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눈이 개구리처럼 눈 크게 뜨고 보았다. 그제야 보였다. 경남 진주에서 나고 자라 지금껏 살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같은 자리를 쳇바퀴처럼 의미 없이 돌아다녔다. 잠시 멈춰 고지도 속 진주의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현대의 고층 건물 너머 살아 쉬는 역사가 꿈틀거렸다.
구름만 잔뜩 꼈다. 다행히 오후에 비가 온다니 걷기에는 괜찮은 날씨다. 4월 28일 진주아이쿱생협 회원도 아닌데 군침 도는 문화 강좌가 열려 '곱싸리' 끼어 함께 경남 진주 도심을 걸었다. 문화 강좌는 박미자 진주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우리 지역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고지도 속 진주 찾기'였다. '경상우도 소학교- 대사지 – 진주 진영 – 진주 동헌 – 진주 객사 – 진주 향청 – 진주 교방 – 진주 권번'을 둘러보는 역사 문화 기행이었다. 모이기는 진주교육지원청 앞이었지만, 출발점은 진주초등학교 정문 앞이었다.
교육청에서 불과 3분 이내의 거리에 있는 진주초등학교는 전국 최초의 남녀 공학 학교다. 학교 정문 옆에는 '경상우도 소학교 터'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1895년 조선 시대 고종의 교육입국(敎育立國) 조서(詔書)에 따른 소학교령에 의해 진주성 내 관찰부 회의실을 고쳐 경상우도 소학교(慶尙右道小學校)가 문을 열었다.
학생 10여 명으로 경남 최초의 근대학교로 개교했으나 두 달 만에 휴교에 들어갔다.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휴교에 들어갔던 학교는 1896년 1월 진주공립소학교로 문을 다시 열었다. 1906년 9월 보통학교령에 따라 4년제 공립보통학교로 개칭하고 1909년 여자학급을 설치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남녀공학이다.
1911년 11월 조선교육령에 따라 진주공립보통학교로 변경했고, 1919년 진주 제1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가 1914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었다. 1938년 교명을 다시 진주 제1공립심상소학교, 1941년 진주제일공립초등학교, 1950년 진주중안국민학교, 1996년 3월 진주중안초등학교, 2011년 3월 1일 진주초등학교로 바꾸어 오늘에 이른다.
100년이 넘는 학교에 역사에는 시대의 소용돌이가 교명에 남아 있다. 먼저, '국민학교'라는 명칭부터가 일제 강점기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의 신하된 백성'이라는 '황국신민'에서 따온 말이다. 작은 소방도로를 사이에 두고 일본인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따로 있었다.
이 학교 출신으로는 '위안부 화가' 강덕경 할머니가 있다. 1929년 진주에서 태어나 할머니는 진주초등학교 고등과에 재학 중이던 15살 때(1944년) '일본 공장에 취직하면 돈도 벌고 학비도 공짜'라는 교사의 꾐에 반장과 함께 여자근로정신대에 지원했다. 여자근로정신대 1기로 일본 후키코시 비행장으로 끌려가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두 번이나 도망을 가다 헌병에게 붙잡혀 성폭행 당했다. 이후 위안부로 끌려갔다. 해방되어서도 고향 진주로 돌아오지 못했다. 부산에서 생활하며 위안부라는 사실을 숨긴 채 살아오다 용기를 내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고 일제 만행을 고발했다. 또 일본군 위안부 출신 동료들과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열린 '수요시위'에 참가했다. 할머니는 폐암 말기로 생을 마감하는 1997년 2월 2일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는 30여 점의 그림을 그려 '위안부 화가'라는 별명을 얻었다.
문득 할머니가 그린 <빼앗긴 순정>이 떠올랐다. 그림 속 나무는 우리 민족의 정기와 목숨을 해골만 남도록 잔혹하게 빨아먹고 자란 일본 벚나무다. 화려한 벚꽃나무와 하나된 일본군이 어린 소녀에게 손을 뻗는 잔혹상을 드러내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낮은 목소리>에서 할머니는 "너희들 정신 차려야 한다. 일본은 그냥 물러갈 친구들이 아니야, 또 올 수밖에 없어"라고 경고했다. 이 사무친 경고를 허투루 듣고 사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진주초등학교에서 다시 진주교육지원청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주교육청은 1908년 일본인이 다니던 '진주공립심상소학교' 이었던 배영초등학교 건물을 개축해 들어서 있다.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원형을 알 수 있는 건축물이라 옛 본관 건물은 건축물 문화재로 지정받았다.
이곳은 진주성 대사지(大寺池)였다. 동북아 국제전쟁(임진왜란)의 빛나는 진주대첩이 가능하게 한 진주성 방어 기능을 가진 해자(垓字)였다. 처음부터 진주성 방어를 위한 연못은 아니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766년 신라 혜공왕 때 대사라는 큰 절이 있었는데 동쪽 땅이 점차 꺼져 연못이 생겼다'고 한다.
처음에는 세로가 13척, 가로 7척 (390cm*210cm)의 작은 연못이었는데 잉어 5~6마리가 생겨나더니 몸통이 커지면서 연못도 따라 커졌다고 한다. 이 연못은 일제 강점기 때 진주 읍장인 야마시다가 진주성벽을 허물어 매워 초등학교와 경찰서 등을 세워 흔적은 조선 시대 그림이나 일본 강점기 사진에서만 엿볼 수 있다.
소년 운동의 발상지, 진주
대사지 터를 알리는 표지판 옆에는 '진주는 우리나라 소년 운동의 발상지이다'라는 기념 돌이 나온다. 어린이 운동하면 소파 방정환 선생을 떠올리지만,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의 발상지는 진주다.
소파 방정환이 중심이 돼 1923년 창간한 '어린이' 잡지 창간호에 "글방이나 강습소나 주일학교가 아니라 사회적 화합의 성질을 띤 소년회가 우리 조선에 생기기는 경상남도 진주에서 조직된 진주 소년회가 맨 처음이었습니다"라고 밝혔다. 1923년 5월 1일은 제2회 어린이날이었다. 이날을 맞아 진주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기념행사가 열렸다. 당시 <동아일보>는 '진주를 조선에서 소년운동의 깃발을 맨 처음 든 곳'이라고 소개했다.
1920년 8월 진주에서 조직된 '진주소년회'가 어린이날을 제정하는 데 힘썼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1921년 3월 27일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려다 진주 제2보통학교(현 봉래초등학교) 3학년 재학 중인 강민호(16) 등 8명이 체포돼 실형이 선고 받기도 했다.
한가롭게 플라타너스 아래에서 쪼아 먹는 비둘기를 뒤로하고 옛 진주의료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진주진영 터>다. 조선 시대 진주성은 경상우병영의 근거지였다. 진주성 밖에 있던 진주진영은 경상우도 남부 지역 각 고을의 군 훈련을 감독하는 병영이다.
1894년 병영혁파 이후 1896년에는 인재 양성 기관인 낙육재(樂育齋)가 들어섰다. 1910년 4월 일제에 의해 폐교당한 후 도립실업학교가 세워졌다. 이후 1923년 진주 자혜의원이 설립되었다. 진주자혜의원은 1925년 경상남도립 진주료원으로 개칭되어 1992년까지 이 자리에 있었다. 아쉽게도 진주의료원은 초장동으로 이전한 뒤 2013년 폐쇄되었다.
앞도 보이지 않게 수레 한가득 폐지를 담아 밀어 가는 아주머니 곁을 지나 진주전화국으로 향했다. '찌개'를 '찌게'로 잘못 적은 식당 앞을 지났다. 잘못 적은 '찌게'지만 구수한 된장찌개 생각에 군침이 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곶감'이라는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가 그려진 담벼락도 지났다. 곶감도 먹고 싶다. 노래방 앞에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인간의 몸에 따오기의 머리를 지닌 '토트'가 지나가는 나를 바라본다. 지혜를 상징하기도 하는 토트는 달의 신이기도 하다. 아마도 해가 저물고 달이 뜨면 노래방이 성시를 이루기에 달의 신 '토트'를 문 앞에 내세웠을까 엉뚱한 상상도 했다.
문 닫힌 네일아트 앞에는 작은 안내문이 걸려있다. "가게가 망한 게 아니라 결혼하러 간다"라는 앙증스런 글씨와 함께 "행복하게 살겠습니다"라는 다짐이 적혔다. 건널목 앞에서 오랜만에 공중전화기 부스를 만났다. 휴대전화기 없던 시절이 마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만큼 까마득하다. 전화국 앞 인도 보도블록 한쪽에 우리나라가 원산으로 들이나 밭둑, 길가 어디서나 잘 자라는 '뽀리뱅이'가 노란 꽃을 피웠다. 진주전화국은 옛 진주 관아터다.
<진주관아 터>였던 진주전화국을 지나 평안광장 사거리를 돌아갈 때 밝은 자줏빛 사계패랭이가 환하게 웃는다. 조선 시대 신분이 낮은 양민들이 지푸라기를 엮어 만들어 쓴 패랭이를 닮았다는 꽃이다. 구름 사이로 비춘 햇살에 패랭이 모자가 그립다. 진주 도심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22층 롯데인베스 아파트 한쪽에 모였다. <진주객사 터>와 돌무더기가 아니면 이곳은 그저 도심 속 아파트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객사는 조선 시대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다.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나 사신이 묵으면서 연회도 열렸다. 조선 시대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나 궐패를 모셔두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하는 망궐례 의식을 했다. 객사의 정문에 해당하는 누문은 봉명루(鳳鳴樓)다. '봉황의 울음소리 들리는 누각'이라는 뜻을 가졌다.
남명 조식도 예찬한 촉석루봉황은 성인의 태어날 때 세상에 나타나는 전설 속의 새다. 수컷은 봉(鳳), 암컷은 황(凰)이라고 한다. 봉황은 사이좋게 오동나무에 살면서 대나무 열매를 먹는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봉명루(鳳鳴樓)는 객사(客舍) 남쪽에 있고, 촉석루(矗石樓)는 용두사(龍頭寺) 남쪽 돌 벼랑(石崖) 위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촉석루보다 더 중요한 누각으로 봉명루 앞서 소개한 것이다. 관아보다 더 앞선 지위를 가진 객사는 임금을 대신한 건물이기 때문이다.
남명 조식 선생도 1558년 두류산 유람을 하기 위해 합천 삼가에서 마현(말티고개)을 넘어 진주로 들어왔다. 진주 객사에 머물렀다. 선생은 봉명루에 올라 시 한 수를 남겼다.
"기산 아래 남은 소리 이 누각에 있는데 /어질고 친하며 즐겁고 이롭게 여기는 뜻 아련하구나 / 촉석루 새로 세운 뒤로부터는 / 봉황새 울음소리 강물따라 오르내리는구나!"촉석루 못지않은 명소였던 봉명루와 진주객사는 그저 문헌 속에 갇혔다. 객사 터를 나와 교방 터로 향하는데 아파트 앞에 '계절의 소리'라는 조형물 속 개구리가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은빛 호른 위 초록색 개구리 모습이 귀엽다. 봄 알리는 소리에 겨울잠에서 깨었나 보다.
길라잡이 박미자 문화관광해설사가 길 건너 갤러리아 백화점을 손으로 가리켰다. 눈 뜨고도 보이지 않았다. 개구리처럼 폴짝 뛰어 사거리를 건넜다. 개구리처럼 커다랗게 눈을 뜨자 보였다. 진주 향청 터 표지판이다. 진주 향청은 조선 시대 양반들이 진주 목사의 행정업무를 보좌하던 요즘의 의회와 같은 곳이다. 백화점이 들어서기 전에는 금성초등학교 자리였던 곳이다. 아쉽게도 이제는 백화점이 들어서 있고 길 건너에는 아파트가 흔적을 지웠다.
백화점 주차장 쪽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걸었다. 쥐똥나무와 닮은 광나무 아래 <진주교방 터> 표지판이 서 있다. 북평양, 남진주의 명성처럼 교방 문화가 꽃피운 동네의 자취다. 진주교방 펼쳐졌던 진주검무, 진주포구락무, 진주교방굿거리춤, 진주한량무가 국가와 지방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현재 전승되고 있다. 진주교방은 진주지역 문화 예술의 산실인 셈이다.
차 없는 거리로 걸었다. 파평 윤씨 진주종친회 표지판이 보인다.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파평 윤씨다. 또한, 1932년 상하이에서 일본군 대장 등을 도시락 폭탄으로 죽인 윤봉길 의사도 파평 윤씨다. 표지판 하나에 적힌 글자는 단순히 글자로 남지 않는다. 아는 만큼 의미를 드러내고 드러낸 의미만큼 보이는 모양이다.
우리은행 진주지점 뒤편에 걸음을 멈췄다. 진주 권번 터다. 조선 말기 진주교 방이 폐지되자 진주 관기들이 생업을 위해 기생조합을 결성, 활동했다. 1914년 권번으로 바뀌었다가 1939년 주식회사 형태의 진주예기권번으로 거듭났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쓴 <진주대관>에서는 "기생 100여 명과 견습생 50~60명으로 학부를 설치해 오전, 오후 두 번에 걸쳐 가무, 음곡, 산수, 국어, 예법 등을 가르쳤다"고 했다.
엄격하게 양성한 진주 기생의 전통은 1919년 3월 19일 진주 기생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 만세를 외친 기상에서 엿볼 수 있다. 진주성 2차 전투 때 7만 민관군이 순국한 뒤 왜장을 껴안고 죽은 논개도 진주 관기다. 진주 기생들은 순국한 논개 제사를 지내왔다. 전통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이달에 진주성에서 논개제가 열린다.
진주 권번터를 끝으로 오늘 일정을 마무리했다. 얼마 되지 않는 진주 도심을 2시간 정도 걸었다. 경제개발의 논리 속에 우리의 전통과 문화가 사라진 현장을 둘러본 날이었다.
봄볕 따스한 날, 진주 도심 속을 가족과 함께 걸으며 역사 속에 거닐어보면 어떨까. 어제를 마주한 진주 속 진주를 찾아 나선 길이었다. 외면할 수 없는 우리의 아픈 역사가 배여 있는 진주 도심 속으로 떠나보자.
덧붙이는 글 | 경상남도 인터넷뉴스 <경남이야기>
해찬솔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