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백정이 문혜왕을 위해 소를 잡은 일이 있었다. 그의 손이 닿는 곳이나 어깨를 기대는 곳이나 발로 밟는 곳이나 무릎으로 누르는 곳은 푸덕푸덕 살과 뼈가 떨어졌다. 칼이 지나갈 때마다 설겅설겅 소리가 나는데 모두가 음률에 들어 맞았다(중략).
문혜왕이 말하였다. "아아, 훌륭하다. 재주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를 수가 있는가?" 백정이 칼을 놓고 대답하였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道)로서 재주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처음 제가 소를 잡았을 적에는 보이는 것 모두가 소였습니다. 그러나 3년 뒤에는 완전한 소가 보이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저는 정신으로서 소를 대하지 눈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감각의 작용은 멈춰 버리고 정신을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중략) 훌륭한 백정은 일년마다 칼을 바꾸는데, 살을 자르기 때문입니다. 보통 백정들은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의 칼은 19년이 되었으며, 그 사이 잡은 소는 수천 마리나 됩니다. 그러나 칼날은 숫돌에 새로 갈아 내온 것과 같은 것입니다. 소의 뼈마디엔 틈이 있는데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이 있는 곳에 넣기 때문에 휑하니 칼날을 움직이는데 언제나 반드시 여유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19년이 지나도 칼날은 새로 숫돌에 갈아 놓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 장주(김학주 옮김), <장자, 을유문화사, 2000>
"와탕카!"대학 3학년 때 '제자서 선독'이라는 강좌명으로 장자 제3편 양생주(養生主)에 있는 '庖丁爲文惠君解牛手之所觸...'의 원문을 접하는 순간 '서울의 달'이라는 드라마에서 백윤식 씨가 외쳤던 '와탕카'가 떠올랐다. 화투를 칠 때 좋은 패가 들어오거나 무언가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상황일 때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쾌남의 의기양양함을 떨치지는 않은 채 와탕카를 외쳤는데 내게도 그분이 온 것이다.
백정이 19년 동안 칼을 사용했음에도 새 것과 같이 온전히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긍(肯) : 뼈에 붙은 살'과 '경(綮) : 뼈와 살이 이어진 곳'을 잘 파악해 칼이 손상될 계제를 원천적으로 차단했기 때문이다. 자연의 흐름을 잘 파악하고 사물의 이치를 통찰하는 눈을 가지는 가운데 그 핵심과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이 중요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부족하나마 어떤 쟁점이나 결정적 화두가 있으면 천착하려 애쓰는 습관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대학 3학년 때 이 글과의 인연으로 인해 학문의 즐거움을 느낀 장면이 담겨 있다. 나는 백정이 되어 일반계고 보충 수업이라는 소를 잡아보려 한다. 물론 칼날의 훼손을 막으면서 말이다.
'보충(補充)'은 '부족한 것을 보태어 채움'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보충 수업이라는 것은 부족한 것을 보태어 채우는 수업이 된다. 여기에서 부족하다고 느끼는 주체가 교사나 학교라면 학교 교육 과정만으로는 고등학교에서 이수해야 할 내용을 다 소화할 수 없기에 보충 수업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정규 과정에서는 일반적인 내용을 다루고 보충 수업에서는 수준별로 기본 학습 또는 심화 학습을 실시하려 한다는 논리로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입장을 바꾸어 부족하다고 느끼는 주체가 학생이라면 정규 교육 과정에서 해결하지 못한 과제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수행하려는 의지와 직결되는 것이 보충 수업일 것이다. 아니면 지적 호기심으로 충만한 뇌리에 강한 자극과 신선한 자극을 주기 위한 첨가제가 보충 수업일 것이다.
후자의 입장에서 보충수업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쌍수를 들고 반길 일이다. 자발적 의지를 키워 주고 학습력을 제고할 수 있는 주춧돌이 될 것이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인재를 양성해야 할 교육자의 책무와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일반계 고교에서 학생들의 보충수업에 '자율과 책임'의 고차원적 가치를 심어주는 곳은 많지 않음에 문제 제기를 한다.
일반계고는 수능과 입시라는 현실적 목표를 간과할 수 없기에 보충 수업을 학생들에게 전적으로 자율화하는 것은 이상적인 기대치일 뿐이라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또한 학교 사회에서는 이웃 학교 간의 공조 체계를 중요시한다. 주로 학교 간 공생을 위해, 이웃 학교의 시스템과 차이가 나면 학교 간 분위기가 묘해진다는 둥, 교육청 입장에서도 곤란할 것이라는 둥, 학부모의 성향에 따라 민원의 요소가 발생할 것이라는 둥 논리로 가장한 변명을 나열하며 보충 수업 100% 참여를 강권한다.
각 학교 관리자들의 이해 관계에 따라 모래성처럼 이러한 공조 체계가 쉽게 무너질 때도 많아, '보충수업 100% 참여'는 보충 수업에 있어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으려는 얄팍한 술수로만 보인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이러한 시스템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너희들 대학 안 갈 거니?', '내용이 귀에 안 들어오더라도 일단 버텨봐. 인내와 최선은 배우잖아'라며 학생들이 현실적인 목표를 달성하고 정신적인 무장을 하는 데 엄청나게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처럼 포장해 숫자 100을 만들어내는 담임들의 '헌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교장을 위시한 여러 동료와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관계망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한, 인간으로서의 고독한 몸부림이라 할 수 있고 나쁘게 말하면 주체적 비판 의식 없이 획일화된 삶을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직업 교사'인 것이다. 수능과 입시가 중요하기에 보충 수업을 듣게 해야 학생들이 진학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은 산업 사회적 마인드, 학력고사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사람이다.
물마시고 싶지 않은 학생에게 물을 억지로 마시게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차라리 보충 수업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물리학과 진학 희망자가 야구 경기를 관람하거나 직접 활동해 보면서 스윙 궤도에 따른 타구의 방향을 체감하고 공의 실밥과 공기, 어깨나 팔의 각도에 따라 공의 변화가 어떻게 주어지는지를 체득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도시공학과나 법학과에 진학하기를 희망하는 학생들이 차들로 가득한 도심 한 복판에서 교통 흐름을 데이터로 집적하고 분석하는 일, 도로교통법을 점검하고 합리적 대안을 제시하는 길이 보충 수업보다 정서적·실용적인 가치가 더 크지 않을까?
교육부 훈령 학교 생활 기록부 작성 및 관리 지침에는 '방과후학교(보충수업도 정규 교육과정이 아니므로 이 범주에 넣고 있음)'의 수강 내용을 입력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애당초 교육부는 교과 영역이든 비교과 영역이든 다양한 강좌를 개설한 학교 시스템, 자발적 의지가 선행된 학생의 지속적인 노력 등 복합적인 요인이 갖춰졌을 때의 보상으로 이러한 항목을 넣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일부 학교에서는 조악하게도 강제화한 보충 수업의 내용과 결과를 학교 생활 기록부에 명시한다. 교육의 본질에 맞지도 않고 교육부의 지침에 본질적으로 부합하지도 않으며, 대학에서도 유의미한 자료로 판별하지 않는다. 보충 수업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조장하기 위한 겁박용으로만 최고일지 모른다.
'대입의 논리'로 본다면 오히려 야구장에 간 학생들, 도심 한복판에 서 있었던 학생들이 대학 측에 강한 인상을 줄 것이다. 이른바 수시 모집 학생부 종합 전형에서 유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학생부 종합 전형에서도 수능 최저 학력 기준 등 학력의 요소를 저버릴 수 없다는 논리로 이견을 제시하지는 말자. 보충 수업 빠진다고 해서 그것이 학력 저하의 늪으로 빠지게 된다는 논리에 동의할 수 없으니 말이다.
보충 수업과 학력의 상관성 이야기가 나왔으니 철저하게 '대입의 논리'로 계속 생각해 보자. 학교에서의 보충 수업이 과연 효율적일까? 문항 분석팀, 교재 연구팀, 강의 준비팀 등 총체적으로 조직을 관리하며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춘 학원. 각종 문서에 시달리고, 난무하는 업무에 혼이 빠져 있는데 '철학 없는' 교장이 궤변과 망언과 만행으로 비빔밥을 만들어주는 학교.
정상적으로 보충수업을 준비할 수 있을까? 최선이라는 이름으로 십자가를 지면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수도 있지 않느냐며 반문할 수 있는 용맹함을 가진 자가 있다면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무모함이라 말하련다. 한때 EBS에서 강의를 맡았던 나는 40분 정도의 TV 강의를 위해 10시간 정도의 시간을 투자했다. 그나마 EBS라는 시스템이 있었기에 10시간의 고생이 두 배, 세 배 이상의 보람으로 다가왔지만 '수업 준비만 잘 하면 되는 게 아닌' 교사에게 학원 강사가 준비하는 시간만큼의 노력을 요구할 수도 없고 요구해서도 안 된다.
교사의 현실적 고충은 이해할 수 있으나 학생들을 향한 가르침의 끈이 길어야 할 것이며 튼튼해야 한다고 강변하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 부분에 동의한다. 보충 수업에 있어 학교가 학원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니 마냥 손을 놓고 있자는 뜻이 아니라 진정성을 가지고 강좌에 매진할 학생들에게 선택과 집중을 하면 수업의 방식이 다양하고 세련될 것이며 그것이 공교육만의 특화된 가치로 승화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학생들에게 선택을 주었을 때 그들 나름대로의 길이 열릴 것이며, 교사는 교사대로 수업에 있어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 효율과 본질 두 마리의 토끼를 사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먼 길 달려왔다. 이제껏 학생들 스스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보충 수업을 강제하는 것에 대한 회의(懷疑)로 논의를 진행해 왔다. 이제 보충 수업 논의에 있어 전자, 즉 정규 교육과정만으로는 질적․양적으로 부족하기에 보충수업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는 교사에 대한 논의도 덧붙이려 한다.
아니 나를 포함한 다수의 교사에게 질문 두 가지를 던져 독자에게 사고의 스펙트럼을 확장해 주려고 한다. 교육 과정에 명시한 진도를 다 나갈 수 없어 보충 수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라면 '교육공무원법 제41조 연수'라는 이름의 방학을 줄일 생각은 없었는지? 굳이 시스템의 희생양이 되기 싫다면 교육과정에서 요구하는 목표치는 현실적으로 문제가 많으니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심각하게 문제 제기를 했는지?
보충 수업에 임해야 대학 가는 지름길이 마련된다는 일원적 사고. 일반계 고등학교에서의 소정의 목표가 있으니 하교 시간도 통일해야 한다는 그릇된 사고. 보충 수업 불참자에 대해 학교생활기록부로 겁박하는 행위. 심지어는 보충 수업에서 다룬 내용을 정기고사에 반영하는 행위. 이 모든 것들은 초짜 백정이 칼날을 무디게 하는 것도 모자라 부러뜨리면서도 소 한 마리 제대로 잡지 못하는 격일 것이다. '보충'이라는 자의(字意)에 충실하여 본질을 직관하는 혜안이 담긴 시스템, 그것이 필요하다. 노련한 백정이 '교육'이라는 소를 잘 잡아내는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