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지역 대표적 독립운동가의 한 명으로 꼽히는 김태원(金泰源, 1900~1951).
<오마이뉴스>는 그가 '동명이인' 독립운동가의 행적으로 서훈을 수여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국가보훈처가 서훈을 수여하면서 '평북 김태원'의 '벽창의용단 활동'을 '대전 김태원'의 공적으로 보고 서훈을 준 의혹이 있다는 문제제기였다. 이 같은 의혹은 '평북 김태원'의 족보기록을 통해 사실로 확인됐다.
[관련 기사][독립운동가 진위 논란①] '훈장'까지 받은 독립운동가, 행적이 의심스럽다[독립운동가 진위 논란②] 수정액으로 '독립운동 행적' 삭제... 누가, 왜?보훈처가 밝힌 '대전 김태원'의 공적 내용 중 '평북 김태원'의 공적을 끌어다 쓴 '벽창의용단' 활동을 제외하면 남는 공적은 ▲ 1919년 직후 상해임시정부 활동 ▲ 1927년부터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12년간 헌신 두 가지다.
하지만 그의 임시정부 활동에 대한 근거자료와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확인되는, 그의 중국 행적은 22세(1922년) 때 중국 운남육군강무학교(공과) 재학 중에 찍었다는 사진이 남아 있는 정도다.
'대전 김태원' 후손 "1919년 임정 충북 특파원" 주장
그런데 '대전 김태원'을 소개하는 한 자료에는 1919년 직후 활동에 대해 '성품이 강직하고 의지가 굳어 백범 김구 선생의 총애를 받던 중 임시정부 충북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임정의 선전활동, 시위운동의 준비와 실행 등을 담당했다'고 밝히고 있다. 1997년 대전애국지사숭모회에서 대전 대덕구에 세운 그의 어록비에도 '임정 국내 특파 충청도 책임자로 임정의 자금조달을 담당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임정 충북 특파원'으로 활동했다는 것이다.
임정특파원의 임무는 임시정부 수립 계몽, 독립사상 고취, 국내 지도자와 협의, 독립운동 단체 조직, 정세 파악, 연통제(임정의 국내 비밀 행정 기관, 각 도·군·면에 연락 책임자를 두어 정부 문서와 명령 전달, 군자금 송금, 정보 보고 등의 업무 담당비밀 연락 조직)와 교통국(임정 내 비밀 통신 기관, 정보 수집, 분석, 교환) 활동 상황 보고 등이었다. 관련 연구가들은 "임시정부 초창기 국내의 민심을 임시정부로 집중시킨 특파원의 활동은 실로 중대한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1919년은 '대전 김태원'이 중국으로 건너간 직후로 19세 때다. 당시 임시정부 문서에도 '김태원'(金泰源)을 7월 23일 자로 임시정부 충북 특파원으로 파견했다'고 돼 있다. 그런데 또 다른 독립운동가인 '안성 김태원'(金泰源, 1896~1975, 충북 보은 출생)의 공적 내용에는 그가 "1919년 7월 임정 특파원이 되어 충북 지방에서 활동했다"고 밝히고 있다. '안성 김태원'은 '임정 충북 특파원'과 '혈복단' 활동 등으로 1990년에 '애족장'(건국훈장 5등급) 서훈을 받았다. 두 사람 중 누가 '진짜 임정 특파원'이었던 걸까?
'안성 김태원 vs '대전 김태원'... 누가 진짜 '임정 충북특파원'?'대전 김태원'의 후손인 김정인(80·광복회대전지부장)씨는 기자와 만나 "부친이 진짜 '임정 충북 특파원'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재판기록을 보면 재판장이 '안성 김태원 선생'에게 '임정 특파원이었냐'고 묻자 '전혀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한 것으로 돼 있다"며 "따라서 진짜 '임정 특파원'은 우리 아버지가 틀림없다"고 강조했다.
김씨의 언급은 '안성 김태원'을 상대로 1921년 10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을 말한 것이다. '안성 김태원'은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의 한국방문을 민족의 진위를 알릴 기회로 보고 한 훈, 서대순, 이운기, 명제세 등 21명의 동지들과 '암살행동단'을 조직, 일본 총독을 암살하려다 비밀 누설로 일경에 체포됐다. 일경은 이때 '안성 김태원'의 '임정 특파원'과 '혈복단'(항일투쟁 조직) 활동도 기소 내용에 포함했다.
다음은 당시 언론보도(<동아일보> 1921년 10월 28일 자) 기사를 토대로 재판장의 '안성 김태원'에 대한 심문 내용을 기자가 대화체로 바꿔 재정리한 것이다.
재판장(아래 문): "몇 해 전에 상해에 갔다.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1919년 임정 충북특파원으로 활동한 일이 있나?"안성 김태원(아래 답): "전혀 없다."문: "그럼 왜 상해에 갔나?"답: "공부하러 갔다."문: "공부하러 갔는데 조선에는 왜 들어왔나?"답: "조선에 들어온 목적은 오랫동안 뵙지 못한 부모를 만나고 혼인을 하기 위해서다."문: "(깔깔 웃으며) 혼인하러 온 게 아니라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독립군) 괴수로 온 것이다. 피고의 이름이 여기저기 나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아무리 사실을 부인해도 소용없다. 내가 그 증거를 제시하겠다(재판장이 국무총리 이승만 이름이 박힌 충북특파원 사령장을 펴 보인다)."문: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은 이름을 가졌는지 모르나 전혀 그런 일이 없다."답: "피고가 신△△으로부터 연통제(임정의 국내 비밀 행정 기관-기자 주) 규칙서를 받아 김△△ 등에게 나눠주지 않았나?"문: "그런 일 없다."답: "김△△을 조사했는데 피고에게 연통규칙을 받았다고 이미 말했다."문: "그런 일 없다."답: "혈복단에 가입, 독립운동 활동을 한 일은 인정하나?"문: "그런 일 없다."한 마디로 '안성 김태원'이 모든 활동을 부인한 것이다. 이는 재판에 임하는 전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부인에도 재판부는 혐의가 모두 인정된다며 징역 3년 형을 선고했다. 그는 출소 이후에도 끈질긴 독립 활동으로 1942년 3개월간 또 다시 투옥된다. 그는 해방이 되자 '임정 충북 특파원'이었고 '혈복단'에 가입해 활동했음을 공개적으로 밝혀왔다.
따라서 그가 재판정에서 '임정 특파원' 활동을 부인한 일과 '대전 김태원'이 '임정 특파원'인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또 다른 근거가 있다. '안성 김태원'과 함께 징역형을 받은 독립운동가 '명제세'도 임정 특파원이었다. 충남 논산 '혈복단' 단장을 맡은 독립운동가 '신현구'는 당시 혈복단 조직을 임정으로부터 국내 특파원으로 파견된 김태원 등과 연대해 결성한 조직이라고 밝히고 있다. '혈복단' 활동을 한 '안성 김태원'과 '임정 충북 특파원'이 거듭 확인되는 대목이다.
국가보훈처, '대전 김태원' 행적 재조사하고도 '이상 없음' 결론
국가보훈처는 '대전 김태원'의 공적 내용에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12년간 헌신'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 '대전 김태원'의 후손인 김정인씨는 부친이 탈옥 후 북경에 주재하며 '임시정부실무 업무처리 책임자'를 맡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살펴 본 것처럼 '대전 김태원'의 탈옥 이전은 물론 이후의 임정활동 기록과 독립운동 사료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김정인씨도 "부친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근거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며 "아마 일경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일절 자료를 남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평북 김태원'과 '안성 김태원'의 행적을 넘나드는 '대전 김태원'의 독립운동 행적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그런데 <오마이뉴스>는 취재 도중 중요한 얘기를 들었다. 지난 2011년경 국가보훈처가 '대전 김태원'의 독립운동 행적이 의심스럽다는 제보에 따라 재조사를 벌였다는 것이다. 자료를 재검토하고 후손들에게 관련 자료를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보훈처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잘못된 기록을 바로 잡을 기회를 놓친 셈이다. 보훈처가 어떤 근거로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보훈처는 <오마이뉴스>가 사실 확인을 요청한 지 일주일째 같은 답변만 내놓고 있다. 보훈처 관계자는 14일 오후 "현재 관련 자료를 확인 중이다"면서도 "자료 공개 여부는 아직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한편 '대전 김태원'의 후손인 김정인씨는 15일 "<오마이뉴스>가 선친의 독립운동 행적을 근거 없이 헐뜯어 명예를 훼손했다"며 "검토를 거쳐 법적 대응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 편집|손병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