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11일은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아래 임정)가 수립된 날이다. 그 동안 4월 13일을 임정 수립 기념일로 기려온 것은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선포한 날을 중심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정은 이틀 전인 4월 11일에 수립됐다고 하는 게 옳고, 정확하다(따라서 기념일은 다시 지정하는 게 마땅하다).
4월 11일, '왕정'에서 '민주 공화정'으로상하이에서 우리 독립운동가 29명이 오늘날의 국회 격인 임시 의정원(議政院·의장 이동녕)을 구성하고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연 것은 그 하루 전인 4월 10일이었다. 밤 10시부터 시작된 회의는 다음날까지 계속됐고 마침내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는 임시헌장을 제정해 통과시켰다. 1919년 4월 11일 오전 10시였다.
그것은 비록 국권을 빼앗겼지만, 그간 한반도에서 이어져 온 '왕정'을 '민주 공화정'으로 바꾸는 혁명적 정체(政體)의 전환이었다. 그리하여 임정의 수립은 우리 '5천 년 역사'의 분수령이었고, 봉건과 근대를 가르는 변곡점이었다. 그것은 3·1운동에서 드러난 독립 정신을 토대로 임금의 나라 '대한제국'을 마감하고 백성의 나라 '대한민국'을 선포한 것이었다.
이후 임정은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무려 27년 동안 이국땅에서 온갖 간난과 신산(辛酸)을 감내하며 처절한 독립 투쟁을 벌였다. 숱한 유·무명의 독립지사들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일제의 감옥에서 싸우다 스러져갔다. 그들의 피어린 희생 끝에 해방이 됐고, 그 주춧돌 위에 우뚝 선 나라가 오늘의 대한민국인 것이다.
"27년이나 되는 긴 기간 동안 정부 조직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 식민지 해방 투쟁을 벌인 나라는 세계에서 오직 대한민국뿐이다."- 이봉원 <알기 쉬운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사>(정인출판사, 2013)'망명 정부'의 역사 '27년'은 이전에는 물론, 이후로도 없을 초유의 기록이다. 영국의 지지를 받긴 했으나 미국의 승인을 받지 못했던 드골의 '자유 프랑스'는 물론, 합법 폴란드 망명정부도 그 활동 기간은 5~6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정은 일제 강점기 36년 가운데 27년 동안 유일한 망명 정부로서 소임을 다하면서 유지됐다. 그러나 임정엔 정부 운영의 물적 기반도 없었고 중국의 도움 외엔 외부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임정은 청사를 유지하는 일도 쉽지 않아서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무려 8개 도시를 전전해야 했다. 그런 세월이 27년이었다.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기미년(1919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 임시 정부의 계승이니, 이날이 29년 만에 민국의 부활일임을 이에 공포하며, 민국 연호는 기미년에서 기산(起算)할 것이요..."1948년 제헌의회 개원식에서 의장 이승만이 행한 개회사의 일부다. 초대에서 5대까지 임정의 수반을 역임한 이승만으로서는 당연한 회고였을 것이다. 실제 그 해 발행된 대한민국 정부의 관보 제1호는 발행일을 '대한민국 30년'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헌법 전문에 명시된 '임정의 법통'여러 차례 정치적 이유로 개정을 거듭해 온 우리 헌법도 그 전문(前文)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을 명시하고 있다. 이 역시 '임정이 대한민국의 뿌리'라는 헌법적 인식의 증거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우리 헌법과 임정의 법통을 이은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부정으로 간주되는 까닭이 여기 있다.
백범 김구와 그가 주도한 한인애국단의 의거를 '테러'로 묘사하는 뉴라이트와 그 지지 세력이 이승만을 국부로 옹립하고 싶어 안달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러면서도 이승만이 참여해 수반까지 지낸 임정의 역사를 지우고 싶어 하는 자가당착은 그들에게 드리운 '친일'의 역사를 지우고 싶어서일까.
그런데 자랑스러운 임정의 역사를 오늘을 사는 한국인에게 일러주는 것은 한국사 교과서의 몇 줄 기록이 다다. 임정이 수행한 처절한 투쟁의 역사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기념관 하나 없는 것이다. 하긴 독립기념관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에 대응해 해방 42년 만인 1987년에야 세워졌으니 무엇을 말하랴.
임정의 역사 하나 기리지 못하는 현실이 결국은 뒤틀린 역사 인식을 불렀던가. 일제 식민지 시기에 근대화가 비롯했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거기에 기반한 뉴라이트 세력들의 왜곡된 <한국사> 교과서 파동은 그러한 현실의 산물인 것이다. 단죄는커녕 그 진상을 기록하는 일조차 민간에 맡겨 버린 친일 문제 등 청산하지 못한 역사와 함께 말이다.
그리고 '광복절' 대신 정부수립일인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제정하자는 몰역사적 주장이 그 연장선 위에 있다. 이는 임정과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수행된 독립 운동과 해방 투쟁의 역사가 두려운 친일 기득권 세력의 교묘한 역사 왜곡의 시도인 셈이다.
올해는 3·1운동과 임정 수립 96돌이 되는 해니 4년 후인 2019년에는 임정 수립 100년을 맞는다. 일제의 식민지가 된 지 9년, 온 나라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던 기미년 '3·1운동의 민주·자주·자유·평화의 정신'(이만열)이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건설한 것이었다.
그리고 100년, 여전히 분단의 질곡을 벗지는 못하고 있으나 오늘의 대한민국은 험난한 민주화 과정을 거쳐 오늘날 세계에 유례없는 발전을 이룬 모범 국가가 됐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대한민국의 모태인 임정의 역사를 기리는 어떤 상징물도, 건축물도 없다.
임정 백 년, 기념관 건립 관련 논의일찍이 미국이 독립 100주년을 맞아 '자유의 여신상'을 세우고, 프랑스가 프랑스 혁명 100주년에 '에펠탑'을 세운 뜻을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과 혁명 100돌 기념 에펠탑 같은 기념 상징물이 미국과 프랑스의 전유물일 수는 없다.
이는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가 '3·1운동 100주년 기념탑'과 '대한민국 100주년 기념관'을 웅장하게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이 원로 역사학자는 <경향신문>의 지난 9일 자 시론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바라보며'에서 임정 수립으로 "1910년에 사라진 '대한제국'은 9년 후 이렇게 '대한민국'으로 새롭게 탄생했다"며 임정을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로 평가했다.
임정 기념관 건립은 하고 많은 기념관 중 또 하나를 보태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임정이 상징하는 역사와 시대 정신,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 '민국(民國)'을 표방하고. 세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선열이 희생됐는가를 후세에 가르치기 위함인 것이다.
국가 주도로 임정 기념관을 세워야 한다는 논의는 이제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듯하다. 기념관과 상징물 건립을 주장한 이만열 교수 외에도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기념관 건립은 물론, 임정기록물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은 임정기념사업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기념관 부지 선정에 박원순 서울시장의 적극적 협력을 희망했다. 그는 <한겨레>의 지난 9일 자 시론에서 임정이 상징하는 '독립 정신과 민주공화정의 정신'을 '민족의 가치, 대한민국의 토대'일 뿐 아니라 우리가 영구히 지켜내야 할 '귀중한 자산'으로 평가했다.
임정 기념관 부지 선정과 관련 박덕진 임정기념사업회 연구실장은 지난해 12월 8일 <한겨레> 칼럼에서 서울시가 '돈의문 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하면서 철거를 저울질하고 있는 유한양행 옛 사옥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으로 활용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유한양행 옛 사옥 바로 옆의 경교장(京橋莊)과 연계하면 훌륭한 근현대사 테마 길이 조성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홍소연 전 백범기념관 자료실장은 임정기념관은 용산에 지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외세의 상징인 용산에, 외세에 항거했던 역사를 남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용산공원이 개발되면 단순히 시민이 쉼터에 그치지 않고 독립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놓았던 이들이 있었다는 걸, '외세의 교두보'인 용산에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지방자치가 정착되면서 지역마다 여러 종류의 박물관과 기념관, 전시관이 넘치고 있다. 지역마다 관광 수입을 노린 관광 자원 개발에 경쟁적으로 나선 결과다. 수억에서 더러는 백억 원이 넘게 소요되는 이들 시설(물)은 그 성과와 무관하게 시행되는 단체장의 치적용 '묻지 마 투자'로 비난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임시 정부 100돌을 내다보며 민족의 수난과 영광을 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을 세우는 일은 이제 더 이상 늦춰져서는 안 된다. 정부가 주도하되, 나라의 주인인 '민'이 참여하는 공간을 함께 추진하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거듭 말하거니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기념관을 세우는 일은 여느 기념관 수립과는 다른 일이다. 조국 독립을 위해 자기 삶의 모든 것을 바쳐 온 이들이 지켜온 정부가 임시 정부였다. 이들은 조국 해방을 위해 20세기를 '19세기 방식'으로 산 이들이다.
외국의 간섭이 없고, 분열 없는 자주 독립을 쟁취하는 것은 민족의 지상 명령이니, 이 지상 명령에 순종할 따름입니다. 우리가 망명 생활을 삼십여 년이나 한 것도, 가장 비현실적인 길인 줄 알면서도 민족의 지상 명령이므로, 그 길을 택한 것입니다. - 김구, <백범어록> 중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길인데도 오직 민족의 지상 명령이었기에 기꺼이 그 길을 마다치 않고 갔던 이들 덕분에 우리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누리며 산다. 임정 100년, 임시의정원 수립 100년을 맞으며 그들의 삶과 투쟁을 기리는 기념관이 우뚝 세워지는 광경을 그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이유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