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이란 단어는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공평의 정의는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고른 상태'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공평한 상황을 갈구하고, 과정이 공평했다면 결과에도 수긍한다.
법원의 판결은 그런 의미에서 반드시 공평해야 한다. 재판은 그 자체로 사회정의의 척도가 된다. 헌법 제11조는 분명히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명시했다. '유권(權)무죄 무권유죄'가 되어서는 안 된단 말이다.
법률은 자연히 법리적 충돌을 동반한다. 세상의 모든 일을 예단해 규정해 놓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치열한 논쟁이 공평한 과정에서 벌어지고 그 토대 위에 판결이 내려진다면, 결과에 대해 누구도 의문을 갖지 않을 게다.
<공평한가?>를 함께 쓴 변호사와 법학자들이 찾고자 했던 의미는 그 지점이다. 결과보다는 과정의 공평, '어떤 논리로 도출된 결과인가'다. 즉, 법원의 판결이 누가 이겼는지에 그쳐서는 안 되며 결론에 이르는 근거와 논리를 시민이 수긍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시민이 수긍할 수 없는 판결은 판결이 아니다. 민주공화국에서 입법권과 행정권이 주권의 일부인 것처럼 사법권도 시민의 것이기 때문이다. 판사는 시민을 대신해 판결을 할 책임을 부여받은 것일 뿐이다. '판사의 판결'은 '시민의 판결'이 되어야 하고 시민이 수긍할 수 있는 판결이 되어야 한다. - <공평한가?>에서사법부 또한 국가 권력이며, 국민으로부터 위임 받았기에 시민 사회는 그들을 견제할 권리와 마땅한 의무가 있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이 작업의 일환으로 <공평한가?>를 통해 '판결 비평'을 시도했다. 책에는 2005년부터 2014년까지의 판결 중 사회 변화의 흐름을 반영하지 못하거나 국민의 법 감정과 괴리된 사례들이 실렸다.
국회가 고심해 만든 제도, 너무 쉽게 뒤집은 법원책에 실린 가장 최근의 법원 판결을 보자. 판결이 가진 논리의 빈약함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2014년 12월 12일, 서울고등법원 행정8부는 동대문구청장과 성동구청장이 대형마트들에게 내린 심야 영업시간 제한과 의무휴업 처분이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국회는 지난 2012년 무려 8년 동안 논의한 끝에 유통산업발전법 제12조의 2조항을 새로 마련했다. 지방자치단체는 조례를 정해 대형마트와 SSM(Super SuperMarket)의 영업시간을 자정부터 오전 10시까지의 범위에서 제한하고 매월 이틀을 의무휴업일로 지정할 수 있다.
서울시 구청장들은 모두 관내의 대형마트와 SSM에게 자정 이후 오전 8시까지 심야 영업을 하지 말고 한 달에 두 번 일요일에 쉬도록 처분했다. 대형마트들은 과도한 제한이라며 각 구청을 상대로 취소 소송을 제기했으나 1심을 맡았던 대부분의 법원은 처분이 적법하다고 판결했다. 그 후 대형마트 측에서 항소하지 않아 마무리된 상황이다.
다만 이 사건의 원고인 동대문구와 성동구 관내의 대형마트는 항소했고, 뜻밖에 서울고등법원이 구청의 영업시간 제한은 위법하다며 판결했다. 물론 아직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 남아있다.
여기서 대형마트의 영업시간 제한이 옳다 그르단 판단은 잠깐 미뤄두자. 과정을 보자. 대형마트 측의 손을 들어준 서울고등법원의 논리를 순수하게 살펴보잔 얘기다. 조수진 변호사가 쓴 책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이번 판결의 해석 논리는 이러하다. 유통산업발전법 2조는 대형마트란 '점원의 도움 없이'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점포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마트와 홈플러스, 롯데마트는 매장 한쪽에 점원이 도움을 주는 정육점이 있기 때문에 대형마트가 아니라고 재판부는 보았다. 또 대부분의 매장은 안경점이나 화장품점 같은 임대 업체가 있고 그곳에서도 점원이 늘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결국 대상을 오인해 영업시간 제한 처분을 내렸으므로 위법하다고 본 것이다. - <공평한가?>에서
유통산업발전법 2조3호 관련 별표 '대규모점포의 종류' |
대형마트: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용역의 제공장소를 제외한 매장면적의 합계가 3천제곱미터 이상인 점포의 집단으로서 식품‧가전 및 생활용품을 중심으로 점원의 도움 없이 소비자에게 소매하는 점포의 집단
백화점: 용역의 제공장소를 제외한 매장면적의 합계가 3천제곱미터 이상인 점포의 집단으로서 다양한 상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현대적 판매시설과 소비자 편익시설이 설치된 점포로서 직영의 비율이 30퍼센트 이상인 점포의 집단 [신설 201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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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긍이 가는가? 이 대목을 읽다가 실소가 터졌다. 이마트와 홈플러스가 대형마트가 아니라니.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대형마트란 말인가. 책에 따르면, 대형마트를 정의하는 데 점원의 도움 유무가 들어간 이유는 점원이 주도적으로 도움을 주는 백화점과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대형마트를 법규정상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법원의 판결대로라면, 대형마트가 점원 몇 명만 배치하면 의무휴업과 영업시간 제한을 빠져나갈 수 있게 된다. 8년 간 국회에서 논의되어 입법된 법조항을 무력화시키는 판결이다. 민주적 정당성을 가진 국회가 긴 시간의 숙고 끝에 만든 제도를 법원은 너무나 쉽게 뒤집어버렸다.
'판결비평'이란 소제목에 쫄지 않아도 된다이와 같이 책에 실린 판결들은 우리가 응당 기억해야 할 사건들이다.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는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닐뿐더러 노조법상 노동자도 아니라는 판결, 옥외 집회 사전신고제는 합헌이라는 결정, 이해관 전 KT새노조 위원장의 신고는 공익신고가 맞지만 국민권익위원회의 신고자 보호조치 결정은 취소한다는 판결 등.
쉽게 쓰였다. '판결비평'이란 거창한 소제목에 쫄지 않아도 된다. 친절하고 상세하니까 말이다. 우선 판결 당시 사회적 성격과 파장을 풀이하고, 판결을 상세히 비평한다. 대상이 된 사건에 대한 설명, 재판의 구체적 과정, 문제가 된 법리, 판결의 문제점을 되짚는다. 이어 판결이 상급심까지 간 경우, 그 결과까지 덧붙였다. 각 사건은 법학 교수, 변호사, 언론인 등 전문가들이 맡아 작성했다.
그렇게 책은 꼬인 판결들을 돌아 나와 제목을 통해 독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묻는다. 공평한가? 읽은 난, 슬프지만 마땅히 답하리라. 아니오, 이건 결코 공평하지 않습니다.
덧붙이는 글 | <공평한가?>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지음 / 북콤마 펴냄 / 2015.02 / 2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