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한국을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밥상도 '시스템'의 산물입니다. 이 시스템은 누가, 어떻게 결정할까요? 한국인의 끼니, 그 실체를 드러내고 오늘날의 음식문화 지형도 살펴봅니다. 궁극적으로는 한국 노동자들의 '행복한 밥상'이 어떻게 가능할지 그 대안적 접근법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
길티 플레저미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의 주인공 프랜시스 언더우드에게는 자신만의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가 있다. 길티 플레저는 자신이나 타인의 행동에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순간적 과정이 너무 즐거워서 의지와 상관없이 항복하는 감정이나, 남에게 보여주긴 창피하지만 비밀리에 탐닉하는 무언가를 말한다. 언더우드는 힘든 순간이 올 때마다 몇 십 년째 단골인 바비큐집에 찾아가 립을 먹는다.
내게도 그런 길티 플레저가 있다. 패스트푸드. 어제도 나는 '콰○○' 치즈 햄버거를 먹었다. 치즈가 4종류나 들어갔다니, 환장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학교에 패스트푸드 체인점이 생기고부터 하루에 두세 번은 그곳에 간다.
나는 비만이다. 항상 살을 빼야 한다고 말한다. 안 그래도 몸에 안 좋다고 하는 패스트푸드가 비만에는 더 쥐약일 테다. 그런데도 간다. 기름지고 짠 맛에 중독되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시청, 광화문, 신촌, 학교 등 서울 곳곳을 쏘다니며 각종 패스트푸드를 섭렵하는 건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이 이유가 더 크다. 어딜 가든 먹고 나오는 데까지 15분이면 된다. 게다가 그놈의 '착한 식당'. 반찬 재활용 때문에 어디 허름한 식당에는 들어가기 무서운 세상에서 애먼 곳에 들어가는 모험을 하기보다는, 하향평준화 되었을지는 몰라도 평균적인 맛과 서비스가 보장되는 곳이 낫다.
실은 더 큰 이유도 있다. 왜 그리들 다른 사람에 관심을 갖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여느 식당에 가 혼자 밥을 먹으면 주위 사람들이 힐끔댄다. 자의식 과잉일지 몰라도, 어쨌든 악몽과도 같은 시간이다.
패스트푸드점은 그런 악몽에서 자유로운 공간이다. 물론 '커플'들이 암약하는 터전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많이들 혼자 와서 혼자 햄버거를 먹고, 혼자 잘 정리하고 나간다. 누가 힐끔대면서 '어휴, 혼자 햄버거를 먹다니 왕따인가 봐. 어휴 불쌍하다' 할 것만 같은 망상이 절대 생기지 않는 곳이다.
나 혼자 먹는다'혼자'가 대세인 시대다. 혼자 사는 여자들의 이야기는 이미 한 번 유행이 지난 지 오래고 이제는 혼자 사는 남자들의 이야기가 공중파를 장식한다. 혼자 사는 모습은 우리의 식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카페에 혼자 앉은 사람들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지 오래다. 편의점에서 홀로 서서 라면을 먹는 모습 또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풍경도 있다. '혼밥(혼자 먹는 밥)'이다.
화장실 변기에서 홀로 도시락을 까먹거나 홀로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고깃집에서 고기를 구워먹는 '인증샷'이 가끔씩 인터넷에 올라온다. 사람들의 반응은 극과 극이다. 혼자 도시락을 까먹는 사람에게는 "어휴 저 찌질이는 뭐야?"라는 댓글이 달리고, 홀로 패밀리 레스토랑에 간 사람에게는 "오오 용자 인정"이라는 댓글이 달린다.
한때 혼밥에도 단계가 있다는 글이 유행했다. 총 9단계까지 나뉘어 있었다. 위에서 말한 편의점 라면은 1단계, 패스트푸트점은 4단계다. 가장 어려운 7단계부터 9단계까지는 고깃집, 호프집, 패밀리 레스토랑이 차례차례 자리 잡았다.
혼자 밥을 먹는 생활은 집 바깥의 일만이 아니다. 케이블 방송에서 유행 중인 요리 프로그램에서는 이런 저런 창의적인 요리들이 난무한다. 초콜릿 파우더를 이용한 파스타, '간단하게' 집에서 만들 수 있는 컵케이크. 하지만 이런 것들이 1인 생활자에게는 사치다. 파스타를 만들려면 제면기가 있어야 하고, 컵케이크를 만들려면 오븐이 필요하다. 그런데 자취하는 친구들 집을 아무리 가 봐도 제면기는 고사하고 오븐도 본 적이 없다.
아, 전자레인지는 좀 있었다. 이런 말을 하면 전자레인지를 이용한 요리들도 많던데 그런 요리는 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역시 내 대답은 "글쎄요?"다. 요리기구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우리에겐 식재료의 문제가 닥친다. 요즘은 1인용으로 잘린 두부, 1인용만큼만 덜어놓은 파 등 1인용 식재료들도 많다지만 여전히 대부분은 4인용 가구를 기준으로 포장해 진열한다.
물론 4인용 식재료를 살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주위 친구들의 자취방은 요리기구 들여놓을 공간이 없듯이 그 많은 식재료를 들여놓을 냉장고 역시 없다. 그들 방에 있는 냉장고는 집에서 보내 온 밑반찬 몇 가지, 마실 생수 몇 개 들여놓으면 꽉 차고 만다.
넓은 원룸을 잡아서 넉넉한 사이즈의 냉장고를 들여놓았다고 하자. 그러면 이제 또 다음 문턱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시간. 우리에게 요리를 해먹을 시간은 사치다. 그야말로 밥이나 제대로 챙겨먹고 살면 다행인 세상이다. 고등학생들에게 아침밥을 챙겨주던 신동엽의 모습은 벌써 10년 전 이야기이지만, 지금도 우리에게 똑같이 통한다. 요리를 할 만큼의 여유로운 시간이 우리에게는 별로 없다.
바쁜 주중에 제대로 자지 못한 잠을 늦잠으로 벌충하고, 밀린 빨래와 청소를 하고 나면, 요리는 뒷전으로 밀린다. 그러다 결국, 혼자 먹을 건데 그냥 대충 먹고 말지라는 생각으로 가스레인지에 라면 물을 올린다. "일요일엔 내가 짜○○○ 요리사!"라고 외치는 광고가 있다. 일요일에도 우리가 요리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물 끓이고 짜장 비비는 5분밖에 없다는 말처럼 들린다고 하면 너무 심한 비약일까?
나는 먹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을 비틀어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먹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우리가 먹는 것에 의해 우리는 정의된다. 혼자 먹는 일에 나는 점차 익숙해져간다. '혼밥'에 익숙해지니 멀어지는 것도 있다. 혼자 갈 수 없는 곳들. 7단계, 8단계, 9단계의 음식점들.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저녁은 그런 곳에 갈 수 있는 시간이다. 하지만 나의 점심은 그런 곳과 멀어진 지 오래다.
먹는 곳에서도 계급이 읽힌다면 지나친 말일까. 대부분의 '고급' 음식점들은 혼자 가기 꺼려지는 곳들뿐이다. 혼자서도 편하게 갈 수 있는 곳은 편의점, 김밥집, 패스트푸드점뿐이다. 과거에는 빼빼 마른 몸이 가난의 상징이었다지만, 현대에 가난의 상징은 비만이다.
엄마의 심부름으로 찌개에 넣을 두부를 고를 때 나의 손이 향하는 곳은 유기농 두부가 아니다. 산포제를 쓰지 않았다고 써놓긴 했지만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건지 의문이 가는 가장 값싼 두부다. 나의 점심은 간단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김밥, 알밥, 도시락이지, 좋은 재료로 정성들여 만들어진 슬로우 푸드가 아니다.
혼자 사는 세상에서 좋은 먹거리란 나에게 먼 나라의 이야기만 같다. 그 먹거리를 되찾기 위해 어떻게든 누군가를 붙잡고 같이 밥을 먹어야 할까? 아니면 '세상 어차피 혼자 사는 것'이라는 명제를 받아들인 채 홀로 밥을 먹는 일에 익숙해지는 나를 받아들여야 할까? 답을 찾지 못한 채 나는 오늘도 편의점에서 점심을 때운다.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laborzine.laborparty.kr) 20호(2015년 5월)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