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해가 뜨기 전이다. 새벽 공기가 쌀쌀하다. 머리에서부터 긴 숄을 걸친 사람들이 간디 아쉬람 앞으로 모여 들었다. 어젯밤 기도회에서 보았던 낯익은 얼굴들이다. 눈인사를 하며 그들 틈에 끼어들었다. 모두들 한 곳을 응시한다. 마하트마 간디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던 바로 이 자리에서 그 감흥을 느끼기 위해 이들은 인도 각지에서 오랜 시간을 달려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 히말라야 난다데비 설산 오른쪽에서 아침 해가 붉게 떠오르기 시작한다. 아침 해의 기운을 끌어 모으기라도 하듯 사람들이 두 손 모아 합장을 한다. 인도 사람들 중에는 저 신성한 난다데비를 바라보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기다림의 시간은 길었지만 해가 떠오르는 것은 한 순간이다. 지는 해 또한 마찬가지다. 해가 뜨고 지듯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한순간이다. 살면서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한순간에 불과한 그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평생을 바치기도 한다.
하지만 저 만년설, 난다데비의 시간은 멈춰져 있다. 신의 존재처럼 영원불멸하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이 난다데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난다데비가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신의 존재가 그럴 것이다. 신은 늘 그 자리에 있다. 신이 내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신을 찾아 나설 때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신을 찾는 사람이 신을 만날 수 있듯이 난다데비를 찾아 온 사람들에게 난다데비가 아침 햇살과 함께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도인들이 성스러운 신으로 여기는 난다데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의 존재, 그 이상이다. 히말라야 만년설 난다데비는 인도 사람들의 젖줄이다. 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물리듯 모든 것을 내주고 있다. 자식을 넉넉한 품에 안고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사랑처럼 뭇 생명들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주고 있다. 난다데비에서 흘러나온 생명수는 시내가 되고 강물이 되어 비옥한 옥토를 일궈낸다. 풍성한 곡식과 열매를 맺게 해준다. 그래서 기쁨의 신이고 복을 가져다주는 지복의 신이 바로 난다데비인 것이다.
인도 사람들은 난다데비 산 주변에는 엄청난 에너지 샥티(힘)가 있다고 믿고 있다. 보통 힘이 아니라 위대하고 거대한 힘 즉, '마하 샥티'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난다데비가 위대한 힘을 지닌 것은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을 살리고 키우는 생명수,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사람들 역시 오래 전부터 생명수의 원천이며 또한 죽어서 돌아갈 곳인 산을 무엇보다 신성시 여겨왔다. 생사의 안식처인 산, 인간에게 이처럼 위대한 신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어느 철학자의 말대로 벌레 한 마리 만들어내지 못하는 인간들은 수많은 신들을 만들어 낸다. 그 수많은 신화 속의 신들에게도 품격이 있다. 품격이 높을수록 위대한 힘을 발휘한다. 산 또한 다양한 품격을 지니고 있다. 산은 크고 넓을수록 많은 생명을 품에 안을 수 있다.
눈앞에 펼쳐진 저 만년설, 난다데비와 같은 대자연이 내주는 위대한 힘을 믿지 못하면서 수많은 신들을 믿고 있다. 그게 인간이다. 인간들이 대자연을 훼손시키는 것은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믿는 신을 모신 신전을 파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200원짜리 길거리 짜이 마시며 시작하는 하루
아침 해가 훤하게 밝아 올 무렵 아쉬람에서 일하는 사람이 난데데비 일출을 보러 나온 사람들에게 따끈한 짜이를 한 잔씩 돌린다. 식사는 물론이고 짜이 역시 돈을 받지 않는다. 암리차르의 시크교도들이 자신들의 성지인 황금사원의 방문객들에게 아낌없이 베풀고 있듯이 이곳 간디 아쉬람 역시 모든 것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다만 아쉬람을 나설 때 자신이 원하는 만큼 성의껏 기부금을 내면 된다.
아쉬람 손님 중에서 유일한 외국인인 내게 젊은 인도청년 둘이 다가와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한다. 그들이 숙소로 떠나자 아쉬람 근처에는 인디언 할머니 한 분이 남아 있다. 여전히 만년설 난데다비를 응시하며 명상에 잠겨 있다. 할머니가 두르고 있는 다양한 문양이 새겨진 밤색 숄과 아침 햇살, 그리고 난데다비의 아름다운 자태가 하나로 다가온다. 평화로운 얼굴로 명상에 잠겨 있는 사람을 보면 저절로 평화가 스며든다. 명상에 잠겨 있는 할머니를 지켜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대자연의 위대함을 믿고 의지하며 지켜 나가는 것은 신을 믿고 따르는 것이며 또한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이며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평화를 선사하는 것이다.'짜이를 마시고 방으로 들어왔다. 옆방에 묵고 있는 가텀씨의 기침은 어젯밤보다 더 심해졌다. 얇은 벽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헤이 송! 아침 식사는 했소." "아침 식사를 하지 않고 간단하게 과일을 먹습니다.""아침 명상 마치고 1시간 후에 봅시다."매일 아침마다 한두 시간 정도 명상을 한다는 그는 나처럼 아침식사를 따로 하지 않는다. 바나나 두 개로 간단하게 배를 채우고 가텀씨와 함께 아쉬람을 빠져나왔다.
"내가 잘 아는 좋은 찻집이 있는데 함께 갑시다.""아침에 짜이 한 잔 마셨는데요.""그래도 갑시다. 당신도 그 찻집을 좋아할 겁니다."
근사한 찻집이라도 가는 줄 알았는데 그가 안내한 곳은 작고 허름한 길거리 찻집이었다. 겨우 비 가림만 해 놓은 찻집은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포장마차나 다름없다. 입가에 웃음이 붙어 있는 젊은 찻집 주인은 이제 막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가텀씨가 짜이 두 잔을 주문하자 움막 옆에 마련해놓은 화덕에 장작개비를 넣고 불을 지펴 즉석에서 차를 끊여 내온다. 짜이에서 달콤한 연기 냄새가 난다.
이른 아침부터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저녁까지 짜이와 샌드위치 혹은 짜파티를 구워 팔고 있다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찻집 주인은 총각이 아니었다. 결혼하여 어린 두 남매가 있다고 한다. 가텀씨와 나는 간디 아쉬람에 머물면서 거의 매일 아침 이 찻집에서 짜이를 마셨다. 10루피, 우리 돈으로 200원짜리 짜이를 정성껏 끓여 올리며 무엇이 그리 행복한지 그는 늘 웃고 있었다. 우리는 잔돈이 없을 때 이 찻집에서 가끔 외상으로 음식을 사 먹기도 했다.
짜이를 마시고 나서 우리는 언덕 아래의 코사니 상가로 나섰다. 가텀씨는 상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오랜 친구처럼 인사를 주고받는다. 그리고는 한국에서 온 수행자라며 나를 소개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수행자가 아니라 그냥 여행자라고 말해 줬지만 그는 예의 그 익살스런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키득 키득... 여기 사람들은 수행자라고 하면 좋아합니다."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 겁니까?""당신 모습이 수행자인데... 왜 그게 거짓말이란 말이오.""겉모습만 그럴 뿐이지요."그는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 때부터 1~2년에 한 차례씩 이곳 코사니에서 1~2개월씩 머물다 가곤 했다고 한다. 30년 세월을 오고가면서 어지간한 코사니 역사를 꿰고 있었다. 처음 자신이 이곳 코사니에 왔을 때는 몇몇 상가를 제외한 마을 주변이 지금보다 더 울창한 숲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언덕 위에 호텔들이 많이 들어서 있는데 거기가 다 숲이었지요. 밤이 되면 멀리서 호랑이 소리가 들려왔고, 레퍼드가 마을까지 내려와 개를 물어가곤 했습니다. 지금도 마을 근처 숲에 레퍼드가 있습니다.""레퍼드요?""레퍼드 몰라요? 당신 모바일에 있는 번역기를 이용해 봐요."그가 한 자 한 자 불러준 알파벳을 번역기에 찍어보니 '레퍼드(
leopard)'는 표범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인도에 오기 전 큰 아들 녀석이 손전화기에 깔아준 번역기를 이용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코사니 상가를 둘러보다가 한 상가 건물의 낡은 벽면에 그려진 그림 한 폭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한 여성이 도끼를 들고 있는 남자를 붙잡고 다른 한 여성이 나무를 껴안고 있는 그림이었다. 나무, 숲을 지키는 환경에 관련된 그림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코사니의 숲 살린 '나무 껴안기 운동'... 벌목 저지시켜
"이 작은 마을에도 환경운동단체가 있는 모양이네요." "아마 그럴 겁니다. 거기에 관해 잘 아는 선생을 오후에 만나기로 했어요. 그에게 물어 봐요."나는 그로부터 또 다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코사니에 락시미 아쉬람이라는 여성들만이 다니는 학교가 있는데 오후에 만나게 될 사람이 바로 그 학교의 유일한 남자 선생님이라는 것이었다.
오후에 우리는 5루피(100원)짜리 야채 튀김을 팔고 있는 구멍가게 앞에서 턱수염이 멋진 부럼이라는 락시미 아쉬람의 선생을 만났다. 나는 그를 만나자 마자 상가 벽에 그려진 나무를 지키는 그림에 얽힌 얘기와 코사니의 환경 운동에 관해 물었다. 그는 코사니의 환경운동은 여성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그의 말을 대충 정리해 보면 이랬다.
"1970년대 숲을 지키고자 하는 여성들의 '칩코 운동'이 이곳 락시미 아쉬람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뤄졌고, 그 덕분에 코사니의 숲을 살릴 수 있었지요."하지만 그때까지 해도 나에게 '칩코 운동'은 낯설기만 했다. 나중에 인터넷 검색 등을 통해 칩코 운동에 관한 다양한 자료를 접할 수 있었다. 칩코 운동(Chipco Andolan)은 힌두어로 '칩코 안돌란' 이라고 한다. 힌두어로 '껴안기'라는 의미의 '칩코'와 '운동'을 의미하는 '안돌란'의 합성어라고 한다.
1973년 갠지스 평야 지방에 위치한 목재 회사가 호도나무와 물푸레나무를 벌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여성들이 벌목대상으로 표시된 나무들을 감싸 안았다. "나무를 베려면 나의 등에 도끼질을 하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여 벌목을 저지시킨 운동이다. 인도의 대표적인 환경운동이자 여성운동이라 할 수 있는 이 칩코 운동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의 친환경, 산림보호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인도의 칩코 운동 당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나무꾼들이여 내 말 좀 들어 보소도끼질 당하지 않은 푸르고 아름다운 나무와 숲의 이야기를 들어 보소가지를 잘라 나무가 흉한 모습으로 변하게 만들지 마시오나뭇잎들을 죽여 없애지 마시오나무꾼들이여 숲은 우리에게 물이요 식량이요 또한 생명이라오." 나뭇잎은 우유를 내주는 소를 먹이고 나뭇가지는 땔감으로 요긴하게 쓰이는 나무, 이들에게 울창한 숲은 신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들에게 숲은 코사니 언덕 앞에 훤히 펼쳐져 있는 생명의 젖줄 히말라야 난다데비나 다름없을 것이다. 이들이 숲을 지키는 것은 신전을 지키는 것이고 또한 자신을 지키는 것이었을 게다.
부럼 선생의 말에 의하면 1970년대 인도의 칩코 운동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이곳 코사니의 락시미 아쉬람을 창립한 사라 벤(1901~1982년)이라는 여성과 락시미 아쉬람에서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라는 것이었다. 인도의 농촌여성들을 위한 여성운동가이자 환경운동가인 사라 벤은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독립운동을 도왔던 영국여성이었다.
락시미 아쉬람의 홈페이지 자료에 의하면 그녀는 1932년 31세의 나이에 영국 리버풀에서 배를 타고 간디의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인도에 왔다. 영국의 식민 통치에 대한 자유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두 차례에 걸쳐 투옥되기도 했다.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운동과 칩코 운동은 닮아있다. 인도에서 벌목 저지 운동, 칩코 운동이 성공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비폭력 시위에 있었다. 칩코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사라 벤'은 물론이고 '순데랄 바후구나' 역시 간디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이었다. 특히 '순데랄 바후구나'는 음악연주가들, 노래하는 가수들과 함께 수천 킬로미터를 걸어 히말라야 산간 마을을 돌며 칩코 운동을 이끌어 온 지도자였다.
다음날 나는 부럼 선생의 안내로 1945년 교육환경이 열악한 인도 농촌여성들을 위해 사라 벤이 세웠다는 락시미 아쉬람을 방문하기로 했다.
덧붙이는 글 | 락시미 아쉬람 홈페이지를 참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