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조건은 근로자와 사용자가 동등한 지위에서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하여야 한다.- 근로기준법 제4조"우리는 노동자입니다. 빨갱이가 아니에요."어느 민주노총 조합원의 얘기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민주노총 조합원이라 설명하면 빨갱이라 지탄받는 게 우리네 현실이다. 노조라는 단어 하나에 무논리가 성행한다. 대다수가 노동자인데도 노조의 단점이 더 부각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현실을 이겨낸다는 것 자체가 도전처럼 느껴진다.
광운대 청소노동자들의 행보도 역시나 도전의 연속이다. 노조가 만들어지면서 빨갱이란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었고, 주변의 불온한 시선과도 마주해야 했다. 광운대 안에서, 특히나 민주노조 조합원들은 악마처럼 그려진다. 그럼에도 조합원들은 열심히 노조활동을 한다.
광운대 청소노동자들, 서울여대에 가다5월 1일 노동절 전날에도,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경인지역공공서비스지부 광운대분회(서경지부 광운대분회) 조합원들은 안전교육 후 곧바로 퇴근하지 않고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아직도 교섭이 지지부진한 서울여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쟁의 현장에 연대를 가야 하기 때문이다.
광운대는 다행히도 단체·임금협약에 잠정합의가 이뤄진 상태다. 지난 총회 때 일었던 파업의 기운이 사라진 이유다. 그러나 첫 교섭부터 잠정합의까지 6개월이나 걸렸다. 이런 지난한 협상이 내년에도 또 이뤄질 거란 점에서 단체교섭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 같다.
청소노동자들을 따라 석계역 1번 출구 정류장으로 향했다. 오후의 햇빛은 눈부셨고, 따가웠다. 나는 연신 "덥다"를 반복했다. 도중에 탄 버스 안도 찜통이었다. 중천에 뜬 해님이 이솝우화의 이야기처럼 내가 겉옷을 벗나 안 벗나 인내심 테스트를 하는 것 같은 하루였다. 그사이 하교하는 꼬마 친구들이 생긋생긋한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내 주변을 맴돈다.
정류장에서 1155번 버스를 탔다. 청소노동자들이 순간 버스를 점령했다. 앉자마자 이야기꽃을 피웠다. 화제는 단연 순환근무였다. 청소노동자들은 단체협약상 내일 노동절부터 각 건물마다 6개월씩 순환근무에 들어간다. 이를테면 중앙도서관 1층을 청소했던 노동자는 2층으로 옮기는 형태다. 요즘 이 문제가 청소노동자들의 '핫이슈'다.
사실은 연대집회로 서울여대에 간다는 소식에 살짝 설렜다. 공대를 다녔던 나로서는 여대에 대한 환상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되돌아보면, 정말 한심한 생각이었다. 서울여대 소식을 듣기 전까지, 그 심각성을 모른 채 나 혼자만 들떠 있던 것이다. 불현듯 부끄럽고 미안한 감정들이 뒤섞여 밀려왔다. 이런 나에게 내 두 번째 사수였던 변선영씨가 서울여대의 현재 상황과 더불어 연대의 의미까지 설명해줬다.
"물론 저도 힘들죠. 새벽 댓바람부터 나와서 청소하고 이렇게 연대하러 가는 건 만만치 않아요. 자비로 집회 장소에 가야하고, 또한 시간도 빼앗기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연대하러 가는 건 그분들의 현재 상황이 언젠가는 나에게도 닥칠 것이란 역지사지의 마음 때문입니다. 저희가 재작년에 노동쟁의를 했을 때, 서울여대 언니들이 와준 게 얼마니 힘이 되고 용기가 생기던지.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었죠. 개개인이 각자도생하는 게 아니라 하나로 힘을 합칠 때, 우리 노동자들은 정말 무시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지요. 연대가 노동자의 삶을 지켜줍니다."
때마침 '서울여대·육군사관학교 행정안내소' 정류장에 다다랐다. 조합원들과 내가 버스에서 내렸다. 서울여대 정문으로 들어갔다. 무슨 행사가 있는지 정문 주변은 복잡했다. 여대생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분위기는 화사했다. 꽃은 만개했다. 그 사이를 민들레 홀씨들이 살랑이는 바람에 춤을 췄다. 캠퍼스 안은 낭만으로 샘솟았다. 봄의 자태를 만끽하는 학생들은 웃음꽃이 가득했다. 4월의 끝자락을 온전히 담아내려고 사진을 찍는 학생들도 보였다. 모든 게 생기발랄했고, 평화로웠다.
하지만 길을 걸을 때는 기분이 이상했다. 길가 주변은 성황당처럼 천 조각이 나무에 묶여 있었다. 그곳을 따라가면 뭔가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예측은 맞아 떨어졌다. 다른 공간들과 부조화를 이루는 곳이 쉽게 눈에 띄었다. 바로 서울여대 행정관(본관)이다. 이곳만큼은 이 세상과 괴리된 듯한 느낌으로 가득했다. 이 주변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학생들 대신 두 명의 경찰이 서있는 게 보였다. 본관은 알게 모르게 고립됐다.
단지 참관한 것뿐인데, 나는 왜 떨렸을까"서울여대는 미화원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인간답게 대우하라.""뼈 빠지게 일했는데, 임금삭감 웬 말이냐! 생활임금 보장하라!""서울여대, 타 대학과 동일임금 보장하라."서울여대가 포함된 서경지부는 작년 11월부터 2015년 임금과 노동조건을 결정하기 위해 용역회사들과 무단히 교섭을 진행했다. 다른 대학 사업장은 이미 임금협약 등을 잠정합의한 상태다. 하지만 서울여대만 합의점이 도출되지 않았다. 노동쟁의 조정신청도 결렬됐다. 이 때문에 서울여대분회는 지난 22일부터 합법적인 쟁의행위에 돌입했다. 더군다나 두 명의 청소노동자는 단식농성 이틀째였다.
이미 오후 3시부터 학교 본관 앞에서 파업 결의대회가 진행됐다. 퇴근 후에 곧바로 달려온 것임에도, 나와 광운대 청소노동자들은 집회에 늦게 도착했다. 그래도 서울여대분회 조합원들은 광운대분회 조합원들의 참여에 무척이나 고마워했다. 행정관 1층 로비부터 복도까지 민주노총 조합원들로 빽빽했다. 앉을 자리가 부족할 정도였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여기 있는 모두가 서울여대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
본관 주변에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이 어슬렁거렸다. 그 사람은 본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우리를 저만치 서서 바라본다. 국민TV 기자들은 서울여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쟁의 현장을 촬영했다. 이 촬영분은 이날 뉴스K에서 "서울여대 '갑질'…일방적 임금삭감에 청소노동자 단식돌입"이란 제목으로 보도됐다. 최승현 노동당 부대표도 본관 정문 주변에서 노동자들과 함께했다.
본관을 지나는 두 여학생은 결의대회가 열리는 정문을 한 번 훑었지만, 이런 거에는 무관심하다는 듯 그냥 지나간다. 자신들과 상관없는 현장이란 생각했을 것이다. 특히나 재학생들은 이 쟁의행위에 참여했다가 취업에 불이익이 발생할까봐 회피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노조 없는 삼성에 가려면 이런 집회에 참여하는 것조차 곤란해진다. 이런 현실이 학생들 사이에서 점점 정답으로 굳어져간다. 취업하기 어려운 요즘, 대학생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자신의 현실로 다가올 수도 있는 문제를 끝끝내 외면하는 것에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갖는 학생들도 분명히 있다.
집회 도중, 갑자기 떨렸다. 여대생들 때문이 아니다. 심장은 쿵쾅쿵쾅 요동쳤다. 얼굴은 홍조로 변했고, 귀는 새빨개졌다. 머리는 벼락을 맞은 듯,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누군가 어디서 채증은 하지 않을까. 경찰에 끌려가지는 않을까. 요주의 인물로 떠오르지는 않을까. 별의 별 생각과 걱정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치 내가 불온해진 듯했다. 단지 참관한 것뿐인데, 왜 그럴까.
뭔가 나도 모르게 이 집회에 불안을 느꼈다. 그 증세는 더욱더 강렬해졌다. 내가 뭐라도 된 것마냥 그 순간만큼은 혼돈 그 자체였다. 과대망상의 결과다. 벌써 드라마 '쪽대본' 나오듯 시나리오는 이미 완성됐다. 방송이나 신문에서 자주 봤듯이 강제로 끌려가는 모습들이다. 민주화된 사회에서 이런 생각이 들다니. 아직도 노동쟁의를 불온시하는 세태를 무시하지 못하는 것 같다.
단식농성 중이던 두 명의 청소노동자가 로비 중앙에 나와 발언을 했다. 각 대학 사업장 분회장들도 격려사를 보냈다. 노동자들은 그동안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왔다는 울분을 토해냈다. 이곳이 곧 살아있는 노동교육 현장이었다. 노동자가 한 명씩 한 명씩 이야기할 때마다 마이크의 울림이 서울여대 곳곳에 퍼졌다. 저 멀리서 관심 없던 학생들도 듣고 있을 것이다. 학생들도 이제 노동자들의 현실을 제대로 알게 됐을까.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마지막으로 이삼옥 서울여대 분회장이 농성 현장에 나와 발언을 이어갔다. 이 분회장은 얼마 전, 농성 중 과로와 스트레스 때문에 구안와사로 쓰러졌었다. 아직 완치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지금 우리 앞에 서있다. 이 분회장의 마지막 발언은 상투적이지만 울림이 컸다.
"우리 함께 연대해야 합니다."노동자가 사용자와 동등한 지위에서 자유로이 협상하려면 노동자들은 단결해야 한다. <공산당 선언>에서 칼 마르크스도 말하지 않았던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지금은 너무나 상투적인 언어가 됐지만, 여전히 현재 상황에서만큼은 유효한 글귀다.
여기 서울여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해 힘겹게 싸워나가고 있다. 하지만 사용자의 묵묵부답 속에 속절없이 시간만 흘러간다. 일주일이 넘는 투쟁 기간 동안 노동자들의 눈물과 땀이 뒤섞여 흐르는 이유다. 이 모든 걸 꿋꿋이 견디는 것도 사실은 당장 내 옆에 있는 든든한 동지들이 있기 때문이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왠지 모를 불안은 주변의 끊임없는 관심과 연대로 불식되고 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지만, 여기서는 통하지 않는 이야기다.
나는 파업 결의대회에 참여했지만, 아직도 뭔가 무섭고 두렵다. 지레짐작 겁먹고 내 스스로 쓸데없이 자기검열을 해서일까. 이유 모를 불안과 동시에 햄릿만큼의 고민 또한 시작됐다. 지금의 부당한 노동현실을 보고 행동할 것인가(to be), 방임할 것인가(not to be). 나는 요즘 노동자들이 불러낸 유령의 환각에 시달린다. 그 유령이 나에게 속삭인다.
"노동자의 삶을 부정하는 이 노동현실을 바로잡아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