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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누구인가> 표지
<나는 누구인가> 표지 ⓒ 21세기 북스
1845년,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콩코드에 있는 월든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하나 짓고 들어가 살기 시작한다. 그는 본인이 숲 속에 들어간 이유를 신중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하기 위해, 죽는 순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삶이 아닌 것은 살고 싶지 않다던 소로. 이웃 사람들 모두가 하나 같이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어 삶은 없이 노동에만 전념하고 있을 때, 소로는 2년 2개월간 조그마한 통나무집에 들어앉아 때로는 수영하고, 때로는 산책하고, 때로는 친구들을 맞이하고, 또 때로는 책을 읽고 사유하며 시간을 보냈다.

소로는 단지 유유자적한 일상을 보내기 위해 숲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아무 방해 없이 자신만의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먹고 살 방편은 물론 스스로 강구했다.

집도 스스로 지었고, 호두나 감자, 옥수수, 완두콩과 순무 등도 직접 경작해 먹었다. 돈이 필요할 땐 측량, 목수, 막노동 일을 해서 벌었다. 그리고 이렇게 산 결과, 그는 1년에 6주 가량만 일을 하면 모든 생계비를 충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시간은 자유롭게 공부하는 데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빡빡하게 이어지던 회사 생활에 염증을 느끼던 몇 년 전 어느 날, 나는 소로의 월든 숲 생활을 담은 이 책 <월든>을 읽었다. 처음 <월든>을 읽었을 때의 그 충격과 충만함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월든>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나에게 하나의 가능성으로 다가왔다. 또 다른 삶의 방식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가능성이었다.

이 책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돈이 아닌 자본에 대해서, 그리고 돈은 또 왜 이렇게 '빡세게' 벌어야 하는 건지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어쩌면 나 역시 소로의 이웃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좀먹고 녹슬며 도둑이 들어와 훔쳐가고 말 재물을 축적하느라 자신의 삶을 소진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들처럼 미의 여신도 아니고 운명의 여신도 아닌 유행의 여신을 섬기느라 내 하루하루를 망치고 있었던 건지도.

그렇게 소로가 지어낸 문장 하나, 하나에 깊이 빠져든 나는 어느샌가 그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좇아야 할 것만 같다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통나무집을 짓고는 살 수 없더라도, 그처럼 어디 홀로 떨어진 곳에서 삶이 아닌 것은 살지 않겠다는 굳은 마음으로 금욕주의자가 되거나 무소유라도 실천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왠걸. 책의 막바지에 다다르자 소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결코 누구도 내 생활방식을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는다."

그 이유는 이랬다.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각기 서로 다른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소로가 우리에게 말 하려던 것은 무엇일까.

기준의 수행자 아닌 기준의 생산자가 되라

텔레비전에서 방영되었던 '나는 누구인가'를 주제로 한 인문학 특강 중 몇 개를 뽑아 책으로 엮어낸 <나는 누구인가>에는 우리 시대 석학이라 일컬어지는 총 7명 연사들의 강연 내용이 실려 있었다. 그 중 '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이란 주제로 강연한 최진석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기준의 수행자가 아니라 기준의 생산자가 되어보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소로를 떠올렸다. 소로는 기준의 생산자였다.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말하려던 것도 우리 역시 기준의 생산자가 되어야 한다는 거였다. 제각기 서로 다른 우리 모두가 각자 자신의 주인이 되는 바로 그것을 그는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최진석 교수는 먼저 외부에 기준을 두고 사는 사람들, 즉 기준의 수행자에겐 어쩔 수 없이 사는 게 그저 조심스럽고 두려울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외부의 기준이라는 건 보편적이고 객관적일 수밖에 없는데, 이런 기준에 견주었을 때 부족하지 않은 사람, 죄인 아닌 사람, 결함이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외부에 기준을 두고 살다 보면 언제나 나의 부족한 면, 허술한 면, 초라한 면만을 보게 된다. 기준의 수행자들은 이렇게 스스로 초라한 삶을 초래하고 만다.

그래서 기준의 생산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방법은? 먼저 '경계를 품은 사람'이 되야 한다고 최진석 교수는 말한다. 믿고 싶고 따르고 싶은 이념이나 사상, 기준이 있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것과 반대되는 이념이나 사상, 기준의 경계선에 딱 서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곳에 당당히 서서 유연하게 자신의 생각을 정립하라는 것이다.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말고, 어느 한 이념에도 갇히지 말고 말이다.

그리고 해야 하는 일이 '표현'이다. 우리는 배우는 데만 너무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배우는 것은 좋다. 그런데 끝까지 배우기만 하는 것이 문제다. 최진석 교수는 끊임없이 배우려고만 하지 말고, 배웠다면 그것을 내 입으로 씹은 후 나만의 생각과 말로 표현해야 한다고 말한다.

살아가는 일은 정해진 것을 수용하는 것도 아니요, 정해진 것을 학습하는 것도 아니요, 정해진 것을 실천하는 것도 아닙니다. 한 번이라도 내가 그것들을 정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나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 <나는 누구인가> 중에서

이어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가 책을 읽는 것은 책을 쓰기 위함이요, 누군가의 말을 듣는 것은 말을 하기 위함이요, 공부하는 것은 우리 역시 남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다시 한번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정리한다.

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성에 제어되지 않고 욕망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고, 이념의 수행자가 아니라 욕망의 실행자가 된다는 것이며, 다른 사람의 말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말을 하려는 사람입니다. 삶의 궁극적인 동력은 결국 나를 표현함에 있어야 합니다.
- <나는 누구인가> 중에서

경계를 품고, 기준을 정하고, 표현하는 삶. 자신의 주인으로 사는 삶이다. 자신의 주인으로 사는 법을 알았으니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최진석 교수는 이런 당부의 말을 했다. 이론을 알았다고 해서 이루어진 건 아무것도 없는 거라고. 다이어트 이론을 섭렵했다고 해서 다이어트가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는 이론을 사건으로 만드는 건 우리 자신에게 달렸다고 말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우리가 사건의 주인이 되야 한다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나는 누구인가>(강신주, 고미숙, 김상근 외 /21세기북스/2014년 08월 20일/1만5천원)



나는 누구인가 - 세상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

강신주 외 지음, 21세기북스(2014)


#강신주#고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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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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