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5월이면 친구 한 명이 장장 50일간의 유럽 여행을 떠난다. 작년 10월경 친구는 갑자기 인터넷을 뒤지더니 항공권을 예매했다. 그리고는 씩 웃으며 떠날거야, 라고 말했다.
중학교 때부터 친구의 꿈은 오로지 선생님이 되는 거였다. 공부를 잘했던 친구는 사범대에 입학했고, 임용 고시만 붙으면 친구의 꿈은 이루어질 거였다. 그런데 그 꿈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험에 몇 번 낙방 한 뒤 친구는 대학원에 진학했고, 이후 또 다시 시험에 도전했지만 또 한 번의 실패만을 맛봤다. 그렇게 몇 년을 고시생으로 지내던 친구는 언젠가부터 시험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거듭되는 실패에 의기소침해지고 좌절감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기간제 선생님으로서도 꿈에 그리던 선생님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선생님으로 5년의 시간을 보내던 친구는 작년, 선생님의 삶을 포기했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더는 이 일을 하지 않겠다고 친구는 말했다. 이렇게 결심하고 난 뒤 친구는 잠시 힘들어하기도 했었다.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게 되어서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선생님 하나만을 목표로 삼고 달려왔던 터라 꿈도 목표도 없는 지금의 상황이 두려워 힘이 든다는 거였다.
이랬던 친구는 얼마 후 돌연 홀가분한 표정으로 나타나 말했다. 무언가 자신을 옭아매던 것들이 자기 주위에서 사르르 녹아 없어진 것만 같다고. 선생님을 그만두겠다고 생각하니 우울하던 것도 잠시, 서서히 기분이 좋아지고 삶의 기운이 샘솟았다고. '내가 왜 이러지?' 하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선생님이란 목표는 그저 엄마가 어린 자신에게 심어준 것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 친구의 말이었다. 이제 비로소 본인 스스로 자신의 삶을 생각할 수 있게 되어 그저 행복하다던 친구. 그렇게 그 친구는 얼마 후 항공권을 예매했던 거였다.
친구에게 이번 여행은 통과의례의 의미를 띠고 있는 것 같았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꼭 거쳐야만 하는 그 무엇으로서의 여행. 사람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여행을 떠나지만, 그 중 통과의례의 의미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여행 내내 스케치북과 연필을 내려 놓지 않았던 김현길 역시 마찬가지였다.<시간을 멈추는 드로잉>은 그림이라는 꿈을 향해 다시 달려가기로 결심한 한 청년의 지나간 삶과 다가올 삶, 그 중간에 놓여 있는 하나의 통과의례였다.
계절이 가을로 들어설 때 3년간의 직장생활을 정리했다. 정말이지 오랜 고민의 결과였다. 사무실에서 챙겨온 물건들로 묵직해진 가방을 메고 손때 묻은 사원증을 보안요원에게 건넸다. 밤낮으로 간절히 날 원했던 일터에 비로소 이별을 통보했다. 회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쿨했다. 남이 되어 버린 나에게 구질구질하게 매달리지 않았다. 끙끙대며 속병을 앓았던 지난 시간은 물 흐르듯이 진행되는 퇴사 절차에서 그 의미를 잃어버렸다. - <프롤로그> 중에서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저자 김현길은 수능을 1년 앞두고 그림을 포기했다고 한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그는 이후 대기업에 입사했고 스케치북 앞이 아닌 모니터 앞에 앉아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버텨내는데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
그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그였다.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그는 일상에서 더 멀리 벗어나 한 대상에 집중한 채 그것을 드로잉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비로소 자신을 괴롭히던 것들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에게 그림은 휴식이자 치유 그 자체였던 셈이다. 이런 그가 회사를 그만두자마자 드로잉 여행을 떠난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자연스런 수순인 듯 보인다.
38일간의 유럽 여행. 프랑스에서 시작해 스페인, 이탈리아를 거쳐 스위스, 오스트리아, 체코, 그리고 마지막으로 터키에 이른 그의 여행엔 그가 남긴 드로잉이 가득 했다. 에펠탑, 몽생미쉘, 가우디의 건축물, 콜로세오, 트레비 분수, 피렌체 두오모 대성당, 스위스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 합스부르크 왕궁, 바츨라프 광장, 아야 소피아 등등 굵직굵직한 유럽의 모습에서부터 유럽 문화 속 아기자기한 일상의 모습까지, 그의 그림들은 하나 같이 사랑스럽고 경쾌한 터치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문득 문득, 거리를 걷는 문득 문득, 그는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지금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생각, 미래에 대한 초조감을 떨쳐 내야겠다는 생각, 예전의 습성을 버리고 느긋해져야겠다는 생각, 이 여행을 위해 참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다는 생각, 앞으로의 시간을 방종의 시간으로는 만들면 안 되겠다는 생각, 그리고 "누가 일러주지는 않았지만 그 다짐을 지켜내려면 앞으로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리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원하는 목적지로 달려가다 보면 넘어져 아파하기도 하고 때론 흙탕물에 허우적대며 더러워지기도 할 테지. 하지만 타의에 젖어 목적 없는 성실함을 강요받던 과거의 시간을 떠올려보면 힘들더라도 내가 선택한 길을 걷고 있는 현재의 시간이 행복하다"는 생각까지.
하지만 여행이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저자는 닥쳐올 현실이 무겁게만 여겨졌다. 여행이 끝나고 난 뒤 더는 돌아갈 곳이 없다는 막막함 때문이었다. 그를 보호해줄 보금자리는 더는 없다. 그는 더 이상 어느 곳에도 소속돼 있지 않은 사람이었으니까. 이는 분명 누구에게나 매우 절망스러운 상황일 것이다. 저자 김현길 역시 절망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다시 벌떡 일어선다. 그는 사실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미 쉽지 않은 싸움을 시작한 것"을 말이다.
사람들은 왜 여행을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것일까. 여행이 무엇을 주기에. 여행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기에. 여행의 힘이 무엇이기에.
여행을 마친 저자는 말한다. 여행지에서의 크고 작은 어려움들을 뚫고 목표를 성실히 수행해 "마침내 여기까지" 온 자기 자신을 더 믿을 수 있게 되었다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커지니 조급함도 두려움도 사라져버렸다고. 그러자 "보수포루스 해협의 갈매기만큼이나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통과의례로 삼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마침내 해낸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얻고 싶은 것이다. 이 믿음을 통해 자유로워진 강한 나와 마주하고 싶은 것이다. 강한 나와 함께라면 거뜬히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나의 힘, 나의 능력을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주어진 시험 절차를 따라 삼십 년, 사십 년을 살아온 우리들은 단 한 번도 우리 본연의 힘을 마주한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기획하고 끝마친 사람만이 자기 자신의 힘과 마주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여행을 마음에 품는 것일 테다. 알고 있으니까. 여행지에 발을 내딛는 순간, 나의 힘과 마주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덧붙이는 글 | <시간을 멈추는 드로잉>(김현길/ 재승출판/ 2015년 03월 30일/ 1만6천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