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5월 20일 오후 1시쯤, 33세의 한 여성이 친구 3명과 택시를 타고 수다를 떨며 가다가 갑자기 메스꺼움과 마비, 구토 증상을 호소한다. 그녀는 여행 중이었다. 조금 전에 만난 친구 3명과 호텔로 가는 길이었다.
호텔에 도착한 직후인 1시 30분경에 구급차로 병원에 이송될 정도로 위험한 상태였다. 경련과 혈압저하, 부정맥 등의 증상이 나타나 치료를 했지만 그녀는 결국 오후 3시에 사망하고 만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론 택시를 타기 직전에 아마도 먹었을 점심식사에 문제가 있었거나, 이 여성에게 이미 어떤 병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부검을 한 의사도 사인이 될 만한 어떤 단서도 발견하지 못한다. 심장의 색이 아주 조금 변해있었으나 의심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살인이 전혀 의심되지 않는 죽음이었다. 그리하여 장례를 치르려면 작성해야하는 문서에 '급성 심근경색'이라 쓰고 장례를 치르게 된다.
그러나 몇 년 후 살인범으로 사망자의 남편이 체포된다. 그리고 1994년 9월 도쿄지방법원은 남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참고로 사망자의 남편은 여성이 죽던 그날 아침에 함께 출발했으나 급히 도쿄로 돌아가야 하는 일이 생기는 바람에, 아내만 함께 여행하기로 했던 여자 친구들과 호텔로 가는 길이었다고 한다.
멀리 떨어져 있던 남편이 아내를 서서히 죽였다?어떤 추리 혹은 범죄소설의 줄거리 같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일본을 충격에 빠뜨렸던 '의혹의 보험금 살인 사건'이라고 한다. 여하튼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론 남편이 억울한 누명을 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죽음의 전조 증상이었던 고통을 호소할 당시 함께 있지도 않은 남편이 아내를 죽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몇 년간의 법정싸움 끝에 2000년 2월, 남편은 무기징역을 확정 받는다. 하마터면 묻힐 뻔 했던, 완전범죄를 꿈꾼 남편의 명백한 살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행하지도 않은 남편이 어떻게 멀리 떨어져 있는 부인을 죽였다는 것일까? 그것도 이처럼 사건과 전혀 상관없는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가다가 발작을 일으켜 결국 죽게끔 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범인이 아내를 살해하는데 쓴 것은 우리에게도 사약의 재료로 많이 알려진 '(각시)투구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투구꽃의 독성은 먹은 직후 바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여성은 남편과 헤어진 몇 시간 후에 죽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내가 더 놀란 것은 혈액 속에 복어 독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투구꽃 독과 복어의 독은 심장의 통로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서로 상반된 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조금 더 나중의 일이다. 나아가 이 두 가지 독을 함께 쓸 경우, 독성의 발현이 늦어진다는 원리를 발견하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피해자가 나하 공항을 떠난 것이 12시이고 사망한 것은 오후 3시였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효과가 나타나는 투구꽃 중독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이중 캡슐 속에 길항(두 가지 약물을 함께 사용하여 다른 약물의 효과를 감소시킴) 작용을 하는 두 독, 복어의 독과 투구꽃 독을 넣어 피해자에게 복용시킴으로써 시간차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으로 독을 제압하는' 실험을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한 사람은 이 사건의 범인인 셈이다. - <법의학 진실을 부검하다>에서. <법의학, 진실을 부검하다>(바다 출판사 펴냄)는 이 사건과 또 다른 투구꽃 살인 사건에 법의학이 어떻게 관여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남편에게 살해된 한 여성의 억울한 죽음, 그 진실이 밝혀질 수 있었던 것은 한 법의학자의 세심한 주의력과 진실을 밝히려는 (이 책의 저자를 포함한)법의학자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사건 당시만 해도 혈액 속에 있는 특정 성분을 밝혀내는 것이 그리 발달하지 못한데다가, 누가 봐도 살인이 거의 의심되지 않을 정도로 육안으로 사인이 발견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혹시 몰라 장기와 혈액 일부를 보관했기 때문에, 진실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읽으며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포천 제초제 연쇄살인사건'이나, 의붓딸에게 소금밥을 먹여 나트륨 중독으로 죽게 한 사건 등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우리에게 어느 날 보도되는 것으로 알려진 이 사건들은 죽음의 진실을 밝히려는 수사관들과 법의학 관련자들의 능력과 검질긴 노력 덕분에 진실이 밝혀질 수 있었다. 포천 제초제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을 밝히고자 이미 매장한 시체를 부검하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40여년 동안 다뤘던 사건 중 의미 있는 것들만 모아<법의학, 진실을 부검하다>의 저자는 일본의 한 법의학자. 저자 '오시다 시게미'는 어느 날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법의학 관련 책을 읽다가 법의학자가 되기로 결심, 주로 살인범이란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들 편에 서서 시신을 부검해 진실을 밝혀낸 일본의 권위 있는 법의학자라고 한다(국내에선 이 책 이전에 <시체의 입>이란 책이 소개되었다고).
그는 투구꽃 살인사건처럼 완전범죄로 묻힐 뻔 했던 억울한 죽음들의 진실들을 밝혀낸다. 성범죄에 이용된 DNA 검사에 문제점이 있었음을 밝혀냄으로써 19년 동안 살인누명을 쓴 한 피고인의 무죄를 입증하기도 했다. 또 부검 시 누군가 간과했던 것들을 다시 부검하면서, 그리고 특정의 목적으로 증거를 날조한 수사기관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들의 무죄를 입증해낸다.
저자가 지난 40여 년 동안 관여했던 사건들 중 법의학자로서 의미 있었던 사건들을 소개하면서 법의학의 세계를 쉽게 알려주는 게 이 책의 주요 내용들이다. 드라마틱한 내용들이라 범죄 혹은 추리소설을 읽을 때의 긴장과 수많은 추측들로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사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막연한 거리감이 있음에도 막연히 끌리는 법의학에 대한 지극한 호기심 때문이다. 그런데 법의학 세계나 관련 지식들이 실은 우리의 생활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 그러니 어느 정도의 법의학 지식 혹은 상식을 꼭 알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건·사고는 늘고 있는데, 법의학자는 줄어드는 현실법의학 관련 책들은 다른 분야의 책에 비해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이 글을 시작한 투구꽃 살인사건이나 제초제 연쇄살인사건, 성범죄 사건처럼 주로 살인사건에 법의학이 관여하는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때문에 항공기나 선박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경우나 의료사고에도 법의학이 관여한다는 것을 간과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의료사고에 법의학이 어떻게 관여하는가?'가 그 내용이다. 게다가 언제부턴가 우리가 감기에 걸린 누군가에게 "미련스럽게 고생하지 말고 병원에 가서 주사 한방 맞아"식으로 권고하는 사람들이 흔할 정도로 맹신하는 사람들이 많은 주사(액)의 문제점을 밝히는 것으로 법의학과 의료사고의 관련성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더욱 절실하게 와 닿았다.
저자는 대형 항공기사고나 의료사고는 물론 성범죄나 살인 등 법의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건 사고는 갈수록 늘고 있으나 법의학자들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어 염려스럽단다. 일본의 현실이라지만 우리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란 지레짐작은 지나칠까. 공연한 우려일까.
자칫 어렵고 딱딱해지기 쉬운 법의학의 세계를 누구나 이해하기 쉽도록, 그리고 흥미롭게 풀어쓴 때문에 출간 직후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법의학 교재로 쓰이고 있다는 이 책이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 특히 의학에 관심을 둔 청소년들이 많이 읽음으로써 법의학자들을 많이 배출, 전문가가 부족해 억울하게 묻히고 마는 죽음들이 줄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덧붙이는 글 | <법의학, 진실을 부검하다> | 오시다 시게미 (지은이) | 김혜민 (옮긴이) | 바다출판사 | 2015-04-25 | 15,000원