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통, 혼인빙자간음, 부부 강간, 성매매. 공통점이 떠오르는가. 개인의 성생활에 국가가 개입해야 하느냐, 아니면 자유 의사에 맡겨야 하느냐가 치열하게 대립하는 사안들이다. 개인의 사생활 중 제일 은밀한 영역을 꼽는다면, 바로 성(性)이다. 성과 관련한 행동은 누구나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이른바 '성적 자기 결정권'이라고 한다.이 중에서 간통과 혼인빙자간음은 개인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성매매는 아직도 치열한 논쟁 중이다. 사실 '개인의 성생활에 어디까지 국가가 개입해야 하는가'는 어려운 문제다. 판결 대 판결 18번째 이야기는 국가의 형벌권과 성적 자기 결정권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두 가지 사안을 살펴본다. 혼인빙자간음죄 헌법 소원과 육사 생도의 성 관계 퇴학 취소 소송이다. - 기자말
[판결 1] 혼인빙자간음죄 헌법 소원"지나씨, 나랑 결혼합시다. 제가 나이는 많지만 행복하게 해줄 자신 있어요."성기돈(가명)씨는 이지나(가명)씨에게 청혼을 했다. 두 사람은 사업 때문에 우연히 만났다. 성씨는 사업보다는 이씨에게 매달렸다. 그 때 성씨 나이가 50대 중반, 지나씨가 40대 초반이었다. 사랑 앞에 나이가 대수랴. 여기까진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성씨는 20여 년 전 이미 결혼한 상태였고 2명의 자녀까지 있었다. 성씨는 재력을 과시하면서 환심을 사려고 애를 썼고, 사정을 모르는 지나씨는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 후 두 사람은 수시로 잠자리를 같이 했다.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성씨는 지나씨를 통해 알게 된 친동생 지영(가명)씨에게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달 뒤 고백을 했다. "지영씨, 언니하고 나는 그냥 일 때문에 만나는 사이일 뿐이야. 난 지영씨밖에 없어. 나 믿지? 결혼하자. 외국 나가서 둘이만 살자. 사랑해." 성씨의 감언이설에 지영씨도 넘어가고 말았다. 이렇게 성씨는 자매를 번갈아 만나면서 잠자리를 함께 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두 자매는 성씨가 각자에게 구혼을 했다는 걸 알게 됐다. 뒤늦게 속은 걸 알게 된 두 사람은 배심감과 수치심에 치를 떨었다. 그리고 성씨를 형사 고소했다. 이때가 2008년이다. 성씨는 무슨 죄일까?
바로 혼인빙자간음죄다. '혼인을 빙자하거나 기타 위계로써 음행의 상습없는 부녀를 기망하여 간음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쉽게 말해, 여자에게 결혼하자고 꼬드겨 성 관계를 한 남성을 처벌하는 죄이다. 이 죄를 기준으로 보면 성씨는 두 여자를 농락했으니 죄질이 불량하다. 1심 법원은 2009년 성씨에게 징역 10월형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성씨는 반성은커녕 억울함을 호소했다. 사랑이 죄란 말인가. 국가가 왜 성생활까지 개입하나. 성씨는 항소를 제기했다. 그리고 동시에 헌법 소원을 제기했다. 성씨의 행위는 적반하장일까, 아니면 정당한 권리 찾기일까.
2002년 헌재 "사회적 약자인 여성 보호 위해 필요"1953년 만들어진 혼인빙자간음죄는 여성 보호를 명목으로 40년 넘게 유지돼 왔다. 그런데도 헌법재판소는 2002년까지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보호하려는 정당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죄는 문제 투성이다. 몇 가지만 들어볼까.
먼저, '음행의 상습 없는 부녀'만을 보호한다고 했다. 상습성은 누가 어떻게 판단하나. 또 음행의 상습 있는 여성은 왜 제외하나. 법으로 보호할 가치도 없다는 말인가. 둘째, 결혼하자고 꼬드겨야만 죄가 된다. 결혼 얘기만 안 하면 성 관계를 해도 죄가 안 된다. 결혼할 뜻이 있어서 잠자리를 했는데 나중에 마음이 바뀌면? 처벌을 면하려면 결혼해야 할까.
이래저래 너무 자의적이다. 셋째, 여자는 남자를 유혹해서 잠자리를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 이건 여성이 판단 능력이 떨어지거나, 여성의 '정조'만 보호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야만 가능하다. 심하게 얘기하자면 남자의 '아랫도리'를 나라가 관리하겠다는 심사다. 한 마디로 국가의 '꼰대질'이다.
성기돈씨의 헌법소원으로 2009년 헌재는 또 다시 판단을 내린다. 성씨의 호소가 통했던 걸까. 이번에는 위헌으로 판명난다. '혼인빙자간음죄는 개인의 내밀한 성생활을 형사 처벌함으로써 남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했다'는 것이다.
2009년 헌재 "어떤 종류 사랑하건 개인의 자유 영역" 위헌 결정 헌재는 혼인빙자간음이 침해하는 기본권과, 지키고자 하는 공익 두 가지를 놓고 무게를 달아보니 기본권이 과도하게 침해됐다고 보았다. 성생활에 국가 개입을 억제하는 것이 현대 형법의 추세다. 예외적으로 성 문제에 폭력·강압 또는 거래가 동원되거나, 미성년자가 이용되거나, 전염병을 옮기거나 하는 반사회적 문제가 수반됐을 때 국가가 역할을 하면 된다. 원래 남성이 여성을 유혹할 때는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고 그 과정에서 과장이 뒤따르기도 한다. 그런데도 결혼 문제가 개입됐다는 이유로 형법이 개입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헌재의 결정에는 "여성을 성적 의사 결정의 자유도 제대로 행사할 수 없는 존재로 비하하고 있으므로 남녀 평등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의견을 낸 여성부의 전향적인 의견도 영향을 미쳤다. 지금은 결혼 때까지 정조를 지켜야 하는 조선 시대가 아니다. 헌재는 강압적 요인이 없는 성생활은 "여성 자신의 책임에 맡겨야 하고 형법이 개입할 분야가 아니"라고 했다. 아래는 헌재 결정 이유의 요지 일부분이다.
"성인이 어떤 종류의 성행위와 사랑을 하건, 그것은 원칙적으로 개인의 자유 영역에 속하고, 다만 그것이 외부에 표출되어 명백히 사회에 해악을 끼칠 때에만 법률이 이를 규제하면 충분하다."헌재의 위헌 결정이 내려지고 한 달 뒤 법원은 성씨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다. 자매를 농락한 성씨를 두둔할 사람은 없다. 이씨 자매가 받은 상처와 배신감도 형언할 수 없으리라. 그렇다고 국가가 나서서 성씨를 처벌해야 할까. 다시 강조하지만 성생활은 성인 남녀의 자유 의사에 맡겨야 한다. 자유로운 의사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그 때 국가가 개입하는 게 맞다. 나머지는 도덕이나 민사상 손해 배상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번엔 군대로 눈을 돌려보자. 군기와 복무 규율, 명예를 중시하는 군대에서도 성적 자기 결정권이 인정되고 있을까. 육군사관학교에서 발생한 사건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리고 있다.
[판결 2] 육사 생도의 성 관계 퇴학 취소 소송박하늘(가명)씨는 2009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졸업을 1년 가량 앞둔 2012년 초 겨울 휴가를 나온 박씨는 어머니 명의로 서울에 옥탑방 원룸을 얻었다. 그는 외박을 나가면 그곳에서 결혼을 전제로 교제 중인 여자친구와 잠자리를 함께했다. 또한 사복을 입고 외출을 하는 등 월 2회로 제한된 사복 착용 규정을 어겼다.
박씨는 양심 보고(육사생들이 자신이 규정을 위반했을 때 자발적으로 보고를 하는 행동)에서도 사복 착용 규정 위반만 보고하고, 여자 친구와의 성 관계 등 나머지 사항은 보고하지 않았다. 육군사관 학교장은 "정직과 용기 면에서 장교 임관에 제한될 것으로 판단"하고 박씨에 대해 퇴학 처분을 내렸고, 이에 불복한 박씨는 행정 소송을 제기했다.
결혼 앞둔 애인과 동침, 퇴학 사유?박씨가 중징계를 받은 사유는 ① 월 2회 사복 착용 규정 위반 ② 원룸 임대 및 사용에 대한 양심 보고 불이행 ③ 원룸에서의 동침 및 성 관계, 이에 대한 양심 보고 불이행이었다.
법원(서울행정법원 11부 재판장 문준필)은 어떻게 보았나. ①은 징계 사유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핵심 징계 사유인 ②, ③에 대해서는 다른 결론을 내렸다.
육군사관학교의 생도 생활 예규에는 동침 및 성 관계 금지 규정이 있다.
제35조(남녀 간의 행동시 준수사항)6. 도덕적 한계(성관계, 성희롱, 성추행, 남녀 간의 동침, 임신, 동거)를 위반하는 행위는 성 군기 위반 행위로 강력하게 처벌받을 수 있다.이 규정에 따르면 육사 생도는 결혼을 약속한 이성과 잠자리를 해도 처벌을 받게 된다. 이 규정은 개인의 행복 추구권을 보장하는 헌법 제10조와도 충돌한다. 법원은 동침 및 성 관계 금지 규정을 헌법의 잣대로 판단했다.
법원은 "개인의 인격권·행복추구권에는 일반적 행동의 자유와 개인의 자기 운명 결정권이 전제되는 것이고, 자기 운명 결정권에는 성 행위 여부 및 그 상대방을 결정할 수 있는 성적 자기 결정권이 포함돼 있다"면서 "'동침 및 성관계 금지 규정'이 일반적 행동의 자유와 개인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제한한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개인의 성 생활이라는 내밀한 사적 생활 영역에서의 행위를 제한하므로,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도 제한한다"고 판단했다.
헌법에 따르면 기본권은 무제한 보장되지는 않고 "국가 안전 보장, 질서 유지 또는 공공 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그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지 않는 한도에서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그런데 기본권을 제한하려면 ① 목적의 정당성, ② 수단의 적합성, ③ 피해의 최소성, ④ 법익 균형성을 갖춰야 한다. 이것을 비례의 원칙(또는 과잉 금지의 원칙)이라고 한다.
법원 "성적 자기 결정권 침해... 퇴학 처분은 부당" 법원은 '동침 및 성관계 금지 규정'이 ① 목적의 정당성은 인정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②, ③, ④는 통과하지 못했다. 법원은 "최근 성의 개방 풍조는 막을 수 없는 사회 변화고 그것을 용인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면서 "성인이 쌍방의 동의 아래 어떤 종류의 성 행위와 사랑을 하건, 그것은 개인의 자유 영역에 속하고, 다만 그것이 외부에 표출돼 사회의 건전한 성 풍속을 해칠 때만 비로소 규제를 필요로 한다"고 전제했다.
그런데 "사회의 건전한 성 풍속을 해치는 정도에 이르지 않은 성 행위와 사랑까지 제재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일반적 행동 자유권, 성적 자기 결정권,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형해화하므로, 법익 균형성이 없다"고 했다. 즉 도덕적 한계를 위반한 성 관계만을 제재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법원은 "박씨의 성 관계는 개인의 내밀한 자유 영역에 속할 뿐 성 군기를 문란하게 하거나 사회의 건전한 풍속을 해친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징계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법원은 '양심보고 불이행'도 헌법상 양심의 자유 측면에서 접근해 징계 사유로 타당하지 않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법원은 육군사관 학교장의 퇴학 처분은 재량권을 넘어선 것으로 보아 징계 취소 판결을 내렸다.
대한민국에서 장교로 임관을 앞둔 사관 생도가 결혼 예정인 여성과 잠자리를 했다는 이유로 퇴학 처분을 받았다는 사실이 씁쓸하기만 한다. 박씨는 징계 취소 판결을 받았지만, 육사를 자퇴하고 일반 대학에 진학했다. 육사는 2015년 음주, 흡연, 혼전 성관계를 금하는 이른바 '3금 제도'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지침을 손질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동안 육사 생도에겐 성적 자기 결정권을 인정하면 안 될 이유가 있었을까. 아직도 '군의 특수성', '남북이 분단된 현실' 운운하며 육사 생도의 기본권 제한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은 누군가.
○ 편집|조혜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