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 나선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한목소리로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이 필요하다고 뜻을 모았다. 유 대표는 왼쪽, 문 대표는 오른쪽으로 한 발씩 옮겨와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한 것이다.
두 사람은 대기업 세금특혜, 불공정 시장 구조, 복지 사각지대, 비정규직 문제 등에서도 눈높이가 같았다. 성장에 따른 분배가 사회 곳곳에서 보장돼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여야 지도부의 공통된 인식이 향후 국회 정책 입안 과정에서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지난 8일 먼저 연설에 나선 유 원내대표는 '성장'과 '복지'를 핵심 키워드로 내세웠다. '성장'이라는 단어는 57번, '복지'는 46번 언급했다. 보수의 의제인 성장과 더불어 진보의 의제인 복지를 동시에 품고 가겠다는 게 그의 구상이다. 유 원내대표는 "어제의 새누리당이 경제성장과 자유시장경제에 치우쳤다면, 내일의 새누리당은 성장과 복지의 균형발전을 추구하는 정당이 되겠다"라고 말했다.
복지를 위한 증세도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현재 수준의 복지로는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고 공동체의 붕괴를 막기에 크게 부족하다"라며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는 '중부담-중복지'"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임이 입증되고 있다, 여야가 세금과 복지 문제에 관한 대타협기구를 설치해야 한다"라고 제안했다.
9일 문 대표 역시 '새 경제(New economy)'로의 전환을 선포하며 소득주도성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유 원내대표가 복지를 말했듯, 보수의 전통적인 의제인 성장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총 28쪽의 연설 문 중 21쪽을 경제 분야에 할애할 그는 '소득'을 56번, '성장'을 43번 거론할 정도였다. 문 대표는 "우리 모두는 풍요롭고 정의로운 삶을 원한다, 그러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성장"이라며 "성장 없는 풍요와 경제정의는 생각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복지 역시 놓치지 않았다. 그는 "복지가 발달된 북유럽 국가들이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내성도 가장 강하다는 것이 밝혀졌다"라며 "복지는 미래를 위한 투자이며 동시에 강력한 성장전략"이라고 전했다. 다만 증세를 두고는 "서민·중산층 증세는 자제해야 한다"라고 말해 유 원내대표와는 의견이 엇갈렸다.
여야 한목소리로 "재벌 대기업 세금 더 내야"특히 이들은 한국사회가 재벌주도 성장에서 벗어나야 한다면서, 대기업이 세금감면 등의 특권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 원내대표는 "재벌 대기업은 지난날 정부의 특혜와 국민의 희생으로 오늘의 성장을 이루었다"라며 "우리나라의 부자와 대기업은 그들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의 세금을 떳떳하게 더 내고 더 존경받는 선진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라고 요구했다.
기업 법인세 특혜 논란을 두고도 그는 "가진 자가 더 많은 세금을 낸다는 원칙, 법인세도 성역이 될 수 없다는 원칙, 소득과 자산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는 보편적인 원칙까지 같이 고려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새정치연합은 유 원내대표의 이 같은 연설 내용을 환영했다. 그동안 야당이 주장해온 법인세 감면 철회 등에 뜻을 같이했기 때문이다. 곧바로 문 대표는 "새누리당이 법인세도 예외 없이 다룰 수 있다고 한만큼 법인세 정상화 조세개혁을 곧바로 추진하자"라고 제안했다.
두 사람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하는 공정한 시장지배질서도 확립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유 원내대표는 "재벌 대기업은 천민자본주의의 단계를 벗어나야 한다"라는 쓴소리를 던지며 하도급 문제 개선을 촉구했고, 문 대표는 한 발 더 나아가 "대기업을 상대로 엄정하게 법을 집행해 시장경제의 장점을 살려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비정규직 문제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는 점도 두 사람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유 원내대표는 "정부와 공기업은 지금 추진 중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더 확실하게 추진해야 한다"라고 말했고, 문 대표도 "비정규직의 차별을 적극적으로 해소해가야 한다, 안전 관련 업무와 상시·지속업무는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라고 제안했다.
정치권은 여야가 경제 문제 해법을 두고 공감대를 형성한 대목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다. 새정치연합의 한 관계자는 "대기업 감세 철회, 비정규직 문제 해결, 시장구조 개선 등의 문제에 여야가 의견을 일치를 이룬 건 굉장히 이례적"이라며 "유 원내대표가 앞으로 의지를 가지고 당을 설득해 야당과 협의해나가는 일만 남았다"라고 기대했다.
"문제 핵심은 북한 핵미사일" "평화체제 전환 뒷받침해야"이외에도 두 사람은 세월호를 인양해야 한다고도 입을 모았다. 다만 안보와 남북문제를 두고는 확연한 차이를 드러냈다. 유 원내대표는 미국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 체계)의 한반도 배치를 주장하며 북핵 대응의 필요성을 역설한 반면, 문 대표는 남북관계를 개선해 평화적 안보 태세를 구축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유 원내대표는 "지금까지의 북한은 이성적인 대북정책이 통하지 않는 상대다, 문제의 핵심에는 북한의 핵미사일이 있다"라며 "하루라도 빨리 북의 핵미사일 공격으로부터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문 대표는 "평화와 함께 가는 안보가 가장 좋은 안보"라며 "분단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평화체제로의 전환을 뒷받침하는 국방·안보 정책이 구현돼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7·4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6·15선언, 10·4정상선언을 이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