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4월 동료인 김기설씨의 분신자살을 방조하고 유서를 대신 작성했다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가 재심을 통해 무죄를 확정받은 강기훈씨가 24년 전 수사 검사들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18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을 통해 공개한 이메일에서 강씨는 "지금 건강이 안 좋다, 대법원 선고를 앞두고 건강이 악화되어 지인들과도 연락을 끊고 지방에서 요양을 하고 있다"고 근황을 전했다. 지난 14일 대법원 선고 당시에도 강씨는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
이메일에서 강씨는 "책임을 질 사람은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그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고 법적 절차를 진행할 의사를 피력했다. 이와 관련해 강씨의 변호인 송상교 변호사는 구체적인 법적 대응 계획을 정한 건 아니다"라며 "우선 가해자들의 반성과 사과를 촉구하는 의미가 큰 걸로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당시 검사들 수사 정당성 옹호 "조작? 구체적 증거 있어야"1991년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신 쓰고 분신자살을 방조했다'고 결론 낸 수사부서는 서울지방검찰청 강력부다. 당시 강력부장은 대법관을 지난 강신욱 변호사이고 주임검사는 신상규 변호사, 수사 참여 검사는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곽상도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 윤석만·임철·남기춘 변호사다.
이들에게선 강씨에 대한 사과가 나오지 않을 걸로 보인다. 지난 14일 대법원 판결 직후 임 변호사는 "(유서대필 사건이) 조작이라면 무엇이 조작인지 증거를 갖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라"고 반박했고, 남 변호사는 "사과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현재의 척도로 옛날에 한 판결을 다시 하면 결론이 달라질 것"이라고 당시 수사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하지만 당시 사건 수사와 재판에 관여한 법조인들이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강씨뿐 아니라 법조계에서도 나오고 있다. 서울지방변호사회(회장 김한규)는 하루 전 낸 성명서에서 "유서대필 사건으로 누명을 쓴 강기훈씨에게 이 사건 수사와 재판에 관여한 법조인들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서울지방변호사회는 "무죄 판결 확정으로 이번 사건이 끝난 것은 아니다. 바로 진실을 호도하여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데 관여한 법조인들의 엄중한 책임 추궁과 진실된 참회가 있을 때 비로소 끝맺을 수 있다"며 "과거의 잘못을 겸허히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야말로 실추된 사법부의 권위를 바로 세우는 것이고, 법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일침을 놨다.
다음은 공개된 이메일 전문이다.
1. 저는 지금 건강이 안 좋습니다. 대법원 선고를 앞두고 저는 건강이 악화되어 지인들과도 연락을 끊고 지방에서 요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되새기며 아픈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몸이 감당하기 어렵기에 앞으로도 직접 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무죄 확정을 축하하고 제 건강을 염려하시는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지면을 통해 전하면서 이와 함께 제 간략한 소회를 밝히고자 합니다. 2. '유서는 김기설 본인이 쓴 것이고 강기훈이 쓴 것이 아니다' 이 단순한 것을 확인받는데 무려 24년이 걸렸습니다. 당연한 판결을 받기 위해서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3. 지난 5월 14일(대법원 재심 무죄 확정일)로서 저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끝났습니다. 이제 역사적 판단과 책임이 필요한 때가 되었습니다. 제가 (재심)항소심에서 진술했듯이 "진정한 용기는 잘못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당시 저를 수사했던 검사들과 검찰 조직은 제가 유서를 쓰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진실을 왜곡하였습니다. 지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여야 합니다. 법원은 (유죄 판결을 한) 1991년, 1992년은 물론이고 재심 후에도 2009년 검찰의 재항고 사건을 3년이나 방치하였으며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도 과거의 잘못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법원도 한 마디 사과라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4. 피해자는 저 하나면 족합니다. 저를 끝으로 다시는 이런 피해자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책임을 질 사람은 책임을 져야 마땅합니다.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그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5. 이번 재심 무죄판결이 나기까지 많은 분들이 애썼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제 몸이 병들어 지쳤을 때 후원해주신 분들에겐 큰 빚을 졌습니다. 꿋꿋이 잘 버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5년 5월 강기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