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의 산문집, 그 첫 번째 권 <쑥스러운 고백>을 읽었다.
저자의 글은 언제 읽어도 맛깔스럽다. 언제나 신선하다. 내가 저자의 모든 글을 읽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책 읽을 때에 '전혀 새로운 희열'(18쪽)을 느꼈다. 맛보았다.
주옥같은 경종, 글은 그런 울림이 있어야 이 책에서 가장 값어치 있는 글을 고르라고 한다면 41쪽 이하의 "난 단박 잘 살테야"이다. 그중에서도, 44쪽의 글이다. 지인의 결혼식에 참석한 후에 호화 혼수품을 보고 난 다음에 보여준 저자의 반응이다.
저자의 반응을 이해하기 위하여 상황을 잠깐 들여다 보자.
<그 댁은 신부댁이었고 손님들한테 자랑하고 싶은 것은 바로 신부의 혼수였다. 그러나 그 어마어마한 것들을 한마디로 혼수라 부를 수 있을는지 나는 '악'하고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 나이까지 혼인 구경도 여러 번 하고 부잣집 혼수도 더러 눈여겨 뵜지만 이건 그 정도의 안목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42쪽)여기까지 소개된 글을 읽으면, 어떤 상황인지 감이 오는지? 아직 감이 오지 않은 분들을 위해 몇가지 더 소개한다.
<침구의 수효와 종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지만 옷은 다른 것에 비해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시댁에 예물로 가져갈 침구와 옷과 패물이 또 어마어마했다. ...실크 한 벌....비취 브로치...산호 노리개...시아버지 양복도 몇벌 ...그랜드 피아노를 싣기 위해 특별히 고용한 인부들이 포장을 공들여 하는 광경도 보았다.>(43쪽)이런 광경을 보고 기가 찬 저자는 다음과 같은 주옥(?)같은 경종을 우리 사회를 향하여 울린다. 나는 같이 구경을 하던 사람 중에서 나하고 그래도 제일 친한 사람에게 나중에 넌지시 물어봤다.
뭐라 물어봤을까?
"이 댁 신부가 결혼식장에서는 잘 몰랐는데 아마 어딘가 병신임에 틀림없겠는데 어디가 병신인가고. 그랬더니 천만에 사대육신이 멀쩡한 미인이라지 않나. 그러면 몸에 무슨 병이 있든지 하다못해 골이 남보다 비었든지 그렇지는 않냐고 물었더니 그것도 천만에, 건강하고 출신학교도 명문으로만 뽑았다고 했다."자, 이쯤 했으면 저자는 납득이 될만도 하다. 저자가 의구심을 가졌던 모든 것들이 아니라지 않는가? 그러면 순순히 인정을 하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어야 되는데, 저자는 달랐다. 이어지는 말을 마저 들어보자.
<그래도 나는 오늘까지 다른 건 다 몰라도 그 신부가 골은 좀 빈 신부려니 하고 믿고 있다. 뭔가 지독한 열등감이 없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물량공세로 나올 수가 있겠는가.>(44쪽)나도 저자의 그런 천연덕스러운 결론에 동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딘가 골이라도 좀 비지 않고서야, 그런 일을 벌일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 여자가 고른 독처럼, 글이 잘 생겼다.
"이것 보세요. 어때요? 잘 생겼죠. 무던하고, 후덕스럽고, 의젓하고. 미끈하고.."(24쪽)무엇을 설명하는 문장일까? 그 대상은 뜻밖에도 항아리, 독이다.
이야기를 들어보자.
<지난가을이던가 시장엘 가는데 앞집 부인이 옹기점에서 항아리를 고르다가 나에게 도움을 청해왔다. 어느 것이 잘생겼나 좀 봐달라는 거였다.> 그런 앞집 부인의 청에 저자는 이런 마음이었다 한다.
<이목구비가 달린 것도 아닌, 기껏 배만 불룩하면 고만인 항아리가 잘 생겼으면 얼마나 잘 생겼고 못생겼으면 얼마나 못생겼겠는가. 나는 별로 달갑잖아 하면서 마지못해 항아리를 몇 개 기웃거려 봤다.> (23쪽) 그런데 그런 저자의 자세, 태도와는 다르게 그 부인은 열성이었다. 어떻게? 저자는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심각한 얼굴로 첩첩이 쌓인 독과 항아리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고개를 갸우뚱, 눈을 가느스름히 떴다 크게 떴다, 가까이에서 봤다가 멀리 물러나서 봤다가, 손으로 어루만져봤다가 좀처럼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23-24쪽)이윽고 독을 고르고 난 후 그 부인의 지른 환호성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 보세요. 어때요? 잘 생겼죠. 무던하고, 후덕스럽고, 의젓하고. 미끈하고.."(24쪽)그런 부인의 자세에 저자는 드디어 설득이 된다.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런 깨달음은 이제 더 넓은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서 저자는 독을 고르는 법을 말하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다.
그게 아닌 것이, 그 다음에 귀부인들의 미술 작품 고르는 것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귀부인들이 값비싼 그림을 보고 사들일 때 과연 B 부인이 옹기전의 독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독을 고르기 위하여 치른 것만큼이나 진지하게 보고 찾는 과정을 거쳤을는지, 또 그 부인이 오래 보고 찾은 끝에 드디어 소망하던 아름다운 독과 만났을 때만큼의 순수한 기쁨이나마 맛보았을는지.> (25쪽) 그런 저자의 말이 지금 이 시점에, 과정을 생략하고, 무조건 '단박'을 외치는 이 세상 풍조에 얼마나 귀한지, 이 책을 통하여 새삼 느껴보게 된다.
그래서 이 책 속에 들어있는 모든 글들이, 모든 문장들이 그 부인이 말한 것처럼, "이것 보세요. 어때요? 잘 생겼죠. 무던하고, 후덕스럽고, 의젓하고. 미끈하고.."라는 감탄, 절로 나온다.
노자의 숨결, 글에 담겨있다.
무릇 글을 쓰다보면, 철학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자명한 이치! 특히 저자의 생을 돌아볼 때에 그런 철학의 경지에 도달한 것은 모두 알고 있는 터, 그래서 작가의 글을 읽다가 문득 노자의 숨결을 느꼈다.
"흔히 말하는 인덕이라는 것도 사람의 허한 부분, 즉 이웃을 들어앉히고 포용할 수 있게 비워놓은 자리가 있음을 일컬음이 아닐까요? 꽉 찼다는 것은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음을 의미하고 절망을 의미합니다."(82쪽)노자의 도덕경 제11장에서 수레바퀴와 그릇, 그리고 방이 등장한다. 등장하는 이유는 바로 빔의 철학을 설파하기 위해서이다. 수레바퀴의 바퀴살이 없는 곳의 빔, 그릇의 안쪽의 빔, 그리고 벽을 뚫어 만든 방문의 빔이 있음으로 해서 수레와 그릇과 방의 쓰임새가 생긴다. 그러니 노자의 견해에 의하면 수레바퀴나 방이나 그릇 모두, 그 안이 비어있기 때문에 쓰임을 받는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그릇이 이미 채워졌으면 이제 다른 음식을 담을 수 없지 않은가?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그러므로 유형이 있는 것들이 이롭게 쓰이는 것은 그 공허한 빈 공간이 활용되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 '자기'로 꽉 차있으면 그 누가 그 안에 들어설 수 있겠는가? 인덕, 그게 바로 자기를 비워 남을 품는 그릇이다. 저자는 그런 이치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하여 그렇지 못하니 절망이라고까지 하지 않는가?
이런 글, 우리가 대할 수 있다는 것이 기쁨이다. 이 책의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씌여진 글이 없으니, 이 시대에 그런 외침, 울림, 그리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까지 묶어 가르칠 수 있는 선생 한 분이 계시지 않게 된 것이 못내 아쉽다. 이 책 읽으면서 그 마음 더 절실했다.
덧붙이는 글 | 문학동네에서 발간된, 박완서의 산문집 <쑥스러운 고백>에 대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