듣지 못했다. 나는 선생의 시 가운데 그 무렵 쓰신 '병에게'를 가장 좋아한다. 병을 향한 조용한 속삭임에는 그분의 달관한 삶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虛無)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즉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 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 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에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리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 그려.

- <병에게> 中 

세 번째 만남

 <약속> 표지
<약속> 표지 ⓒ 눈빛
2010년 10월, 나는 고향 친구와 함께 경북 칠곡의 다부동 전적기념관에 갔다. 그 무렵 막 집필하기 시작한 나의 소설 <약속> 배경지 현장 답사 길이었다.

기념관을 다 둘러보고 광장으로 나오자 선생의 시비 <다부원에서>가 오석에 새겨져 있었다. 나는 문득 45년 전 대학 1학년 때 선생께서 들려주던 그 음성이 내 귓전을 울렸고, 아울러 작품 영감으로 용솟음쳤다.

한 달 농성 끝에 나와 보는 다부원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 공방의 포화가
한 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아, 아, 다부원은 이렇게도
대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고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
자유의 국토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한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황폐한 풍경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령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바람에 오히려
간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1950. 9. 26.)

- <다부원에서> 中

이밖에도 선생님께서 한국 전쟁 당시 종군 시인으로 포연 속에 쓰신 '절망 일기', '죽령 전투', '너는 지금 38선을 넘고 있다' 등은 내 소설 <약속>의 창작 배경과 영감이 됐다.

스승은 가셨어도 스승의 위대한 작품은 그대로 남아 못난 늦깎이 작가의 창작 배경과 영감으로 작품을 쓸 수 있게 함에 감읍하면서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스승의 그림자도 밟을 수 없는 나의 왜소함이여.


#조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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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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