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피돌리오 언덕에는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르네상스 건축의 대표작 '캄피돌리오 광장(Piazza del Campidoglio)'이 있습니다. 착시 현상을 보여주는 진입 계단을 올라 '포로 로마노'에서 옮겨온 '카스토르와 폴룩스(제우스의 아들 쌍둥이 형제)'의 거대한 석상을 지나면 마치 극장처럼 배치된 세 개의 건물들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중앙의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을 중심으로 정면에 옛 시청사였던 '세나토리오 궁전(Palazzo Senatorio)'과 좌우의 '누오보 궁전(Palazzo Nuovo)', '콘세르바토리 궁전(Palazzo dei Conservatori)'입니다.
'캄피돌리오 광장'은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별 모양 패턴의 타원형 바닥과 사다리꼴로 이루어진 주변 건물의 배치가 절묘한 비례와 조화를 이루고 있어 광장 자체만으로도 미켈란젤로의 예사롭지 않은 예술성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런데 '콜로세움'부터 '팔라티노 언덕'과 '포로 로마노'를 지나 이곳까지 쉴 틈 없이 걸어왔던 터라 발바닥에 불이 납니다. 발뒤꿈치에 잡혔던 물집이 다시 터졌는지 쓰라려옵니다. 잠시 '누오보 궁전'의 기둥 아래 풀썩 주저앉아 다리를 쉽니다. 비록 복제품이지만 광장 중앙의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은 인기가 많습니다. 수많은 여행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현장 수업을 온 듯한 10대 후반의 학생들은 선생님의 설명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멍하니 한참 동안 그 광경을 바라봅니다.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이탈리아어지만 왠지 선생님과 학생들의 현장 수업이 부럽기도 하고 동참하고 싶어집니다. 물론 개중엔 제일 뒤쪽에서 선생님의 말은 듣지도 않고 앞의 여학생들에게 장난을 거는 남학생들도 있지만 그들도 선생님에게서 박물관 입장권을 받고 나서는 제법 점잖은 태도로 박물관으로 들어갑니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따라 '누오보 궁전'과 '콘세르바토리 궁전'을 합쳐서 조성한(두 건물은 지하통로로 이어져 있습니다) '카피톨리니 박물관(Museo Capitolini)'에 입장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 중 하나인 '카피톨리니 박물관'에서는 지난 사흘 동안 만났던 르네상스나 바로크 미술보다는 고대 로마 미술의 정수들을 집중적으로 만나려고 합니다.
'콘세르바토리 궁전' 안뜰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거대한 석상의 파편이 눈에 들어옵니다. 두상과 한쪽 손, 한쪽 발, 한쪽 무릎 정도만 남은 석상의 주인은 콘스탄티누스 2세라고 추정됩니다. 두상만 해도 성인 키를 훌쩍 넘는 이 거대한 석상은 좌상이었는데도 실제 높이가 10미터를 넘었을 거라고 합니다. 시작부터 고대 로마가 무지막지하게 다가옵니다.
무지막지하게 다가오는 '고대 로마'전시실의 곳곳을 채우는 고대 로마의 석상과 청동상들. 고대 그리스 조각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조각 작품들이 쉴 틈 없이 눈앞에 이어집니다.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가시를 뽑는 소년상(Spinario Cavastina)'이었습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발바닥에 박힌 가시를 뽑기 위해 집중하고 있는 소년. 실물과 가까운 크기의 사실적인 소년상을 보고 있노라니 손을 뻗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신화 속의 위대한 신이나 역사 속의 인물들을 떠올리기 쉬운 그리스나 로마의 조각상들. 그 사이에서 가장 인간적인 동작과 표정으로 앉아 있는 어린 소년에게 인간적인 매력이 느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런데 소년에 대해 흥미를 가진 건 나뿐만이 아니었나 봅니다. 헬레니즘 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청동 소년상은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조형 중 하나로 고대 이래 수많은 작가들이 이 작품을 인용했습니다. 특히 1500년경 이후 로마에서만 50여 개 이상의 복제품이 확인되었다 하니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실험들이 얼마나 다양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년상 바로 옆방에는 그 유명한 늑대의 젖을 먹고 있는 로물루스, 레무스 형제의 청동상이 있습니다. 정식 이름은 '카피톨리노의 암늑대(Lupa Capitolina)'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 레무스는 형 누미토르의 왕위를 찬탈한 아물리우스로부터 티베르강에 버려진 뒤 '팔라티노 언덕'에서 아버지, 마르스(군신, 軍神)가 보낸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랍니다. 그러다가 성장하여 할아버지, 누미토르의 복위를 도운 뒤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게 되죠.
하지만 권력은 형제 사이도 갈라놓나 봅니다. 로물루스는 약속을 어기고 자신이 세운 성벽을 뛰어넘었다는 구실로 동생 레무스를 살해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이집트의 오시리스와 세트 신화도 그렇고 구약 성경의 카인과 아벨도 그렇고 형제 간의 비극은 고대 신화의 중요한 모티프였나 봅니다. 어쨌든 그렇게 권력을 독점하게 된 로물루스는 로마의 시조로 불리게 됩니다.
한편 쌍둥이의 어머니이자 누미토르의 딸이었던 실비아가 불의 여신 베스타의 신녀였기 때문에 로마 곳곳에는 베스타의 신전이 세워졌는데 오전에 만났던 '포로 로마노'의 베스타 신전도 그 중 하나입니다.
역사 교과서에 보았던 쌍둥이의 동상을 실제로 눈앞에서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쌍둥이의 모습이 귀엽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화는 신화일 때만 신비로운 걸까요? 오랫동안 기원전 5세기경 에트루리아인들이 만든 것으로 믿어졌으며, 쌍둥이의 모습은 15세기에 조각가 안토니오 폴라이올로가 덧붙인 것으로 추정되었던 이 청동상의 제작 연대가 탄소연대 측정 결과 13세기 무렵인 것으로 밝혀져 그 신비로움이 조금은 퇴색한 느낌입니다.
그래도 뭐 어떻습니까? 아주 오랜 세월 이 청동상은 로마 기원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앞으로도 오랜 세월 그 지위를 유지할 겁니다. 로마는 정말,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니까요.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의 삼각형 구도1층(우리 기준으로는 2층이지만 박물관 안내도에서는 1층을 0층으로, 2층을 1층으로 표시해 놓았습니다) 중앙에는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홀이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Statuaequestre Marco Aurelio)' 원본이 있습니다. 그런데 광장에 놓여 있던 것을 실내 홀에 옮겨 놓아서 그런지 조금은 갑갑한 느낌입니다. 오래된 청동상이라 관리와 보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실내에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하니 아쉽지만 이해를 해야될 것 같습니다.
기원 후 166년에서 180년 정도에 제작되었다고 여겨지는 황제의 기마상은 본래는 전체가 도금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청동상 여기저기 벗겨진 황금빛이 보입니다. 인물과 말의 정교한 묘사도 물론이지만 가장 내 눈길을 끈 것은 조각상의 구도였습니다.
믿어지십니까? 저 커다란 청동 조각상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말의 다리뿐이라는 사실. 거기다가 말은 한쪽 다리를 들고 있습니다. 어떤 보조 장치도 없이, 불안정한 삼각형 구도의 가느다란 다리로 엄청난 무게를 거의 2천 년 가까이 지탱하고 있었던 셈이지요. 고대 로마의 '수준'을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될 또 다른 이유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은 르네상스 이후 모든 기념 기마상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했던 것으로 유명한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 그런데 중세 시기에는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상이라 오인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파괴를 면했다고 합니다. 더구나 원래 라테라노 광장에 있던 기마상이 1538년 교황 파울루스 3세의 의뢰로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캄피돌리오 광장'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습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뒤로하고 천천히 로마의 조각 작품들을 살펴봅니다. 화려한 부조로 장식된 부부의 석관, 피리 연주 시합에 져서 아폴론으로부터 살가죽이 벗겨진 채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마르시아스(Marsyas)상',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수많은 유방과 사냥을 상징하는 동물들의 머리 모습을 온몸에 두르고 있는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베르니니의 '메두사 두상' 등. 마치 조각 작품들의 향연 같습니다. 고대 로마의 모습을 이제야 제대로 만나는 것 같습니다.
발길은 이제 2층으로 향합니다. '카피톨리니 박물관'의 2층은 회화 전시실로 꾸며놓았습니다. 이곳에서는 로마에서 계속 만나왔던 카라바조의 '성 세례 요한'과 '점쟁이'를 비롯하여 틴토레토의 '예수 3부작'과 '막달레나 마리아의 참회', 안니발레 카라치의 '성 프란체스코의 참회', 프로스페로 폰타나의 '성 카타리나의 논쟁' 등 르네상스부터 바로크 시기까지의 명작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