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잘못에 대한 충분한 반성을 이야기할 때마다 항상 언급되는 나라는 독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에 대한 반성이 전쟁 보상금, 역사 교육, 정책 등을 통해 지속해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직접 저지른 일이 아님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행해지는 독일 정치인들의 반성도 한몫을 하였다.
유대인 박물관, 유대인 추모공원을 짓고 추모작품 등을 거리에 설치한 것도 독일 사회의 반성 중 하나였다. 수많은 사람을 죽였고, 그 잘못을 반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장소들은 이제는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방문하는 관광지가 되었다.
아무런 설명도 표시도 없는 2711개의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베를린 도심 한가운데 놓여 있다. 이 장소는 브란덴부르크 문, 국회의사당, 프리드리히 거리 그리고 포츠다머 광장 등의 주요 관광명소로부터 걸어서 10분 내외에 있는 천혜의 장소다. 일반적으로 홀로코스트 기념비라고 알려졌지만, 좀 더 풀어서 설명된 정식 명칭은 '살해당한 유럽의 유대인들을 위한 기념비(Denkmals für die ermordeten Juden Europas)'이다.
이 기념비는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이라는 뉴욕의 건축가가 설계한 작품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현 기념비의 초안을 제안한 2차 베를린 유대인 기념비 국제 현상 설계 공모전에서 그는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라는 미국의 조각가와 한 팀을 이루어 참가했다.
가로세로 규격은 같지만 모두 다른 높이를 지닌 콘크리트 블록이 크고 작은 인공 언덕으로 만들어진 지형에 거대한 공동묘지처럼 자리 잡고 있다. 만들어진 당시에도 그랬고, 현재도 여전히 충격적인 모습이다.
기념비는 2005년에 완공되었다. 완공된 기념비에 수많은 국내외 비판이 쏟아졌다. 기념비의 충격적인 형태 때문만이 아니었다. 여러 비판 중 하나는 너무 늦게 기념비를 지었다는 지적도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무려 60년 뒤에 지어진 기념비다 보니 그럴 만도 했다.
1988년 베를린에 유대인 기념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처음 공론화되었다. 역사학자 에버하르트 예켈(Eberhard Jäckel)과 저널리스트 레아 로쉬(Lea Rosh)가 이스라엘의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방문하고 나서부터였다. 그들은 2차 세계대전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찾았고,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은 프로그램 촬영지 중 한 곳이었다.
에버하르트 예켈은 박물관 내에 마련된, 유대인을 구해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거리를 걸으며, 전범국인 독일에는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유대인을 추모하는 기념비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레아 로쉬에게 제안하고, 그 아이디어를 함께 실행하자고 약속한다.
아이디어는 나왔지만 쉽지 않은 길이었다. 우선 후원회를 조성했다. 다양한 아이디어와 후원을 받기 위함이었다. 1994년 첫 공모전을 개최한다. 하지만 당선작은 당시 총리였던 헬무트 콜(Helmut Kohl)의 반려로 빛을 볼 수 없었다. 심지어 기념비를 만들자는 아이디어조차 그대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전쟁 후 60년 만에 만들어진 '홀로코스트' 기념비
당시 연방의회 의장인 리타 쥐스무스(Rita Süssmuth)와 녹색당의 폴커 벡(Volker Beck)이 의회에서 기념비 조성을 위한 토론을 주도하며, 아이디어를 살려냈다. 여론과 정치권의 지원을 바탕으로 다시 두 번째 공모전을 주최하게 되었다. 1997년 7월 528개의 작품 중 피터 아이젠만과 리처드 세라의 작품이 당선돼 2차 공모전이 마무리된다.
디자인은 준비되었지만, 그 기념비를 만들 돈이 부족했다. 공사를 위해서는 후원회로 모은 돈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번 공모전의 당선작은 헬무트 콜 총리가 굉장히 선호하는 작품이었고, 정치권에서는 1999년 수도 이전에 맞춰 기념비를 완공하자는 목소리도 나왔다. 기념비 사업은 무리가 없이 진행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쉽지 않은 길이었다. 지난번 반대자였던 총리는 찬성이었지만, 이번엔 독일의 여론과 지성인들의 반대가 있었다. 주된 비판 대상은 기념비에 유대인 희생자들의 이름과 학살 장소 등이 기록되지 않은 문제 때문이었다. 아무런 기록이 없는 추상적인 콘크리트 덩어리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과거의 증인도 되지 못하고, 미래를 위한 신호도 되지 못한 작품이라는 비판 등 부정적인 비평이 끝이 없었다. 당시 베를린의 시장이었던 에버하르트 디프겐(Eberhard Diepgen)은 그 어떤 작품도 (홀로코스트의) 참혹함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것이 없다며, 기념비 공모전 결과 자체를 비판했다. 또한 얼마 전 타계한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Günter Grass) 역시 기념비 사업은 중단되어야만 한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리처드 세라가 프로젝트 참여를 중단한다고 선언한다. 정부와 후원회의 사업 회의를 통해 나온 결론을 바탕으로 기념비 디자인을 많이 변경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하에 박물관을 조성하기 위해 콘크리트 블록의 많은 부분이 제거되었다. 티어가르텐을 향하는 방향에 나무를 심자는 헬무트 콜 총리의 의견 등도 수용해야 했다. 현실과 맞부딪힌 기념비 디자인은 많은 부분이 바뀌게 되었고, 이 변화를 감당할 수 없던 리처드 세라는 프로젝트에서 빠지게 된 것이었다. 디자인의 변화를 수용할 수 있던 피터 아이젠만은 기념비 설계자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리처드 세라가 빠지는 상황에서 피터 아이젠만은 "(이 사건은) 찻잔 속의 태풍과 같은 것이다. 50년이면 이 기념비를 어떤 예술가와 건축가가 설계했는지는 그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이 작품은 리처드 세라의 작품도 나의 작품도 아니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였다.(<뉴욕 타임즈> 에드먼드 앤드후스, 1998년 6월 4일 기사 참조)
1999년 국회에서 다수의 동의를 바탕으로 기념비 건설 허가가 났다. 당시 돈으로 5400만 마르크의 예산이 책정되었다. 현재 돈으로 약 3500만 유로(약 400억 원)에 달하는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공사 중에도 난관이 적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기념비 공사의 가장 중요한 콘크리트 블록을 제작하는 업체가 나치와 관련된 기업으로 밝혀져 공사가 전면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것은 일어난 일이다 그러므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살해당한 유대인을 추모하는 첫 기념비는 수많은 논란과 사연을 지닌 채, 전쟁이 끝난 후 60년이 지난 2005년이 돼서야 최종 개장을 할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인 2001년에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Daniel Libeskind)가 설계한, 독특한 형태로 유명한 베를린의 유대인 박물관도 완공되었다.
독일 도시뿐만 아니라 유대인 학살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세계 여러 도시에 유대인 박물관이 새롭게 건립되었고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지난 지금도 새로 건립되고 있다. 그리고 베를린에 세워진 두 유대인 추모시설들은 베를린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다.
전 국민이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 채 바라만 볼 수밖에 없던 세월호 참사가 1주기를 맞이했다. 참혹한 현실을 인정하고, 누군가 진정한 사죄를 할 때까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은 당연히 있어야 했을 '살해당한 유럽의 유대인들을 위한 추모비'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수십 년이 흐를 때까지 그 누구도 그 필요성을 실감하지 못했고, 그것을 지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큰 논란이던 것처럼 말이다.
4월 23일 독일 대통령 요하임 가우크(Joachim Gauck)는 베를린 대성당에서 열린 1차 세계대전 100주년 추모행사에서 아르메니아 민족 집단 학살(Völkermord)에 대한 정확한 언급을 하며, 독일 역시 공동의 책임을 지고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이 언급을 통해 100년 만에 독일 정부가 처음으로 민족 학살을 인정하게 되었다. 터키계 독일인과 터키인이 많이 사는 독일이 오스만 제국의 집단 학살을 인정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결정이었음은 분명하다.
기념비 사업에서 돌연 하차한 리처드 세라는 기념비 디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사람들은 매일같이 바로 앞에 있는 거대한 기념비 때문에, 약 700만가량의 유럽의 유대인들을 살해한 그들의 잘못을 기억하길 원하지 않는다."(<마를러 차이퉁> 나타 웨이겔트, 2009년 11월 1일 기사 참조)우리는 세월호의 아픔과 우리 사회의 잘못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지도 모른다.
기념비 지하에 있는 박물관 전시 시작하는 입구에는 이탈리아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아우슈비츠로 끌려갔지만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Primo Levi)의 문구가 적혀 있다.
"그것은 일어난 일이다. 그러므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 이 점이 우리가 꼭 말해야하는 핵심이다."2차 세계대전 이후 70년이 흘렀고, 1차 세계대전 이후 10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누군가의 억울함은 인정받지 못한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도시 공간에서 추모제를 하고, 다 함께 볼 수 있는 장소에 기념비를 세우면서 함께 기억하려 노력한다면, 적어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지 않을까? 그것은 거대한 인류의 비극인 세계대전을 대할 때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비극인 세월호 참사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덧붙이는 글 | * 베를린 소개서 페이스북 페이지(https://www.facebook.com/Intro2Berlin)에서는 <오마이뉴스>를 통해 미처 다 싣지 못한 최근 베를린 소식과 베를린 사진들을 공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