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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남미 순방이 열흘째로 접어들고 있다. 출국 직후 정부와 일부 언론은 이번 남미 순방에 '국익' 이미지를 덧씌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중소·중견기업 중심의 대규모 경제 사절단이 박 대통령의 '세일즈 외교'를 수행했다는 소식이 비중 있게 보도됐다.

순방을 두고 비판의 목소리가 컸다. 출국 일정이 정해진 상황에서 이뤄진 팽목항 방문과 분향 일정은 '형식적인' 절차로 비쳤다. 그런 비판적인 분위기 속에서 유가족들은 분향소를 폐쇄했고, 박 대통령은 분향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발길을 출국장으로 돌려야 했다.

냉정하게 따지면 이번 순방이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에게 눈길을 돌리는 것보다 더 큰 현실적인 이득을 가져올 수 있다고 본다. 세일즈 외교를 통해 300명이 아니라 3000명이나 3만 명 이상의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실리'를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4억6000만 달러 수출성과? 박수만 칠 수 있을까

중남미 4개국 순방에 나선 박근혜 대통령. 사진은 지난 16일 오후(현지시간) 첫 순방국인 콜롬비아 보고타 엘도라도 국제공항 군항공수송사령부에 도착, 환영인사들의 영접을 받고 있는 모습.
 중남미 4개국 순방에 나선 박근혜 대통령. 사진은 지난 16일 오후(현지시간) 첫 순방국인 콜롬비아 보고타 엘도라도 국제공항 군항공수송사령부에 도착, 환영인사들의 영접을 받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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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였을까. 정부는 박 대통령의 순방 기간에 세일즈 외교를 통한 경제적 성과를 알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청와대 경제수석이 현지에서 브리핑까지 열어 '일대일 비즈니스 상담회'의 성과를 강조했다고 한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23일 현재까지 남미 3개국에서 열린 일대일 비즈니스 상담회를 통해 총 4억6000만 달러에 이르는 수출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박 대통령의 세일즈 외교에 격려의 박수를 보내야 할까. 유감스럽게도 그러기가 쉽지 않다. 박 대통령은 양친을 불행하게 잃은 개인적인 아픔을 갖고 있다. 가족의 비극적인 죽음이 주는 고통을 잘 아는 분이다.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단원고 학생 학부모들이 불운한 자신과 다르다고 볼 가능성은 별로 커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순방에 나섰다. 분노와 슬픔에 빠진 유가족을 달래는 일보다 중한 일이 있겠느냐며 박 대통령이 매정하다고 여긴 이들이 적지 않았다. 박 대통령이, '상중'에 울부짖는 가족을 버리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며 돈 벌러 나간 가장처럼 보였다고 말하면 지나칠까.

최고 권위자의 차가운 '이성'은 그의 권위를 등에 업은 야심만만한 수하들을 '냉혈한'으로 만들기 쉽다. <권위에 대한 복종>으로 널리 알려진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에 따르면, 파괴적인 관료 체계의 유능한 관리자는 사람들을 배치할 때 가장 냉담하고 둔감한 사람을 직접적인 폭력에 투입한다. 지난 18일, 서울 광화문에서 세월호 유가족들과 시민들을 향한 경찰의 과잉 진압이 근본적으로 누구의 뜻에 따른 것인지 말해주는 대목이 아닐까.

박 대통령의 냉정함이 세월호 유가족이나 경찰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밀그램은 권력의 '하수인'들이 나쁜 행위를 할 때 대다수 보통 사람들이 별다른 긴장 없이 악행을 지원하는 활동을 펼친다고 주장한다. 밀그램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평범한 사람들은 실제 잔인한 행위와 멀리 떨어져 있다. 폭력적인 행동을 직접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여기에 합법적인 최고 권위자가 그들의 언행을 정당화해 주면 도덕적인 책임감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있다.

"인간적인 것 중에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

엄마의노란손수건, 차일드세이브 등 엄마들이 중심이 된 단체 회원들이 지난 18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대한민국 엄마대회'가 열렸다. 이들은 세월호참사의 진실규명과 노후원전 폐쇄 등 안전사회 건설을 위해 노력할 것을 결의했다.
 엄마의노란손수건, 차일드세이브 등 엄마들이 중심이 된 단체 회원들이 지난 18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대한민국 엄마대회'가 열렸다. 이들은 세월호참사의 진실규명과 노후원전 폐쇄 등 안전사회 건설을 위해 노력할 것을 결의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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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세월호 참사 1주기가 지났다. 2014년 11월, 우여곡절 끝에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세월호특별법)'이 만들어졌으나 밝혀진 '진실'은 거의 없다. 오히려 정부와 여당은 유가족들의 목소리를 외면하면서 진상 규명 요구에 딴지를 거는 듯한 행보를 보여왔다.

사정이 이런데도 세월호 이야기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평범한 이들이 많다. '질서 유지'를 강조하며 공권력을 필요 이상으로 행사하는 경찰을 지지하고, "산 사람은 살자"라는 '현실주의'를 내세워 세월호 참사 피로감을 이야기한다. 유가족들에게 "지겹지도 않냐"라고 냉소하면서 말이다.

유태계 이탈리아 화학자이자 작가였던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1987)는 1943년 파시스트 민병대에 체포돼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가 극적으로 구출된 뒤 말년에 스스로 목을 매 숨진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이었다. 레비는 "괴물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위협이 되기에는 그들의 수가 너무 적다, 가장 위험한 것은 보통사람들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레비의 통찰 넘치는 말을 단순한 '비유'로 봐서는 안 될 것 같다. 평범한 사람들이 별다른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악'의 편에 서는 일은 드물지 않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아픔에 둔감하고, 애통해하는 그들을 조롱하는 '위험한 괴물'들이 우리 사회에는 너무 많다.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마르크스는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경구는?"이라는 질문에 "인간적인 것 중에서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세월호 참사를 '남'의 이야기로 치부하는 무심한 이들이 새겨보아야 하는 말이 아닐까. 지난 4월 16일 프리랜서 삽화가 석정현 씨가 공개해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한 동영상의 제목처럼, 세월호의 비극은 우리 모두에게 "보편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차갑게 보이는 박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에게도 말해주고 싶은 게 있다. '권위(權威)'에 관한 것이다. 사전에서 '權'(권)은 '저울, 저울 추', '威'(위)는 '두려워하다, 으르다'로 풀이된다. '威'(위)는 '여자'라는 뜻의 '女(녀)'와 '큰 도끼'를 뜻하는 '戉(월)'로 짜여 있다. 여기서 '女'(녀)는 며느리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던 '시어머니'를, '戉'(월)은 고대 사회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도구이자 위엄의 상징물이었다고 한다.

집권 후 지난 2년 2개월여 동안 박 대통령이 '저울'처럼 우리 사회의 균형과 평형을 유지하는 일에 매진했다고 보는가. 사람 목숨을 좌우하는 엄중한 자리의 위상에 걸맞게 공동체의 중심이 되기 위해 대통령직을 합리적으로 수행해왔다고 보는가. 대통령이 진정한 권위를 얻지 못하고 조롱 받는 현실은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태그:#박근혜 대통령, #세월호 참사, #권위, #평범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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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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