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등학교 다닐 당시 교실에 연탄난로 달랑 하나 있고 점심시간 전에 아이들이 도시락을 그 난로 위에 올려놓았다가 시간이 되면 신나게 퍼먹던 시절이 생각난다. 참 오래 전 일이다. 그런 시절이었으니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가난한 학생도 있었던 것 같다.
그중 한 친구가 생각난다. 점심시간이 되면 슬며시 나가 수돗물을 마시거나 혼자 어딘가 나가 있다가 공부 시간이 되면 제자리에 돌아와 앉았던 친구가 있었다. 나는 처음에 그런 친구가 우리 반에 있다는 사실 자체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런데 교실에서 까불며 놀기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친구들의 밥을 한 젓가락씩 공출하고 반찬도 그런 식으로 주어 담으면서 돌아다녔다. 워낙 까불던 친구여서 제 배를 더 채우려고 그러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런 식으로 공출한 밥과 반찬을 가지고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친구와 더불어 자기 밥을 가지고 나누어먹는 것처럼 하면서 먹이곤 했다. 그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처음에 교실에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였고, 나도 역시 전혀 알지 못하였는데, 상당한 세월이 지나서 옛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 이야기가 화재가 된 적이 있다.
고1 정도 된 시절의 이야기였으니 매일 점심 때 친구들의 밥을 그런 식으로 얻어먹는 일에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걸 아는 까불이 친구는 알고 보니 자존심을 건들이지 않으면서도 친구의 점심을 해결해주던 매우 속이 깊은 친구였다.
생각해보면 가난했던 그 시절의 슬픈 이야기이다. 오늘 의무급식 문제로 사회가 떠들썩한 지금 왜 저 과거의 슬펐던 어린 시절이 상기되는지 모르겠다. 우리 민족은 수천년 동안 단일민족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것이 장점도 되지만 때로 그것 때문에 불편한 점도 있다. 한국인들은 남과의 비교를 잘 하고 남의 눈치를 잘 보는 성향이 있다.
오랜 문화와 역사와 언어를 공유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남의 속마음을 꿰뚫어보는 것도 남다르게 발달되어 있다. 남이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길게 대화하지 않아도 잘 알기 때문에 저 사람이 잘난 채하면 그 즉시 꿰뚫어보는 눈치도 발달해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남과 자기를 잘 비교하는 습성도 있다. 좋게 말하면 평등의식이 강한 것이지만 이런 성향 때문에 부당하게 차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만 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습성도 있다.
대한민국의 경제가 발달하여 걸핏하면 OECD국가들과 비교하는 것을 본다. 경제가 발달하였다고 하나 복지수준은 OECD국가 중에서 꼴찌라는 지표가 사방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겨우 얼마 전부터 의무급식을 천신만고 끝에 시행하게 되었다.
지금의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에서는 "왜 이건희씨와 같은 재벌의 손자까지 무상으로 점심밥을 주느냐"라면서 점심 밥은 가난한 사람에게만 공짜로 주고 돈 있는 부자들은 돈 내고 밥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견 그럴듯한 논리처럼 보이지만, 이 논리에는 돈으로 계산하는 경제는 있을지 모르나 더 중요한 교육이 빠져있다. 앞에서 내가 든 내 어린 시절의 예처럼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는 문제에 있어서만은 경제논리로 생각하지 말고 교육적으로 생각했으면 한다.
재벌의 손자가 공짜로 밥을 먹게 되는 것이 그렇게 배가 아프면 그 재벌이 손자의 친구들을 위해 급식비를 좀 사회에 기부하는 미담이 생겨난다면 얼마나 더 아름답고 교육적일까? 가난하든 부자든 밥 먹는 일만은 자존심 상하지 않고 떳떳하게 먹을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경남지사는 차별급식을 하되 급식비에 들어가는 돈을 더 가난한 아이들에게 교육비로 전환해서 사용할 수 있게 한다고 한다. 개천에서 용 나게 만드는 일은 이제 한국에서 오로지 교육밖에 없으니 차별급식을 하되 남는 돈으로 가난한 아이들에게 교육비로 전용해서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 돈을 받기 위해 가난을 증명하는 번거로운 일을 해야 하며 그렇게 해서 선발된 사람이 그 얼마간의 돈을 받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번에는 부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또 째지게 가난한 아이도 아닌 계층의 아이들이 무더기로 생겨날 것이 틀림없다.
그러면 이 공짜로 주는 급식, 이 공짜라는 말이 정말 더럽게 들리긴 한다. 해방 후 의무교육을 한지 수십 년이 지나서 처음 실시한 복지문제, 걸핏하면 OECD국가와 비교하는 선진국인양 떠드는 나라에서, 더욱이 위에서 말한 한국인의 역사와 문화적 전통에서, 자라나는 새싹들의 먹는 문제를 가지고 공짜로 밥 먹이는 일이 그렇게도 국가경제를 좀먹고 해롭기만 한 일일까? 언제부터인가 서민들의 주머니가 텅텅 비어가는 지금, 이 무상급식이 낭비이기만 한 걸까? 여기에 동원되는 우리의 친환경 농산물들, 그것을 가공하는 수많은 일거리들, 수많은 학교의 영양사들, 이 일에 매달려 월급을 받거나 일하는 종사자들이 이 무상급식 때문에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 이들이 버는 돈은 또 소비를 진작시키는데 기여하는 것이 아닌가? 부정부패와 수천 년 흘러온 강을 파헤쳐 쓸데없이 천문학적인 돈을 낭비하는 것에 비하면 이 급식은 나라 경제의 순환을 위해서 매우 좋은 기능을 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공황이 생겼던 과거의 일은 생산시설이 부족하거나 생산량이 부족해서 생겼던 것은 아니다. 일부의 부자들이 국가의 부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소비시장이 얼어붙어서 생긴 일이었다. 일반 국민들이 소비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경제가 얼어붙은 것이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 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연방정부의 권한을 강화하고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고 그 돈을 일반 서민들에게 뿌리는 작업을 했다. 지금 미국에 조성된 유명한 공원들이 그때 조성된 것이 많다.
의무교육을 실시한 지 수십년 만에 실시하는 의무급식이 꼭 역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돈을 일반 서민들에게 내려 보내는 순기능도 있음을 재고했으면 한다. 이 기회에 돈 많은 부자들이 자기 자식이나 손자들이 공밥을 먹는 일에 있어서 좀 미안한 생각이 들면 자진해서 관심을 가지고 돈을 기브하는 아름다운 일도 생겨났으면 한다. 그것을 하기 위한 사회적인 틀도 마련했으면 한다. 질 좋고 영양가 있는 점심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주는 것을 꽃나무에 물을 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정착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