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외신에 캄보디아 훈센 총리 이름이 자주 오르내린다. 30년 장기독재와 인권탄압으로 악명 높은 이 나라 총리의 언론 노출이 최근 부쩍 늘어난 이유는 '돌출 발언' 탓이다. 훈센 총리가 그동안 구설에 오르거나 논란을 일으킨 적은 한두 번이 아니지만, 최근 발언들은 그 강도나 수위가 예전에 비해 제법 높다.
대표적인 발언은 최근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재외동포간담회 연설 중에 한 말이다. 다음 총선에서 혹시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탓인지, 훈센 총리는 배석한 삼 랭시 야당 총재 앞에서도 직접적인 경고성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다음 총선에서 자신이 지더라도 정치보복을 하지 말 것을 강력 경고하는 한편,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무력을 사용할 수도 있음을 내비쳤다. 그러나 이날 훈센 총리의 발언은 야당 총재가 크게 문제 삼지 않으면서 더 이상 정치적 갈등으로 확산되지는 않았다.
그는 또한 길고 지루한 연설로도 명성이 자자하다. 지난 2012년 국회 연설에서 무려 5시간 20분이란 긴 시간 동안 연설해 참석자들을 완전히 지치게 만들었다. 아시아 현직 정치인 중 최장 연설 기록이다. 그는 TV 생중계로도 모자라 이날 연설 내용을 CD로 제작해 정부 관료들에게 배포하도록 지시해 국민들을 아연실색케 했다.
훈센 총리는 연설 도중 농담을 던지거나 참석자들에게 엉뚱한 질문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론 좌중들을 폭소하게 만들거나, 때로는 두서없는 질문을 던져 배석한 고위관료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총리의 뜬금없는 질문에 식은땀을 흘리며 쩔쩔매는 고위관료들의 모습이 종종 TV 화면에 나올 정도다. 물론 그의 연설을 좋게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훈센 총리는 종종 화려한 미사여구와 적절한 비유를 덧붙여 연설을 해 주목을 받기도 한다. 또 '중졸'이라는 최종학력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문학적 수사와 표현력이 좋다.
총리 연설 열심히 받아 적는 관료들, 왜?때로는 그가 툭툭 내뱉은 말 한 마디가 곧 이 나라 법이 되기도 한다. 그 탓에 경찰과 군부는 물론이고 사법부도 연설 내용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실제로 그의 말 한마디가 현실이 된 적도 적지 않다. 때로는 법원 판결이 일순간에 뒤바뀌기도 한다.
지난달 살인교사 혐의로 도피한 한 부동산재벌의 부모가 보석 상태에서 베트남 국경 쪽으로 도주하려다 잡힌 사건이 있었다. 당시 이들의 보석을 허가한 프놈펜지방법원장이 훈센 총리의 말 한 마디에 그 다음날 법복을 벗었다.
이외에 최근 음주운전 끝에 총리 관저로 돌진해 경호원들까지 다치게 한 여성 운전자가 총리의 말 한 마디에 보석으로 풀려난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중요한 건 이 모든 일이 일반대중을 상대로 한 연설 중에 우연히 또는 즉흥적으로 쏟아져 나온 총리의 발언이 단초가 됐다는 점이다. 그런 분위기 탓인지, TV 화면에서 총리의 연설 내용을 열심히 수첩에 받아 적는 관료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국제인권단체들은 최고 권력자의 말 한 마디에 사법부의 정의가 흔들리는 캄보디아 현실을 거세게 비난한다. 하지만 훈센 총리는 '외국인권단체들이 남의 나라 정치에 지나치게 개입하고 있다'며 역공세를 펴기도 한다.
이렇듯 총리가 연설 중 내뱉은 말들이 종종 문제를 일으키고, 언론의 도마 위에도 자주 오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대중연설을 자신의 정치적 소신과 신념을 밝히는 도구로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매우 영리한 정치인이란 것은 야당지지자들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총리를 오랫동안 수행해온 현 고위직 정부관료 타마론(가명)씨는 사견이라 전제하며 "훈센 총리는 대중연설에 대해 큰 자신감을 갖고 있다, 화술이 정말 좋다"면서 "연설문 한 장 없이도 2~3시간은 거뜬히 청중을 휘어잡을 입담과 체력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그는 이를 적극 활용, 대중적 인기와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창구로 활용하는 능력도 갖고 있는 매우 스마트한 인물이다"라고 평했다.
그런 훈센 총리가 이번엔 또 다른 돌출 발언으로 외신들의 입맛에 맞는 좋은 기사거리를 제공했다. 한 지방 연설에서 최근 '세기의 대결'이라고 불린 복싱 경기 결과에 대해 강한 불만을 토로한 게 발단이 됐다.
"파퀴아오 승리에 건 5천 달러, 내줄 수 없다"
지난 6일 훈센 총리는 최근 미국에서 치러진 복싱매치에서 파퀴아오가 편파 판정으로 메이웨더 주니어(38·미국)에 졌다고 주장하며 "파퀴아오의 승리에 건 5천 달러를 내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아마도 캄보디아 국민들에게 미국이란 나라에서 벌어진 경기의 공정성과 편파판정을 강하게 비판하고 싶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론 인권 문제 등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미국이 얄미워 어떤 방식으로든 딴죽을 걸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노련한 정치인의 전혀 사려 깊지 못한 발언은 다소 엉뚱한 파장을 불러왔다. CNBC, 중국 신화사 등 주요 외신들이 앞다퉈 이 독재자의 의도와는 180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사를 내보냈기 때문이다.
대부분 외신들은 총리가 실제로 미화 5000달러를 내기에 걸었는지에 대한 진위 여부나 총리의 발언 요지가 무엇인지 따지기에 앞서, '캄보디아 총리가 필리핀 출신 파퀴아오 선수에 내기로 건 돈을 주지 않았다'는 논조로 기사 제목을 뽑아, 가난한 나라의 장기 독재자가 평소 지닌 부정적 이미지를 다시 한 번 더 부각시키며 조롱했다.
특히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난 5월 4일자 인터넷뉴스 기사에서 훈센 총리의 이번 내기 발언을 언급했다. 이 기사는 2011년 훈센 총리가 공개한 재산 내역까지 구체적으로 인용, 그의 유일한 수입이 베팅 금액의 4분의 1도 안 되는 1150달러(124만 원)라는 점을 꼬집기도 했다.
한편, 외신들이 훈센 총리의 내기를 둘러싼 돌출발언을 문제 삼자, 파이 시판 캄보디아 정부대변인은 급하게 나서 "훈센 총리가 단순히 농담을 한 것일 뿐, 현금이 오고 갈 만큼 진지한 내기는 아니었을 것"이라며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이미 주요외신들은 앞다퉈 이 기사를 전송한 상태였고, <연합뉴스> 등 우리나라 언론매체 여러 곳도 이 뉴스를 내보낸 뒤였다. 현재까지는 훈센 총리가 이 문제를 추가로 해명하거나 언급했다는 소식은 없다.
그렇다면 훈센 총리의 연이은 돌출 발언에 국민들의 반응은 어떨까? 총리의 돌출 발언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주로 젊은 도시 지식인들이 많다. 그들은 훈센 총리가 나라 망신을 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평범한 현지인들의 반응은 좀 다르다. 그냥 웃어넘기거나 침묵하는 시민들이 더 많은 편이다. 훈센 총리를 지지해서가 아니다. 총리의 돌출 발언이 워낙 잦아 이미 식상하기 때문이다. 또 당장 먹고 살기 급급한 일반 국민들은 한가하게 정치인들의 말실수를 안주 삼아 현실 정치에 관심을 가질 만한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랜 독재로 누적된 피로감 때문에 이제는 현실정치에 대한 관심조차 사그라진 것인지도 모른다.
"훈센 총리 지루한 연설, 5~10년 더 봐야 할 듯"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캄보디아 훈센 총리는 30년 아시아 최장기 집권 통치자다. 그는 최근 또 다른 연설을 통해 장기집권에 대한 욕망을 여전히 내비친 바 있다. 지난 2013년 총선을 앞두고, 74세까지 총리직에 남아 있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부정선거 논란으로 얼룩진 지난 총선결과에서 보듯 여당(CPP)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가 예전만 못하다. 3년 후 선거에서 다시 이긴다는 확실한 보장도 없다.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전문가들은 야당이 승리해도 순순히 정권을 양도할 훈센 총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유혈사태 등 양측의 물리적 충돌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국민들도 바로 그 점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야당 측도 훈센 총리에 충성하는 군부의 힘을 잘 알기에 야당이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더라도 적당한 선에서 여야 합의 하에 연정을 선택할 가능성이 지금으로는 매우 높다고 현지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름을 밝히기 꺼려한 야당 성향의 현지 언론인 역시, 야당이 다음 총선에서 확실한 승리를 장담하기는 솔직히 어렵다며, 그 이유로 "토지개혁실패 등으로 현 정부 여당의 인기가 낮지만, 당장의 혼란스런 민주주의보다는 안정된 독재통치체제를 은근히 선호하는 보수적 성향의 국민이 아직은 더 많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덧붙여, 다음 총선 결과와 총리의 장기집권 가능성에 대해서는 우회적 표현을 통해 이러한 전망을 내놓았다.
"여러 가지 변수가 있어 솔직히 장담하기는 어렵지만, 지금 상태만 봐서는 TV로 생중계되는 훈센 총리의 길고 지루한 연설을 최소 5~10년 정도는 더 봐야 할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