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 소설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은, 필요에 의해 창조된 가상의 캐릭터들입니다. 실제의 이름, 나이, 직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 미리 말씀드립니다. 2014년 4월 13일, PM 05 : 10 어이! 김 관장. 응. 그래, 오늘 6시에 보기로 했잖아. 뭐? 장소? 아니, 이 사람이 벌써 치매기가 왔나? 내가 벌써 두 번이나 말해줬잖아? 고잔동에 있는 고기부페라고! 응 그래, 거기! 찾기 쉬우니까 대충 알아서 찾아와. 응? 후배 한명 데리고 온다고? 그래 알았어. 그래. 그래. 그럼 이따 6시에 보자고!
전화통화를 끝내고 대충 외출 준비를 한다. 모처럼의 외식이라 그런지, 보영이도 신이 난 모양이다.
아빠, 관장님이야?
응. 김 관장. 장소가 어딘지 까먹었대. 그리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후배도 한 명 데리고 온다는데?
그럼 오늘 일곱 명 모이는 거야? 원래 여섯 명에서 한 명 더 늘었으니까….
그렇지. 여섯에서 한 명 더 느는 거니까 일곱 명…. 근데 보영아, 너 나갈 준비는 다 했니?
준비 하고 말게 뭐 있어? 그냥 외투만 걸치면 되는 걸?
자… 그럼, 어디 슬슬 나가볼까? 근데, 아무래도 걸어가는 게 좋겠지? 거리도 별로 안 멀고… 어차피 김 관장 만나면 술도 한 잔 해야 될 테니까…. 차는 그냥, 놓고 가는 게 낫겠지?
그래! 오랜만에 아빠랑 나랑 산책도 할 겸, 슬슬 걸어가지 뭐…. 이럴 때 아니면, 아빠가 언제 나 같은 미인하고 데이트를 해보겠어? 지혜 이모만 빼고, 히히.
어이구,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다 앞을 가리네? 근데, 야! 너 어디 딴 데 가서는, 미인 어쩌고 하는 소리는 안 할 거지? 그러다 괜히, 주제파악 못한다고 욕먹으면 곤란하잖아?
내 참! 아빠는 꼭 그렇게… 자라나는 새싹 가슴에 멍이 들게 해야 속이 시원해? 그냥 그렇다고 맞장구 쳐주면, 누가 세금 내라고 하냐고!
글쎄다. 하긴, 우리 딸도 이 동네에서는 쪼끔 미인이긴 하지? 문제는, 동네를 벗어나면 그걸 인정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게 문제긴 하지만 말이야. 하하하.
아빠, 딸내미 기죽이는 게 그렇게도 재밌어? 흑흑흑. 내가 이런 모진 학대를 받으며 살고 있는 건, 아마 아무도 모를 거야. 이따가 스승님하고 지혜 이모한테 다 일러야지. 아빠 혼 좀 내주라고.
야! 그건 반칙이지! 그래 알았다 알았어. 아까 했던 말은 전부 취소! 우리 딸이 최고다! 우리 딸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미인이다!! 됐냐? 됐어?
히히히 아빠, 우리 늦겠다. 어서 출발 합시다용!
집밖으로 나서니, 코끝에 스치는 바람엔 봄기운이 완연했다. 혹시나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다행히 날씨는 맑기만 했다. 인도를 따라 걷는 길에, 아이가 자연스럽게 팔짱을 낀다.
아빠. 저기 고잔역 뒤편 수인선 철로 변에서… 어제, 오늘 이틀 동안 튤립 축제 한 대! 우리 거기나 한 번 가볼까?
흠, 어차피 가는 길 근처니까, 그럼… 어디 한 번, 들렀다 갈까? 설마 약속시간에 늦지는 않겠지?
아니? 안 늦을 거야….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동네슈퍼가 눈앞에 보인다.
아이고, 김 여사님! 오전에 보니까 가게 문, 닫혀 있던데… 어디 좋은 데라도 다녀오셨나요? 헤어스타일이 아주 멋지게 바뀌셨는데?
아이 참… 멋지긴요. 오늘 저희 조카가 오후에 결혼식을 했는데요, 거기 좀 다녀오느라고요. 근데, 보영이는 더 예뻐졌네? 교수님, 보영이랑 어디 가시는 길인가 봐요?
안녕하세요?
보영이가 슈퍼 주인에게 얌전히 인사를 한다.
아 네, 시내에서 저녁 약속이 있어서요.
그러세요? 보영이는 좋겠네? 오늘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오렴?
히히히. 안 그래도, 그럴려구요.
저, 김 여사님. 매상 많이 올리시고, 오늘도 좋은 날 되세요~ 그럼 이만….
인사를 나누고 한 10미터쯤을 걷자, 이번에는 세탁소가 보인다.
어이! 박 사장! 일요일인데도 바쁘네?
어? 형님 어디 가십니까? 보영이 안녕?
응. 약속이 있어서, 어디 좀 가. 근데, 지난번에는 고마웠어? 양복, 일 땜에 그렇게 갑자기 맡겼는데도… 손질을 아주 잘 해줬더구먼. 언제 저녁에 소주나 한 잔 하지? 내가 한 번 쏠께!
저야 언제든지 콜이지요, 뭐…. 마누라도 제가 형님이랑 마신다고만 하면, 바가지도 안 긁고… 참 좋던데요?
허허허 그랬었나? 어쨌거나 조만간, 시간 한 번 맞춰보자고!
네, 형님. 그럼 다녀오세요.
순간, 누군가 바로 옆 치킨 가게에서 헬멧을 쓴 채 문을 열고 나오더니… 오토바이에 시동을 건다.
어? 이 사장님 어디 배달 가시나보네? 보영아 인사해야지?
아저씨 안녕하세요?
어? 보영이 아냐! 교수님, 보영이랑 어디 외출하세요?
네, 시내에 볼 일이 좀 있어서요. 어떻게 요즘, 장사는 잘 되시나요?
별에서 온 그댄가 뭔가 하는 드라마 덕분에 치맥 배달이 좀 늘기는 했는데요, 아직까지는 그냥 그래요. 그저 6월에 있을 월드컵이나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어서 경기가 좀 풀려서, 다들 잘 되면 좋을 텐데….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겠죠. 그 때까지 모두 '파이팅!'하며 사십시다. 까짓 거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사는 거죠 뭐….
아이고, 그런 걱정까지 해주시니 정말 고맙네요. 언제 배달 한 번 시키세요. 제가 푸짐하게 양 많이 해서 갖다 드릴게요.
허허허. 그렇게 인심 쓰다가 손해 보면 어쩌시려고? 어쨌거나 오늘은 좀 그렇고… 내일 당장 보영이가 좋아하는 파닭으로, 한 번 부탁드릴게요.
그러세요, 교수님. 저는 배달 때문에 이만… 그럼 좋은 시간 되시구요, 보영이도 안녕…
네 그럼, 이 사장님. 오토바이 운전, 조심하시구요.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서 걷다가… 딸아이가 발걸음을 멈춘 채, 갑자기 뚱한 목소리로 묻는다.
아빠. 혹시 나중에, 여기서 국회의원 출마라도 할 거야?
응?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니?
그렇잖아… 선거 때 보면, 후본가 뭔가 하는 아저씨들이 꼭 지금 아빠가 하는 것처럼… 동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람들한테 인사하러 다니고 그러잖아?
어이구, 그 사람들하고 나하고 같니? 나야, 이 동네 같이 사는 사람이니까… 그냥 동네 이웃으로 인사하고 그러는 거지. 그리고 아빠는… 그럴 돈도 없고, 그 사람들처럼 얼굴이 두껍지도 못하고 해서… 절대 국회의원 출마 같은 건 못한단다. 그러니까 그런 걱정은 뚝!
아빠. 그럼 나랑 약속하는 거지 응? 정치 같은 거, 절대로 안한다고?
그럼! 자, 약속!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아이는 손가락을 마주 걸면서 웃는다. 그러더니, 그럼… 기왕 약속하는 김에 도장도 찍고! 라며, 걸고 있는 새끼손가락 위로 엄지를 치켜 올린다.
그래? 까짓 거, 그럼 '복사'하고 '코팅'도 해야지?
그러자 아이가 깔깔거리며 손등과 손바닥을 차례로, 내 손에 문지른다.
아빠. '싸인'하고 '지문도장'은 아직 모르지? 그건 내가 나중에 가르쳐줄게.
오케이~. 근데 보영아. 앞으론 아빠가 정치를 하니 마니, 그런 걱정은 절대로 하기 없기? 알았지?
응. 알았어. 아빠 말 믿을게. 정치하는 사람들, 맨날 욕만 먹는데… 아빠가 그런 사람들하고 같아지는 거 나는 정말 싫어….
아이 표정이 밝아지더니, 다시 신이 나서 팔짱을 끼고 걷는다. 그러나… 아이의 속마음을 생각하니, 공연히 마음이 시려온다.
2002년. 이른바 '노풍'을 일으키며…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던 해.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노사모'에 가입을 했었다. 낡은 정치를 끝장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다는 희망에… 덩달아 부풀었고, 이곳저곳 쫓아다니며 참 열심히도 선거운동을 했다. 먹고사는 문제는 늘 뒷전이었고, 노무현 당선이 우선이었던 시절…. 그 때는 그게 훨씬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결코 아깝지 않은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전혀 생각이 달랐다. 어떻게 정치가 가정보다도 중요하냐며, 타박을 하기 일쑤였고… 자연히 서로의 의견이 부딪치며, 언성 높이는 일들이 잦아졌다. 그럴 때마다 싸우지 말라며, 옆에서 엉엉 울던 아이…. 아이의 가슴속에 새겨졌던 그 때의 상처… 그게 아직까지도 아물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아이에게는 늘 미안하기만 했다.
게다가, 2년 뒤인 2004년. 아내와 아이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대형 교통사고로 인해… 한날한시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시부모를 태우고 운전하던 아내의 차를, 짐을 가득 실은 중앙차선 너머의 8톤 트럭이 순식간에 덮쳤던 것. 그 때, 그 어린 나이에 상복을 입고 울던 아이의 모습, 그건…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아이 눈에서 눈물 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수 없이 다짐을 했고, 될 수 있으면 집안 분위기도 밝게 하려고 그토록 애를 써왔건만.
어쩔 수 없는 일. 두고두고 아이의 상처를 달래며, 그렇게 사는 수밖엔….
두런두런 이러저런 얘기를 나누며 한참을 걷다가… 어느새 고잔역 뒤편, 수인선 철로 변에 도착을 한다. 그런데 거기에… 빨강, 노랑, 분홍색의 수많은 튤립들이, 그야말로 지천으로 피어있었다.
히야! 아빠! 꽃들 정말 예쁘지? 어쩌면 색깔이 이럴 수가 있어? 아빠 저기 봐봐. 저쪽엔 보라색 튤립도 있다?
이미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튤립과 함께 화사한 봄 분위기를 사진에 담고 있었다.
보영아. 우리도 여기서 사진 좀 찍을까? 저쪽 가서 한 번 서봐. 아니… 거기 빨강 말고, 노란 색 옆에. 너는 노란색이 잘 어울리잖아?
활짝 핀 꽃들 사이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의 모습.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럽다. 자리를 옮겨가며 연신 스마트 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아이가 갑자기 손짓을 한다.
아빠! 여기 안내판이 있어! 아멜돈, 네그리타, 다이너스티… 아빠, 이게 다 튤립 꽃 종류인가 봐. 어? 근데… 돈키호테? 푸하하! 튤립 꽃 종류 중에… 세상에 돈키호테가 다 있네?
하하하. 그거 참…. 진짜 돈키호테가 있네? 꽃 이름을 대체 왜 그렇게 지었을까?
아빠 맨 밑에 있는 설명 좀 한 번 봐봐! 튤립의 꽃말이 '사랑의 고백'하고 '매혹'이래? 히히히. 아빠, 나중에… 튤립 꽃 사들고 지혜 이모한테 고백하면 어때? 혹시 알아? 그럼 지혜이모하고 잘 될지?
야! 흠, 흠… 이 녀석이 이제, 아빠를 아주 놀리려고 하네?
갑자기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헛기침을 한다. 그런데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강아지처럼 여기저기 신이 나서 뛰어다니더니… 갑자기 또 소리를 지른다.
아빠! 저기 좀 봐! 피리 부는 애가 소 타고 있는 거! 히, 진짜 너무 귀엽다. 근데… 소가 아니라 송아지인가?
소든, 송아지든, 아빠는 시골생각이 나는데? 보영아, 여름방학 되면… 아빠랑 같이, 어디 시골로 여행이나 다녀올까?
진짜? 나야 찬성! 고3 되기 전에 아빠, 꼭 시골로 여행가. 우리 반 애들도 같이 가면 좋겠다. 어쨌거나… 아빠. 아빠가 얘기 한 거니까, 꼭 지켜야 돼?
그래. 같이 갈 친구들 있으면, 그렇게 하자. 아빠가 약속, 꼭 지킬게.
한참동안 철로 주면 이곳저곳을 옮겨가며 사진을 찍다가, 아이와 함께 벤치에 앉는다. 그 때, 휴대폰에 꽂힌 이어폰 한 쪽을 내게로 건네며… 아이가 말했다.
아빠. 쉬는 동안, 잠시 음악 감상이나 할까?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 휴대폰에 모아놨는데… 아빠도 한 번 들어봐.
그럴까? 어디 보자. 우리 딸이 과연 어떤 노래들을 좋아할까나?…
한참동안 음악을 듣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한다. 그런데 저만치 앞서 걷던 아이가 또다시 손짓을 한다.
어? 근데… 여기 바닥에, 뭐라고 글자가 쓰여 있네? 아빠, 얼른 여기로 와봐!
거기에… 정말 글자들이 있었다. 녹슨 철로 사이사이에 새겨져 있는….
'길 없이도 만나는 곳'
그런데 바닥에 새겨진 글자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철로를 따라 계속해서 글자들이 있었다.
그 때 발견한, 특이하게도 영어로 새겨진 문구 하나. 'Once upon a time in Ansan'
그리고 눈에 띄는 또 다른 문구. '기억 된 것과 기억 될 것이 만나는 여기'
그 때는 결코 알 수 없었다. 그곳이… 마음이 허전하고 아이가 사무치게 보고플 때, 남 몰래 수도 없이 찾아가는 장소가 될 줄은. 그리고 그 글자들이… 그토록 마음을 아프게 할 줄은.
'Once upon a time in Ansan'
'기억 된 것, 기억 될 것이 만나는 여기'
'길 없이도 만나는 곳'….
그리고… 고잔 역을 알리는 그 나무푯말 옆 벤치…. 보영아, 그 때 니가 그랬지. 글씨도 잠자리도, 어쩌면 이렇게 촌스럽냐고.
그런데 그 벤치 위에서 그 때 함께 들었던 그 노래들. 네가 떠난 뒤 한동안… 어느 날 우연히라도 듣게 되면, 그저 멍하니 눈물만 고이곤 했던 그 노래들…. 그걸 지금도, 아빠는 가끔 듣는단다. 촌스러운 그 벤치 위에서….
처음엔, 교복을 입은 니 또래 아이들만 보아도… 아빤 너무 힘이 들어서 꺼억꺼억 속울음만 삼켰어.
근데 이젠 그걸… '우리들만의 작은 음악회'라고 아빠는 생각해. 시간이 아무리 흘러가도, 우리는 늘 함께 있으니까. 여긴, '길 없이도 만나는 곳' 이잖아…. 그래서 그때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아빤, 이어폰을 한 쪽만 귀에 꽂아.
그리고 늘 그 때마다 다짐을 한단다. 허망하게 아무것도 못하고, 너희들을 그렇게 아프게 떠나보냈지만… 이젠 그냥, 눈물만 흘리고 있지는 않을 거라고. 그래서 이 다음에 너희들을 다시 보는 날, 떳떳하게 만날 수 있도록… 그렇게 끝까지, 끝까지… 끝까지! 싸울 거라고….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글쓴이의 개인 블로그 ( http://blog.daum.net/jsakor )에도 동시에 게재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